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내가 말해도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믿질 않는 건지 계속해서 부정하던 그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원래 많이 잔다 하던데요.”
“누가요?”
“다른…… 이들이…… 주변에 아이가 있는 이들에게 모두 물어봤습니다.”
의외의 모습에 내 옆에 매미처럼 착 달라붙어 있던 로헨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대공은 대신녀와 이야기하느라 그걸 보지 못한 듯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대공.”
“새, 생각한다기보단 제대로 키워야 하니까…….”
“참 이상한 일이죠. 자식이 하나 더 있지만, 그 아이에게는 그러지 않으셨지요.”
“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때의 저는…….”
그는 우물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그 아이에게는 대공비가 있으니까, 그래서 그랬나 보죠.”
말은 그리했지만 대공의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았다. 무언가 찝찝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표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겠지만요.”
“참 이상합니다. 대신녀님 앞에서는 자꾸만…… 저도 모르게 모든 걸 말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자꾸만, 자꾸만…….”
“잊고 있던 마음을 이제야 깨닫는 거겠지요.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 마음을 쑥스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추태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지켜야 하기에 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을 숨길 필요도요.”
라리를 안고 있는 한쪽 손과 달리, 반대쪽 손은 힘없이 바닥에 축 처져 있었다. 대신녀의 손이 대공의 손을 잡았다.
움찔하던 대공은 그 손을 마다하지 않았다. 도리어 묘한 표정을 지을 뿐.
“볼 때마다 신기합니다. 어떻게 보이지도 않으시는데 정확하게 사람을 보시고, 정확하게 사람을 잡으시는지. 그리고 그 손을 잡을 때마다 마음은 왜 이다지도 약해지는지.”
“보이지 않는다 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앞이 안 보이는 건 맞지 않으십니까.”
“이미 시력을 잃은 지는 오래되었어요. 볼품없어졌죠.”
그녀는 반대 손을 자신의 눈에 가져다대었다. 내가 봐도 신기하긴 했다. 정말 무언가 기운 같은 게 느껴지는 걸까. 외양만으로는 전혀 나이를 먹은 것 같지 않은데, 시력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고 하니 좀 기분이 묘했다.
“송구합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보일 때는 몰랐던 것들은 보이지 않은 후에야 소중함을 알게 되니까요. 그러고 나서야 본질이 보이게 되니까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덕분에 뭐가 중요한지 알았으니까요.”
“본질…….”
“대공도 부디 알아차리기 바라요. 무엇이 중요한지를. 보이는 것에 팔려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요.”
“알겠습니다.”
대신녀는 살짝 미소 짓다가 로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공자. 로헨 블레어.”
“…….”
“내가 소중한 친구를 계속 데리고 있어 미웠나요?”
“미! 밉기는…… 그냥…… 걱정했던 거지.”
“그래요. 로헨. 이리 오겠어요?”
여전히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는 로헨을 느낀 건지 대신녀가 손을 로헨 쪽으로 뻗었다.
“잡으렴.”
“……싫은데. 뭘 믿고.”
하지만 대공이 로헨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싫어. 강요하지 마!”
이미 대신녀의 손은 로헨의 손을 잡아 버린 후였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겨 줘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마음 때문에 놓치지 말아요. 소중한 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으니까…… 로헨. 마음을 표현해요.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나에 대해 뭘 알고!”
“마음이 누구보다 여리다는 건 잘 보이니까요.”
“돌팔이네.”
“돌팔이 맞아요. 눈도 보이지 않고 다리도 못 움직이는 돌팔이. 그래도 늙은이의 충고는 생각보다 꽤 크답니다. 다른 나라들처럼 신탁을 내려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이죠.”
방금 전까지 떽떽거리던 로헨이 바뀐 건 그때였다.
“……몸이 아픈 것 때문에 돌팔이라고 한 거 아니야. 미안해요.”
“그렇게 날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지금 로헨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날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요?”
의아한 듯 로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주변에도 이미 있는걸요.”
로헨의 고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대공을 보고 라리를 보고 나를 보고 나서야 로헨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많을 리가.”
“대공과 마찬가지로 로헨도 직관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어요.”
신기하게도 로헨의 귀도 대공이 그랬던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뭐가 그리도 못마땅한 건지 로헨은 볼을 잔뜩 부풀리고선 고개를 휙 돌렸다.
“대공녀는…… 다음에 일어났을 때나 볼 수 있겠네요.”
대공은 이미 라리를 데리고 대신녀의 앞에 당도한 후였다. 그녀는 축 처진 라리의 손을 잡았다. 순간 그녀의 손을 통해 따스한 기운이 라리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지만, 내 눈엔 그게 보였다.
정말 내게 무슨 힘이 있는 것처럼, 나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신기하게도 라리의 안색이 조금씩 밝아졌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니 가끔 데려오도록 해요. 대공. 다른 건 못 해줘도 축복을 줄 테니.”
“자주 드나드는 게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다른 이의 시선이 중요한가요.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순한 양이라도 된 것처럼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올 때는 세 아이 모두 데려오도록 해요. 오랜만에 아이들을 보니 기분이 좋네요. 참으로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들이에요.”
“그런가요.”
그의 시선이 로헨과 라리에게로 향했다.
“네. 그리고 누구보다 아이샤는 두 아이를 좋아하는 게 느껴지네요.”
“저 아이가요?”
“단순하게 무언갈 얻어먹기 위해 대공자와 대공녀의 곁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볼 땐 그렇군요.”
“…….”
그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물론 그 시선이 오래가지 못햇다.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인 것 같군요.”
“이런 면에서 고집피우는 건 여전하군요. 대공.”
“…….”
“그럼 오늘은 이만 헤어지기로 하죠. 오랜만에 피곤하네요.”
“알겠습니다. 저희는 가도록 하겠습니다.”
대공은 로헨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로헨, 인사해야지.”
“……다음에 봐요. 아줌마.”
“로헨!”
대신녀에게 아줌마라고 한 로헨의 모습에 대공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하지만 대신녀는 그런 대공을 말렸다.
“나는 괜찮아요. 오히려 나를 사람으로 여겨 주는 사람은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도리어 그녀가 웃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직 교육을 받지 못해서…….”
“자유로움은 이때만 즐길 수 있는 거죠. 억압하지 마세요. 울타리에 가둘 수 없는 존재니까. 그럼 다음에 봐요. 조금 피곤하군요.”
대신녀는 옆에 있던 작은 종을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끝으로 밖으로 나온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차로 향할 뿐.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하는 듯 다들 표정은 오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때였다. 마차로 가는 우리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벌써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 멜로디아 신녀. 볼일은 다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야겠지.”
“신전을 구경하시는 건 어떠세요?”
다정한 그녀의 말에 대공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다들 피곤할 거 같으니 다음에 하도록 하지. 오늘은 처음으로 가족들……끼리의 외출이니까.”
가족이라는 말을 하며 대공은 나를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그러다 그의 시선이 다시금 멜로디아 신녀를 바라봤다.
“다음에 한번 보도록 하지.”
“좋아요. 제가 한번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샤. 우리 또 보겠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언제나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단 한 번도 그걸 의심하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자꾸만 마음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는 기분이다.
‘쌍둥이들이 있다는 걸 대공에게 알린 사람인데, 왜…… 나는 이런 기분을 가지는 거지?’
누가 봐도 우리에게 좋은 사람인데, 그녀가 아니었다면 쌍둥이들은 더 오래 학대를 당했을 텐데. 난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또 괜한 생각을 하는 느낌에 한 행동인데 멜로디아 신녀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아이샤는 날 보는 걸 참 좋아했는데, 변했구나.”
“아, 아니에요!”
“아니지?”
“네! 저는 멜로디아 신녀님이 좋…… 편해요!”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좋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편하다는 말로 대충 둘러댔는데 그녀는 딱히 내 대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대공을 향해 있었다.
조금 묘했다. 멜로디아 신녀가 모두에게 다정하긴 했지만, 대공을 보는 눈동자는 조금 달랐다. 그 감정은 알 수 없었지만, 우리에게 주는 인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게 불편했던 걸까, 대공은 그녀를 지나쳤다.
“그럼 우린 가도록 하지. 고아…… 아니, 아이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