-58화-
내 미래를 알았으니 이제 과거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녀님은 그 미래를 바꾸는 게 힘들 거라 했지만…… 난 바꿔야만 해.’
대신녀님은 아이를 잃었고, 나는 쌍둥이들을 잃고.
하지만 대신녀님의 아이는 살아 있었지만, 내 미래는 명확히 정해져 있는걸. 쌍둥이들의 죽음이라는 게. 내 눈앞에서 죽는 그 현실이, 모두에게 버림받고 대공의 자리에서조차 쫓겨나는 두 아이들이.
그렇기에 난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이 나이 또래의 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그냥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기 바쁜 것처럼.
“자주 오라 했다구요?”
“대신녀님이…… 직접요?”
“네! 되게 신비로운 분이었어요. 눈이 보이지 않으시는데 마치 보이는 것처럼 구셨어요.”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니…….”
역시나 예상은 그대로 흘러갔다. 서로 눈치만 살피던 시녀는 갑자기 볼일이 생겼다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욕은 모두 끝이 났다. 저녁 시간에는 우리를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대공이 다시금 우리를 찾아왔다.
전날 대신녀의 이야기 때문인지 그는 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리를 바라봤다.
“오늘도 못 일어난 건가?”
“아침에 잠깐 일어나서 밥 먹고 다시 잠든 거예요.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어요.”
“그동안은 잘 몰랐는데, 정말 문제가 있었던 거였다니.”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오히려 대공이 무슨 일을 할까 조금 걱정이 몰려왔다.
“그래도 한번 자고 일어나면 활발하게 움직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 옆에 있던 로헨은 내 거짓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혹여라도 다른 일이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알았다. 그리고 고아 소녀, 아니 아이샤.”
“네?”
“나와 약속한 게 있었지?”
평소와 목소리가 사뭇 달랐다. 라리에게 하는 것처럼 대공의 목소리는 다정한 편에 속했다. 평소와 다른 그 모습에 등 뒤가 조금 서늘해졌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로헨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나오게끔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막상 직접 그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아…….”
잠시 로헨과 라리를 바라봤다.
“그러네요.”
“기억하나 보구나.”
“못 했으니까, 약속 지킬게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로헨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분위기 뭐야.”
“뭐기는. 약속한 시간이 온 것뿐.”
“약속은 무슨 약…… 아…….”
뒤늦게 로헨도 기억이 난 듯 입을 어물거렸다. 자신이 공작에게 아빠라고 말하지 않으면 내쫓긴다는 그 말이.
“그건…… 그건……! 너무 불합리해! 내가, 내가 하는 일을 가지고 왜 아이샤가 내쫓겨야 하는데!”
“그러면 말하면 될 일 아니냐.”
“그…… 그건……!”
로헨은 입을 우물거렸다. 자존심이 절대 허락지 않는 것처럼. 알량해 보일 자존심이라 할지라도 그건 로헨을 지켜 온 방어막이었다. 그래서 로헨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난 어쩔 줄 모르는 로헨의 손을 꼭 잡았다.
“안 해도 돼.”
“안 하면, 내가 안 하면 네가 내쫓기는 거잖아. 그건…….”
“나를 위해 무언가 하지 않아도 돼.”
“아이샤.”
하지만 로헨은 어쩔 줄 몰라 나와 공작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제발 어떻게든 해달라는 것처럼.
“하지만 로헨, 공작님이 너에게 아빠라고 부르라는 건, 너의 그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렇게 하라는 건 나쁜 의도는 아닌 거 같아.”
갑작스러운 내 말에 공작과 로헨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쏠렸다.
“가끔은 그렇게 질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가르쳐 주시려는 것 같은데. 무조건 이기는 것만이 진짜 이기는 게 아니라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가끔은 스스로 물러남도 필요하다는 걸…… 물론 이것조차 억측일지 모르지만.”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소설 속에서 대공은 자식들이 하고 싶다는 건 다 해주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게 정말 아이들을 아끼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어떻게 할지 몰라서, 그 방도를 몰라서 그랬을 뿐, 이제 보니 대공의 마음이 조금씩은 이해가 되었다.
자기 자신조차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주체할지 모르는 사람 같아 보였으니까.
그리고 내 말에 로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강요하는 건 아니야. 그냥, 그냥 대공 전하가 나쁜 사람 같진 않아. 그 말을 하고 싶은 것뿐. 그러면 되었어요. 이런 제 말들이 로헨의 마음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는 걸까 봐 빨리 끝내고 싶네요.”
대공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기한 아이야. 내 편을 드는 건지, 로헨의 편을 드는 건지,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는 건지.”
“셋 다라고 하죠.”
‘나도 참 웃기네. 자존심을 굽히면 된다고 로헨한테 말해 놓고 나도 말 못 하고 있어.’
대공에게 날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그래도 로헨이 무의식적으로는 아빠라고 하지 않았냐고. 그 말을 왜 난 못 하는 걸까.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대신녀님이 내게 특별하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그에게 이런 부탁조차 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어차피 이런 말을 해도 대공이 나를 곁에 두지 않음을 알아서였을까.
“하나만 묻지. 너는 아이들 곁에 있고 싶나?”
“네.”
“그러면 왜 바라지 않는 거지? 떼라도 쓸 만한데?”
“질문 하나는 끝난 거 같은데요…….”
“아. 그렇군.”
이상하다. 예전이라면 무서워서 그의 말에 쉽사리 반박하지 못했을 텐데, 쌍둥이에게만은 보드라운 그의 느낌 때문에 나도 모르게 반박했다.
“하지만 아이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란다. 네가 내 질문에 대답해 준다면 부탁 하나는 들어주마.”
마치 내가 할 부탁은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그는 꽤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아, 그럼 네, 할게요. 대답.”
“그래. 그러면 왜 바라지 않는 거지?”
“바라 봤자 들어주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이들이 좋나?”
“네.”
조금의 주저도 필요 없었다. 진심으로 아이들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내 삶이, 마치 새로 주어진 이 삶이 쌍둥이들을 위한 삶이라는 것처럼. 신이 그렇게 인도하는 것처럼 난 내 모든 걸 쌍둥이를 위해 쓰고 싶어졌다.
그래야만 할 거 같아서, 그렇게 살아도 될 거 같아서.
그만큼, 나도 모르는 사이 좋아져 버려서. 이유 없이 누군가를 이만큼 좋아할 수 있다는 걸 쌍둥이들이 알게 해줘서, 그렇기에 난 조금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았다. 그럼 원하는 걸 말해 보도록.”
“여기 있어도 돼요? 쌍둥이들과 함께, 쌍둥이들의 유모처럼 아이들의 모든 것들을 제가 관리해도 괜찮아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적응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러도록.”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단번에 그랬던 것처럼.
“네? 갑자기요?”
“그래. 말을 했으니 나도 내 말을 지켜야지.”
“아…….”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처음부터 저를 이곳에 두실 생각이셨죠? 그래서…….”
“생각하기 나름이지.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고.”
그의 손이 처음으로 내 머리에 닿았다. 대공은 보드랍게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하지만 그런 대공의 모습에 로헨은 뾰루퉁했다.
“바뀌기라도 한 모양이야? 갑자기 아이샤를 왜 곁에 두겠다고 한 거야?”
“글쎄.”
“……뭐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가 보네. 아빠라고 안 해도 들어주는 것처럼.”
아마도 로헨이 아빠라고 불러서, 내가 뭔가 하지 않아도 어느새 마음을 연 로헨이 직접 말해 준 덕분에 내가 여기 있는 것 같다고, 그걸 말해야 했지만 대공은 날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말하지 말라는 것처럼.
“그럼 또 오마. 혹시 라리가 일어나거든 말해 다오. 제대로 진료를 받아야 할 거 같으니.”
“네. 그런데 대공 전하.”
“응?”
“아이들과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러는데…… 배울 것도 많고 그래서 그러는데…….”
“어딜 가고 싶길래 그리 뜸을 들이는 거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이곳에 있어도 되냐고 그 허락을 맡아 놓고 바로 물어보는 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도서관에 가고 싶어요! 제가 그래도 나이에 비해 글은 잘 읽거든요. 아이들한테 이것저것 가르쳐 줄 겸…….”
“가도록 해. 꽤 가고 싶었던 것 같은데.”
“네!”
“그런데 내가 내쫓았으면 어쩌려고 했지?”
그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적어도 당분간은 있게 해달라고 하려 하긴 했어요. 대공 전하라면 어쩐지 그 정도는 해주실 거 같았거든요.”
“확신하는 이유는?”
“신전에서 저를 데리고 오라 해서요?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내 말에 공작은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정말 진심으로 재밌다는 것처럼.
“참 신기한 아이야. 똑똑하긴 하구나. 맞아. 나는 내 아이들이 계속해서 축복받길 원해. 그래서 널 곁에 둘 생각은 있었단다.”
다행이다. 혹시나 내가 또 억측하는 걸까 봐 걱정했는데.
“난 아이들을 싫어한다.”
“네?”
“멍청하고 제멋대로에 떼만 쓰기 바쁘니까. 그런데 너는 좀 다르긴 달라. 너라면 괜찮겠어.”
“뭐를요?”
“아이들의 친구로 삼기에. 뭐 신분이 조금 걱정되는 면은 있지만, 그래도 그 신분을 뛰어넘을만큼 똑똑한 아이로구나. 내 아이들과 잘 지내려무나.”
처음이었다. 그에게 이렇게까지 인정을 받은 일은. 가슴이 마구 뛰엇다.
“네……!”
“그러면 나가도록 하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다오. 따로 기사를 하나 붙여 줄 테니까.”
“제게 기사를요?”
“이곳에 있으려면 네 수족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이전에 비하면 실로 비약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대공은 밖으로 나갔고, 로헨은 우물쭈물하다가 옆으로 다가왔다.
“축하……해.”
“왜 그렇게 수줍어해?”
“……미안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