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마치 내가 길고 긴 꿈을 꿔야 한다는 것처럼, 그녀는 명백한 의도를 담아 내게 물어 왔다.
“아…….”
“내겐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꿈을 꾼 건 어떻게 아세요?”
“그건 꿈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나 또한 그랬으니까.”
두건으로 눈을 가렸음에도 그녀가 웃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신녀님도 그랬다는 건…….”
“그곳에서 무엇을 봤나요?”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이야기요. 아주 멀고 먼…… 훗날의 이야기요. 되게 말도 안 되죠…….”
내가 말하면서도 참 현실감이 없었다. 꿈에서 미래를 봤다는 게,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감이 있었어. 또, 그렇다 해서 소설 속 이야기는 아니야.’
소설 속에서 흑막들은, 쌍둥이들은 죽었다고만 나오니까. 그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고, 대공가가 몰락했다는 것. 그것이 소설에서 나오는 그들의 마지막 행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둘 중에 하나였다.
내 상상 속 이야기거나, 진짜 벌어진 일이거나.
“말이 안 될 건 없답니다. 세상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이 벌어지곤 하니까요.”
“……아…… 대신녀님은 무엇을 보셨어요?”
“글쎄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죠.”
아까보다 더 슬퍼 보이는 그녀는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을 끌어 올려 날 보며 웃었다. 정말 억지로 웃는 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신녀님…… 그게 정말 꿈이 아닌 걸까요? 저는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없고…… 겪을 수조차 없어요.”
그건 현재의 일이 아니니까. 그건, 그건…….
“겪은 일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제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모르시잖아요. 대신녀님도 겪으신 게 아니라면…… 아.”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변했다. 눈을 가렸으나 온전히 감정이 보이는 사람. 내 부정적인 말에 그녀는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나도 너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아이샤는, 가끔 꿈을 꾸지 않았나요? 지금의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시간의 꿈을.”
“……가끔…… 꿨어요.”
보육원에 있을 때는 한 번도 꾸지 않았던 꿈을, 우리가 대공가로 옮기고 난 뒤부터 꾸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상상 속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그 꿈은…… 이상하리만큼 이어지지 않았나요?”
이해하지 못하는 날 위해 설명을 해주려는 것인 듯, 그녀는 내 머리를 보드랍게 쓸었다.
“……아…….”
“마치 다른 시간의 나를 보여 주는 것처럼…… 그런 꿈을 꿨을 거예요.”
“……그랬어요.”
“그리고 그 꿈 안에서…… 혹시 아이샤는 바라지 않았나요?”
엄마의 손길처럼 다정한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상하게 잠이 올 것같이 따스하고 다정한 손길.
“어떤 걸요……?”
“신을 원망하거나, 신께 간절히 바라지 않았나요?”
“어떻게 그걸 아세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내가 그 꿈에서…… 어른이 된 내가 간절히 바랐다는 걸. 대공가의 쌍둥이들이 상처받지 않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기를.
내가 그걸 바라 왔다는 걸.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 원래라면 이 이야기는 아주 나중에 해줄 이야기였답니다.”
“아…….”
“원래라면, 아이샤에게 확답을 듣고 했어야 하는 이야기예요.”
“확답이요?”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신녀가 될 것을요.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힘을 가진 자로서 다음 대 대신녀 후보로 신전에 들어와 교육받을 것을 확답받고 말이죠. 하지만…… 내가 이걸 말한다 해도…… 아마도 아이샤는 내 손을 잡게 될 거 같네요. 끔찍한 미래가 기다려도.”
“제가요……?”
“아이샤에게는 지켜야 할 존재가 있고, 내가 그 존재를 낫게 해줄 수 있으니까요. 내가 아이샤의 든든한 뒷배경이 돼줄 수 있을 거 같거든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뭔가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그녀에게 어떤 말도 쉽게하면 안 될 듯한 기분이었다.
“굳이 듣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내게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아이샤가 좋아하는 공자와 공녀 이야기도 있죠. 하지만 아직 뒷배가 없는 두 아이와 아이샤에게는 뒤를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내가 그걸 해줄게요.”
“대신녀님…….”
“대모가 되어 준다는 이야기예요. 공녀의 몸은 내가 건강하게 해줄게요. 그게 아니어도 나라면 도움이 될 거 같네요. 사실상…… 어린 아이샤에게 이런 걸로 거래를 하자고 하는 이 상황이 기분 좋진 않지만…… 내가 아이샤를 필요로 해요.”
“저를…….”
기분이 너무나 묘했다. 대신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그 말이,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들었으니까.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러면 나는 조건을 제시했어요. 그리고 내 이야기를 해줄게요. 내가 왜 아이샤를 곁에 두려고 하는 건지.”
할머니가 이야기를 해주는 것처럼. 나한테 편히 기대라는듯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툭툭 쳤다.
“긴 이야기가 될 거 같네요.”
난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기대었다. 참 이상하게 대신녀는 마음의 안정을 주는 사람이었다. 이래도 될 거 같다는 그런 마음을 주는 사람.
그래서 난 그녀에게 기댄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신은…… 가끔씩 변덕스러운 일을 하곤 해요.”
“신……이라.”
“인간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신경도 쓰지 않는 신이, 아주 가끔씩 인간의 말에 호응해 줄 때가 있어요. 신의 지독한 변덕이죠.”
“아…….”
그녀의 손이 아까보다 빠르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 누군가는 그걸 신의 축복이라고도 하고, 어느 누군가는 신의 저주라고도 하죠.”
“우움…….”
“나는 그걸 저주라고 부르고 싶어요.”
“저주요? 신이 인간의 말에 호응해 주는데요?”
그녀는 내 물음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의 말을 들어주는 신은 없어요. 언제나 베푼 만큼 받죠.”
“신은 그러면 무엇을 받아요?”
“인간의…… 모든 것이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아이의 머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들은 대부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엔 그녀도 조금 말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난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대신녀가 입을 열었다.
“인간이 신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요. 시간, 신앙심 등등…… 그런 것들을 가져가요.”
“아…….”
“아주 먼 옛날, 신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한 소녀의…… 이야기를 들을래요?”
“네!”
그러고 나자 그녀는 이야기를 하나 시작했다.
[한미한 남작 가문의 로렌이라는 영애가 있었습니다. 로렌에게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죠.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들을 로렌은 살뜰히 챙겼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로렌의 부친은 무능함의 끝인 사람인지라 집에는 돈 한 푼 가져오지 않았고, 도박을 즐겨했기 때문이에요.
세 아이들을 돌봐 줄 어른은 없었죠. 로렌의 모친은 로렌이 어린 시절 집을 나갔거든요. 남편의 바람기를 못 이겨서 나간 거였고, 두 동생들의 모친은 로렌의 부친보다 사치에 찌든 사람이었거든요.
거기에 자신이 아닌 전 부인이 낳은 로렌을 참 미워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로렌은 어른이 되었고, 그러는 사이 로렌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죠.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어요.
하지만 로렌의 부친은 혼기가 찬 딸을 비싼 값에 팔아넘겼고, 그녀는 늙은 귀족의 후첩이 되어야만 했죠. 그래도 잘 적응하고 살려고 했지만, 로렌의 부친은 늙은 귀족의 아이를 가진 로렌에게서 돈을 계속 요구했고, 그러는 사이…… 로렌의 늙은 남편은 세상을 떠났죠.
그에게는 성인이 된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젊은 새어머니인 로렌을 지독하리만큼 싫어했고, 로렌이 낳은 아이에게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길까 봐 그녀를 내쫓아 버렸죠. 막 태어난 아이를,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아픈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를 메몰차게요. 아이만은 살려 달라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고…… 그녀는 이번에도 돈을 뜯으러 온 부친을 만나요.
그 부친에게 아이만은 살려 달라 했지만 이제 돈을 못 가져오는 로렌을 부친은 매몰차게 거부하죠. 결국 아이는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었고…… 로렌은…… 빌어요. 아이만은 살려 달라고. 아이만은…… 행복하게 해달라고. 아이가 죄가 있다면 자신을 만난 죄밖에 없다고. 그렇게 바라고 바랐죠.
그리고 신은 응답했어요.
너의 모든 삶을 내가 가져가는 대신, 너의 어린 시절의 시간을 돌려주겠노라…… 하고 말이죠.
하지만 어느 시절로 갈지에 대해서는 결정하지 못했어요.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가 도망가야 하나, 아니면 결혼하기 전으로 가야 하나. 하지만 로렌은…… 자신이 아이를 가진 그 시절로 돌아가요. 아이를 살리고 싶었으니까요.
대신 이번에는 아이를 낳기 전 일찌감치 그 가문에서 나와요. 아이를 살리고 싶었으니까. 이번에도 남편은 일찍 죽을 테고, 남편의 자식들은 자신을 내쫓을 걸 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