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래도 난 괜찮아요. 물론 이 삶이 만족스럽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조금 평범했더라면, 내 아이는 별문제 없이 태어났겠죠. 평범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면서 예쁘게 자랐겠죠.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살았겠죠. 하지만 아이는 나를 만남으로써 인생이 불행해졌어요.”
“아…….”
“나 또한, 죽지 못하고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야만 했죠. 내 뜻대로 되는 것 하나 없이……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아이샤. 실상 허울 좋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대신녀가 되는 건 너의 미래를 저당 잡히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요.”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에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저도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 모르죠. 하지만, 우선은 괜찮아요.”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려 왔다. 하지만 나에게 선택권은 없다.
말로는 괜찮다 했지만, 방도가 없다. 내가 본 게 정말 우리의 미래라면.
‘아마도…… 미래가 맞을 거야.’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그건 나의 미래가, 이 몸의 주인인 아이샤의 미래가 확실한 것 같으니까.
그게 진실이라면, 그게 맞다면 내게 일어난 기이한 일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맨 처음 꾸었던 꿈부터 이곳에 와서 매번 꾸었던 이상한 일들.
‘지금은 대신녀가 무언가 일을 꾸민 거라 생각할 수 있어. 그녀의 손이 닿은 이후 갑작스레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미래의 일들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만나기 전에 꾸었던 꿈들은 아니야.’
그게 진실이라면, 그게 우리의 미래라면, 대신녀가 그랬던 것처럼 미래를 바꾸는 일은 그리 힘든 거라면…… 조금은 쉽게 가도 되지 않을까.
“할래요. 할 거예요. 그러니 도와주세요. 제가 꾸었던 그 일들이, 진짜 벌어지지 않게. 저만은 미래를 바꿀 수 있게.”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좋아요. 무엇이든 도와줄게요. 우선 대공녀의 몸을 회복하는 일부터…… 지금 당장 나가서 하도록 해요.”
난 무엇이든 하려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대신녀님.”
“네.”
“지금 말고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갑작스러운 내 말에 대신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꼭 당장 해야 하는 거예요? 급한 거……예요?”
“아이샤가 내 뒤를 이어 준다면, 하루라도 빠르게 나는 이 삶을 벗어날 수 있어요.”
“아…….”
“다음 대신녀가 나타나야만, 그자가 신의 뜻을 받을 준비가 끝나야만 나는 죽을 수 있거든요.”
그녀가 얼마나 힘들지 안다. 그래서 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 당장 움직인다면 저쪽에서 알게 될 거예요.”
“알면 문제가 있을까요?”
“지금은…… 다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지금 밝혀져 봐야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당장 모든 걸 밝힐 수는 없다. 라리가 아픈 걸 낫게 해준다고 해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까. 보다 빠르게 보다 완벽하게 대공비를 무너뜨리려면 그녀가 얼마나 쌍둥이들을 괴롭혀 왔는지를 찾아야 한다.
그렇기에 아주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증거들을 찾아야 하니까.
“죄송해요…….”
“아니에요. 나중에라도 이유를 말해 주겠어요? 그래야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요.”
“네! 그리고 죄송하지만…… 당분간 이 일은 우리들끼리 비밀로 해주세요.”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순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 또한 아이샤가 받아들이기 갑작스러운 일일 테니, 비밀로 하도록 하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래야만 할 거다. 증거는, 곧 만들어 낼 거니까. 아이들이 크기 전에 대공비를 내보내야 할 거니까.
‘우선은 증거들을 찾아야겠지. 대공비가 라리에게 하는 짓들을…… 그리고 그 사람을 찾아낼 거야. 그 사람이 미치기 전에, 제대로 증언해 주고 아이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게 할 거야.’
대신녀가 내 편이 되었다는 걸 몰라야, 그들은 평소대로 행동할 거야.
“알았어요. 아이샤. 그런데 대공녀의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고 느껴져서요. 빠른 시일 안에 돌아와야 할 것 같아요.”
“많이 심각한가요?”
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생겼다. 내게 떠오른 그 이야기가 실제의 이야기인 것도 알겠고, 내가 신의 힘을 얻어 과거로 돌아온 것까지도 잘 알겠는데…….
왜 자꾸 소설 속 이야기가 사라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분명 첫 시작은 소설 속 이야기였는데. 나도, 쌍둥이도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소설 속 등장인물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 건데.’
그렇다면 소설 이야기가 계속 떠올라야만 하는 건데.
‘마치 누군가가 내게 경고를 하듯 소설을 떠오르게 해놓고, 이제 와 그 기억을 빼앗아 간 기분이야.’
이제는 내가 정말 한국에 살았던 사람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 그래서 라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분명 마지막으로 떠올린 기억 속에서 라리는…… 크게 아프긴 하는데…….
그러는 사이 대신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자세히 보지 않아서 이렇다 저렇다 말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아.”
“아이샤, 신은 자신의 힘을 나눠 준 아이에게, 자신을 모실 대신녀가 될 사람에게 가끔은 신탁이나 다른 게 아닌 이상한 감을 주곤 해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을. 아이샤도 느꼈죠?”
그러고 보니 대신녀를 볼 때 유난스럽게 걱정이 안 들었다는 점, 대공비를 보았을 때나 쌍둥이들의 시녀들을 봤을 때 느꼈던 불편감, 그런 걸 이야기하는 건가.
“아아…….”
“그것들이 아이샤가 사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신은 우리가 무사히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길 원하거든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네. 그럴게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요. 때가 되면 이야기해요. 내가 그대의 대모가 되어 줄 테니까.”
“네.”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내 대신녀의 품에 기대어 있었던 건지 다리에 살짝 쥐가 났다. 다리를 절뚝이려던 찰나, 신기하게 다리에 피가 싹 도는 느낌이 들면서 통증이 사라졌다.
“어……라……?”
“통증이 사라졌나요?”
“신기해요!”
“아마도 이런 일은 계속 있을 거예요. 다쳐도, 위험한 걸 먹어도 말이죠. 그게…… 드러나진 않아도 아이샤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라리와 같은 독약을 먹고 흡수해도 크게 아프지 않은 게 그 탓인가.
“저…… 대신녀님. 혹시 제가 물어볼 게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원래 신전으로 오는 게 제일 좋지만, 믿을 만한 자를 곁에 붙여 줄게요. 며칠 후에 대공가로 들어갈 거예요.”
“아…… 네!”
그때였다.
“뭐 하느라 안 나오는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굳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정체를 금방 파악했다.
“로헨!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면 안 돼!”
“시간이 딱 잘 맞았네요. 대공. 아이샤와 이야기가 막 끝난 참이에요.”
“그렇습니까.”
잠든 라리를 품에 안고, 이곳으로 뛰어 들어온 로헨을 잡으러 같이 뛰어 들어왔던 대공이 급히 얼굴을 풀어 냈다.
“송구합니다. 대신녀님. 다 끝났다 해도 이렇게 예의 없는 일을…….”
“보기 좋은걸요. 대공 어릴 때와 꼭 닮았으니까요.”
“제 어릴 때라니요. 그, 그런……!”
씩씩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로헨을 바라보던 대공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이러니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언제 저리도 천방지축처럼 굴었다고…….”
“이럴 때는 대공도 사람 같군요. 예전에는 어떤 말을 해도 호응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사람 같습니다.”
“역시 저를 놀리는 건 여전하십니다. 대신녀님.”
그리고 로헨은 내게 다가와 손을 불쑥 잡았다.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아.”
“어?”
조금은 어른 같으면서도 아이 같은 로헨은 볼을 잔뜩 부풀었다.
“걱정했잖아. 아빠는 자꾸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하고, 그런데 넌 나올 생각도 안 하고. 무슨 일 있나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명백하게 아빠라고 지칭하는 말에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걱정했어?”
“어. 아니, 뭐 내가 너 걱정한 줄 알아? 라리가…… 라리가 널 걱정해서 내가 걱정한 거라고.”
“라리 자는데?”
라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거든! 아까 일어났거든!”
“그래. 그보다 대공 전하와 친해졌나 봐.”
“친해지기는 무슨. 하여튼 마음에 뭐 하나 드는 게 없어. 자꾸 막기만 하고.”
말은 그리했지만, 로헨은 조금 변해 있었다. 대공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몰라서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빠라는 말이 기분 좋았던 건지 그는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물론 아까 대신녀가 한 말 때문에 귀는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대공녀는 아까부터 자는 것 같네요. 대공.”
“뭐…… 조금 잠이 많은 아이 같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신녀님, 제발 아니라고 해줘요. 아무리 잠이 많아도 저렇게 계속 자는 애는 없다고.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대신녀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뇨. 그렇게 계속 자는 아이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멍청한 대공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