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51)화 (51/99)

-51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면, 내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놀라지도 않을 정도였다. 도리어 다른 기쁨을 안겨 줄 정도였다.

그들을 도와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신성력을 가지고 있으면 더 이상 힘든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대공이 내쫓아도 보육원으로 가지 않아도 되고, 신전에서도 극진한 대접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조금도 들지 않을 정도다.

“소중한 친구인가요?”

“네. 너무나 소중한 친구예요. 하지만 그 친구를 낫게 하려면…… 방법이 없어요. 그냥 두면 영원히 잠들 거 같아요.”

설령 영원히 잠들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 하나 가지지 못하게 될 거예요. 누군가에게 휘둘리게 될 거고. 건강을 빌미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원치 않아요.

“참 좋아하는 친구인가 보네요.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네. 많이 좋아해요.”

“대공녀를 말하는 거죠?”

“어떻게…….”

“다 보이는 법이죠.”

무언가 정말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대신녀 앞에 있으니 무언가 다 관통당한 기분이다.

‘하지만 방법을 써야 해.’

어떻게서든 증거를 찾아낼 거다. 대신녀를 통해서든 다른 방법을 통해서든. 대공비가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이의 도움을 받아서 라리가 아픈 이유가 단순한 이유가 아님을 밝혀낼 거다.

그러려면 우선 건강을 회복하는 게 우선일 테지. 라리의 건강이 회복되면 분명 다시금 라리를 흔들 무언갈 만들어 낼 거다. 어설프게라도. 그러면 증거가 생길 게 분명하다.

‘그걸로 그녀를 흔들어 버릴 거야.’

라리의 건강 회복과는 별개의 문제.

소설 속에서 라리는 심하게 아팠으니까.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없는 사이 라리는 너무 대공비를 믿었고, 소설 속보다 더 많은 양의 독을 섭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큰일 날지도 몰라.’

그때는 그래도 살아났지만 이번엔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소설 속에서 라리는 대공가의 핏줄로 짐승의 핏줄을 타고났음에도 몸이 좋지 않았다.

다 자란 후에도 자주 피를 토하거나 쓰러지곤 했지. 유난스럽게 새하얀 얼굴이 지옥에서 온 파멸의 흡혈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약했지.

‘결국 그 일 때문에 라리는 어떻게 되었더라.’

이상하다. 소설 속 결말이 서서히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소설 속에 동화가 돼서일까. 분명…… 라리의 결말이 있었는데…… 죽었었나……?’

소설 속에서 결국 황태자에게 죽기 전에…… 두 사람이 그런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기 전에 어디까지 아팠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아냐. 확실히 라리가 죽은 건 황태자 때문이다.

“아…….”

“왜 그러죠, 아이샤?”

내 볼을 손으로 쓸고 있는 대신녀의 손에서 이상한 힘이 흘러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머리가 아득해지면서 눈앞이 깜깜해진다.

“갑자기…… 어지러워요…….”

“괜찮아요. 나에게 조금 기대어요.”

대신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나를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한숨 자도 돼요.”

“대신녀님…… 저는…… 왜 갑자기…….”

“조금은 신의 도움을 받으세요. 자신 스스로 꽁꽁 묶어 놓았던 일들을 떠올리기 위해. 그러고 나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 보일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 걸까. 내가 뭘 숨기고 있다는 걸까.

하지만 더 물을 수는 없었다.

아득히 로헨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니까.

그렇게 난 꿈이면서 꿈이 아닌 것 같은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상은 어두워졌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커다란 홀. 사람이 말을 할 때마다 공기가 울리는 이곳. 그 안에는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난 그 세 사람을 알면서도 몰랐다.

그림으로 그려진 이들의 얼굴은 봤지만,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들은 이곳, 내가 살아 있는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인 황태자와 흑막이라 불리는 라리즈, 로헨이었다. 단지 어린 시절이 아니라 다 큰 상태의 모습.

소설 표지와 삽화로만 봐온 그들의 모습은 알은체하지 않으려 해도 단번에 알아차려졌다.

‘아…… 안 돼…….’

그리고 눈앞에 보인 풍경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만개한 꽃처럼 흐트러진 흑발, 새하얗게 질린 얼굴, 볼을 타고 내리는 붉은 선혈. 가슴에 꽂힌 검. 이미 생명의 불은 꺼져 가는 듯 눈조차 뜨지 못한 여인.

그 여인은 라리였다. 어른이 된, 악녀라고 불리던 라리의 모습.

그리고 로헨은 그런 라리를 품에 껴안고, 서 있는 남자를 원망스레 바라봤다. 그 남자가 바로 두 사람에게서 여주를 앗아 갔던 남주였다.

‘다 그만두었다.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나는 다 끝냈다. 그런데 왜 너는 끝내지 않는 거지? 왜 이제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내 동생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어야 하는 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 변할지 모르는 너희들이니까. 언제든 목덜미를 물릴지 모르는 짐승을 미리 처단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 않나.’

고압적인 태도의 황태자의 모습. 그들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라리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은 건 황태자고, 이미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 로헨은 다 그만두었다는 것을.

그렇기에 로헨은 슬픔을 담아 원망을 담아 그를 올려다봤다.

‘안 한다 했다. 그런데…… 그런데…… 내 동생을…… 내 동생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다니!! 나는…… 네가 밉다. 저주스럽다.’

‘그렇기에 죽인 거다. 너희들은 너무 위험해.’

절규했다. 로헨은 제 동생을 보며 울부짖었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마치 피눈물 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서글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악마가 되어 버린 듯, 로헨의 몸에서는 엄청나게 서슬퍼런 감정이 삐죽삐죽 뛰쳐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은 우리를 죽일 수 있지. 고작 위험하다고……?’

‘몇 번이고 다시 할 것이다. 지금도 그 악마 같은 계집의 가슴에 칼을 한 번만 꽂아 넣은 걸 후회한다. 혹여라도 살아날지 모르니, 후회가 될 정도다.’

차게 식어 버린 라리에게 황태자는 감정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하…… 하…….’

‘오빠…….’

라리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삶의 마지막 숨결인지, 라리는 손을 들어 올려 로헨을 찾았다.

‘여기…… 있지…… 여기…….’

그 애달픈 목소리에 로헨은 제 동생의 손을 잡았다.

‘응…… 오빠 여기 있어.’

‘응…… 나 무서워…… 어디 가지 마…….’

‘어디…… 안 갈게. 라리. 라리…… 다시 너를 살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나는 무엇이든 할 것이야. 너에게 온전한 삶도 주지 못한 내가…… 너의 마지막 길은 외롭지 않게 해주마. 그러니, 그러니…… 다음 생은 아프지 않게, 힘들지 않게…… 그리해 줄게. 내 유일한 가족.’

악마라 불리던, 인간이 아니라고 하던, 대공이 되어 버린 직후 감정을 잃은 듯 무표정했던 로헨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는 제 동생의 가슴에 박힌 검을 빼내었다. 그리고 그 검을 자신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아니 악마가 있다면 저들에게 온전한 죽음을 달라고. 자신과 동생은 그저 사랑한 것밖에 죄가 없는데,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것뿐인데 그런 자신들을 죽게 만든 저들에게 죽음을 내려 달라고.

그걸 보며 황태자는 몸을 돌렸다.

‘이제야 모든 게 순리대로 돌아가겠구나. 스스로 죽어 주다니 감사할 뿐이야.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아도 돼서.’

혀를 끌차던 황태자는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로헨의 몸은 옆으로 스러졌다. 그 와중에도 그는 제 동생의 손을 놓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였다.

세상을 보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본 이였다.

아플 때도 힘들 때도 배가 고파 쓰러질 때도, 그 모든 순간 함께했던 유일한 자신의 편이었다.

‘미안해…… 라리. 너만은…… 너만은…….’

그때였다.

오로지 두 사람뿐인 곳에 누군가 뛰어왔다.

‘아아, 안 돼…… 아가씨…… 도련님……!’

그 사람의 모습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는 사람. 지금 이 상황도 적혀 있지 않지만, 뛰쳐 들어온 존재는 아예 소설엔 나오지 않는다.

나왔더라면, 내가 몰랐을 리 없을 테니까.

알았더라면…… 알았더라면.

‘아이샤.’

검은 머리칼, 분홍빛의 눈동자. 꿈에서 몇 번이나 봤던 내 모습이…… 바로 이곳에 있다.

저들 곁에 있다. 그리고 이미 내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듯 로헨은 겨우겨우 고개를 돌렸다.

‘……도망가거라. 이곳에 있으면 너도 말릴 것이다. 모든 이들이 다 죽게 될 거야. 너는…… 살거라.’

그러는 사이 아이샤는, 어른인 나는 로헨과 라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제 탓이에요…… 제가…… 제가 다 말해서, 그래서 그래요…….’

‘유일하구나. 우리 곁에 끝까지 있어 준 사람…… 그리고 알고 있었다. 네가 어쩔 수 없는 협박을 받았기에 우리 옆에 있었다는 걸. 라리가 좋아했기에 내칠 수 없어서 그저 곁에 두었는데…….’

로헨은 피식 웃으며 제 동생을 바라봤다.

‘너뿐이구나. 우리를 위해 울어 주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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