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러면 그 후에 어떻게 되었어요?”
소설 한 권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너무나 뻔한 로판 속 이야기. 신의 도움으로 회귀를 한 주인공. 그리고 그 주인공은 당연스럽게 해피엔딩일 것이다.
자신이 겪은 불행한 일들은 모두 바꿔 버리고, 복수할 당사자들에겐 복수를 할 것이고, 분명 행복했겠지.
하지만 대신녀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든 걸 바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어요.”
“아…….”
[과거와 달리 남편은 죽지 않았어요. 뒤늦게 로렌은 알게 되죠. 아마도 과거에 남편이 일찍 죽은 건, 그의 자식들이 한 일이라는 것을요. 로렌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 막 태어난 어린아이에게 모든 재산을 넘길까 봐 자식들이 한 일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삶이 돌아오고 로렌이 먼저 도망쳐 버리자 자식들은 자신의 부친을 죽이는 대신, 문제가 될 로렌과 로렌의 아이를 죽이기로 해요. 가문에 있으면 두 사람을 죽이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는 사이 정신이 오락가락한 부친에게서 유언장을 받아 낼 생각을 하죠.]
설마 아니죠? 죽을 리 없죠? 그 말을 물어야만 했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말이든 해야 하는데, 소설에서처럼 무조건적인 해피엔딩이 아닐 것만 같아서 두려움이 몰려왔다.
[로렌이 향한 곳은 자신의 집이었어요. 요양을 왔다는 말로 가족들을 설득하고선 그곳에서 아이를 낳기로 하죠. 부친과 새어머니는 자신에게 참으로 모진 사람들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 키운 동생들은 아니었으니까. 그 동생들을 믿었죠.
그러는 사이 몇 번이나 자객들이 찾아왔죠. 하지만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무사히 아이를 낳았어요. 자객들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동생들을 알렸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의원까지 불러왔죠. 부친은 못마땅해했지만, 동생들은 그동안의 은혜를 갚으려는 것처럼 최선을 다했죠.]
다행이다. 그러면 아이는 무사한 걸까. 난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렇게, 그렇게 끝났더라면 행복했겠지만, 로렌의 삶은 구원받지 못했어요.
다행히 아이는 살아났어요. 제때 의원의 진료를 받았으니까요. 로렌은 그 순간만은 후회하지 않았어요. 신이 자신의 모든 걸 가져가도 아이만은 살렸으니까. 그걸로 되었다 했어요.
하지만, 마치 원래 죽는 사람들은 다시 죽는다는 걸 보여 주는 것처럼, 저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걸 보여 주는 것처럼 아이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죠.]
“네??”
너무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 내 반응을 느낀 건지 그녀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사라졌다는 게……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 아기잖아요……?”
“태어난 지 보름도 되지 않은 아기였어요.”
“그런데 어디 갔다는 거예요……?”
[로렌은 당연히 자신의 부친을 의심했죠. 울며불며 제발 아이를 돌려 달라고. 뭐든 할 테니까 아이만은 돌려 달라고. 하지만 부친은 범인이 아니었어요.
범인은…… 동생들이었죠. 자신의 모든 걸 바쳐 가며 키웠는데,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았음에도 그리 헌신적으로 돌봐 왔는데. 공부도, 치장하는 것도 모두 그녀가 벌어 왔던 돈과 결혼으로 인해 얻은 돈으로 해준 것인데…… 그들은 거기서 욕심을 끝내지 않았죠.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의 부친인 남편이 죽지 않았고, 딸임에도 남편은 아이에게 모든 걸 준다는 말을 해버렸던지라…… 남편의 자식들이 아이를 처단하기로 한 거죠. 그리고 동생들은 돈에 눈이 멀어 제 아이를 그들에게 넘겨 버렸습니다.]
아. 아. 순간 눈물이 찔끔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이를 살리기 위해 돌아왔는데, 아이를 살리기는커녕 가족들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아이는…… 아이는 찾은 거죠……?”
[찾지…… 못했어요. 시체조차. 그저 죽였다고 하더군요. 시체라도 달라고 했지만…… 결국 볼 수 없었어요.]
“대신녀님…… 괜찮으신 거예요?”
내 물음에 그녀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 질문은…….”
“대신녀님의 이야기이시죠……?”
“아이샤는 참 똑똑한 아이예요.”
“괜찮……으신 거예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자들이 존재하는 게 화가 날 정도였다. 가족이라는 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들이 너무 미웠어요. 내 아이를 죽인 남편의 자식들보다 가족이라는 자들이 너무 미웠죠. 나는 이용만 당하기 위한 존재인가. 그래서 신께 다시 바랐죠.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어떤 일이든 할 테니까, 제발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녀의 슬픔이 이다지도 무겁지 않았을 테니까.
“슬프게도 기회는 한 번뿐이었죠. 오히려 이제 때가 왔다며, 시간을 되돌려준 대가를 받아 간다 하더라구요. 그때의 나는…… 그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어요. 아이를 구하지 못한 그 지독한 절망감은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신의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그것 때문에…….”
“그러면…….”
“죽지 못했어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몸. 그리고 신은 기회를 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나를 대신녀로 만들었답니다. 전대 대신녀의 뒤를 이어 신녀가 되게, 그 힘을 주었죠.”
“아.”
왜 그녀가 이 이야기를 했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 것만 같다.
“설마…… 신이 그런 기회를 준 자는…….”
“신의 사도가 되어야만 하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되게 만들더군요.”
“아…….”
“그래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신 거예요? 저도 결국…….”
“꿈이라고 치부한 그 일은 일어난 일이고, 아이샤는 그곳에서 바란 거예요. 난 아이샤가 무엇을 바랐는지 몰라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것 때문에 아이샤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죠.”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그럼 나는…… 한국에서 살던 사람이 소설 속에 들어왔고, 이미 한 번 소설 속에서 결말을 본 후 다시 시간을 회귀했다는 건가. 빙의와 회귀라는 건가.
“아…….”
“당장은 아니에요. 대신녀가 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그래서 아이샤는 나 같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해 준 거예요. 시간을 돌아왔다고, 미래를 안다고 해서 미래를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네…….”
“그러니 내가 도와줄게요. 나에겐 아무도 없었지만, 아이샤는 나 같은 일을 겪지 않게. 결국 우린 신의 사도가 되어 계속해서 이용당하겠지만…… 그래도 나같이 후회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그래서였구나. 나를 그리도 안쓰럽게 쳐다본 건. 자신도 겪은 일을 나도 겪은 거니까…….
그제야, 그제야 그 꿈같던 일이 진실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이후로 죽지 못하고 백 년 넘게 살아 있어요. 몸은 노화되었기에 앞이 보이지 않고, 걸을 수 없어요. 아이샤도…… 대신녀가 되면 언제 사명이 끝날지 몰라요. 죽음조차 원할 때 할 수 없죠. 그럼에도…… 우리에겐 방법이 없어요.”
“……저는…….”
나는…… 어떨까. 나는 만약에 그러면.
“그래도…… 괜찮을 거 같단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신은…… 그런 마음을 가진 우리를 선택한 걸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그렇기에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아이샤가.”
“저는 괜찮아요! 로헨과 라리가 행복할 수 있다면.”
대신녀는 아까보다 훨씬 더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그러면 나도 도와줄게요. 아이샤가 나 같은 일을 겪지 않게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저도…… 대신녀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할게요. 제가 꼭…… 쌍둥이들을 지킬 수 있게.”
“좋아요. 그리고 아이샤. 신은 가끔씩 변덕을 부려요. 내게도…… 아주 나중에 이야기 하나를 전해 줬어요.”
“이야기요?”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걸요.”
순간 입을 떡벌리고선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이가 죽지 않았다니. 이건……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정말……요?”
“네. 아이가 그렇게 된 이후, 남편의 자식들은 무사히 유산을 물려받았고, 남편도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을 떠났죠. 저는 가족들이 지긋지긋해서 미친 사람처럼 살다가 정신 차리고 신전에 들어와 대신녀가 되었고, 40년쯤 지났을 때 신이 말해 주었어요. 아이는 살아 있다고.”
“아니, 그걸 왜 그때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니까요. 이미 그때의 나는 시력을 잃은 상태였고, 거동이 힘들었죠. 다른 이의 도움이 없으면 이동이 힘든 상태였는데…… 그런 내가 아이를 찾으러 갈 수는 없었죠. 그저 삶이 힘들었고, 아주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도, 할 수도 없었죠.”
비겁한 신이다. 나도 모르게 화가 몰려온다.
“그러면…… 그분의 자식은…….”
“그 후로 아무것도 알 수 없었어요. 누군지도, 어떻게 생긴지도 알 수 없으니까.”
“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