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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50)화 (50/99)

-50화-

대공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대신녀를 보다가 나를 바라봤다.

“어쩔 수 없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어왔지만…… 내가 너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아.”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버티던 게 아니었어? 전혀 예상을 벗어난 이야기에 난 눈만 깜빡였다.

“대신녀님이 별다른 일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있어. 혹여나 네게 부당한 행동을 하신다면 나중에 말하거라.”

“블레어 대공. 나는 누군가를 해치지 않아요.”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니까요.”

“그대가 그리도 걱정하는 아이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군요. 자신의 혈족에게조차 친절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뭐. 이 아이가 조금 필요해서 말이죠.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제 자식들도 있는데…… 그리 어린아이 다루듯 말하지 말아 주십쇼. 대신녀님.”

“여전히 내게 아이로 보이는걸요. 블레어 대공.”

그녀는 입가를 가리며 싱긋 웃었다. 그제야 대공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는 들어왔던 문을 통해 다시 나가려 했다. 물론 로헨이 그걸 막았다.

“쟤, 아니 아이샤 혼자 두고 나간다고? 안 돼.”

“나오거라. 걱정할 거 없어.”

“그래도. 절대 못 나가.”

로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로헨.”

“안 나간다고.”

“말 들어야지.”

“혼자 두고 절대 안 나가. 아빠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아이샤를 혼자 두진 않을 거야.”

이를 아득아득 갈던 로헨은 대공을 잔뜩 노려봤다.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로헨의 모습 때문에 울컥 짜증을 내보이려던 대공이 피식 웃었다

“역시 답은 아이샤인가.”

“뭐가 아이샤야.”

이번에도 자신이 아빠라는 말을 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로헨은 성질을 드러냈다.

“네가 아이샤를 아끼는 마음은 다 알겠다. 하지만 여기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대신녀님은 어차피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니. 아이샤에게 위험이 될 건 없다.”

순간 로헨과 내 시선이 대신녀에게로 향했다.

“사실이랍니다. 보기보단 나이를 많이 먹어서 거동이 온전치 않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공자.”

그럼에도 로헨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실제로 새하얀 신복 너머로 살짝 살짝 보이는 그녀의 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가늘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해 다리의 살이 모두 빠져 버린 것처럼. 거기에 눈까지 가려져 있었다. 절대 위협이 될 수 없는 사람.

“그러면, 그러면 당신은 아이샤 옆에 있으려고 했던 건데. 보호니 뭐니 그런 말들은…….”

“말 그대로의 뜻이었다. 대신녀님은 직설적인 분인 데다가 말씀하시는 데에 거리낌이 없으시지. 그래서 혹여나 그런 말을 듣고 아이샤가 상…….”

“상?”

“아니다. 어쨌든 알았으면 나가도록 하지. 대신녀님의 시간을 더 방해해선 안 되니.”

로헨이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 준 것에 대해 꽤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대공은 몸을 수그려 로헨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내가 지켜 준다 했단 말이야. 아이샤는!”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주어도 돼. 아이샤는 그리 약한 아이가 아니니까.”

“약해. 약하다고.”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로헨은 나와 떨어지면 안 될 것처럼 유난스럽게 굴었다.

“로헨.”

“쟤는 바보 같아서 저 아픈 것도 이야기 안 한단 말이야. 그러다가……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아.”

그제야 로헨이 왜 그렇게까지 나에 대해 집착하는 건지 알아 버렸다.

“괜찮아, 로헨. 오늘은 엄청 멀쩡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소리 지를게. 그럼 로헨이 뛰쳐들어와 줘. 로헨은 누구보다 뛰어나잖아.”

내가 말리고 나서야 로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로헨을 말릴 수 있는 건 너 하나뿐이구나.”

“로헨이 착해서 그래요.” 

너무나 착하고, 너무나 마음이 여려서, 혹시나 자신의 곁에 있는 누군가가 다치거나 아프지 않길 바라는 것뿐. 그렇기에 난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 착해! 나갈래.”

그리고 방금 전까지 부득부득 안 나가겠다고 우기던 로헨은 그제야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저 마음이 그대로 갔으면 좋겠다. 아주 조금은 자신의 이득을 먼저 챙겼으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따뜻한 아이인데. 저렇게 순진한 아이인데.’

내 시선은 한참 동안이나 로헨에게로 향해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밖으로 나갔고, 문은 작은 틈을 남겨 둔 채 닫혔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끼리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요?”

싱긋 웃은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려 나를 향해 손짓했다.

“아…… 네.”

난 쫄래쫄래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레벨리아 대신녀.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 멀리서도 꽤 아름다운 외모라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에서 본 외양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눈을 가렸지만 오뚝한 콧날에 베일 듯한 턱. 핏줄이 보일 것 같은 투명한 피부까지.

“나는 레벨리아 대신녀예요. 아이샤라고 했나요?”

내게도 존대를 써주는 그녀의 목소리는 참으로 다정했다.

“네.”

“나는 말을 둘러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혹시 내가 이곳으로 아이샤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까요?”

단호한 그 목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참으로 배려심이 깊은 아이군요. 내가 보이지 않는 거 같아 말로 하는 거지요?”

“네.”

“그리 조심스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다른 게 보이거든요. 어찌 되었든 맨 처음 아이샤를 진료했던 신관에게서 이야기를 들어서 보자 한 거랍니다.”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를 움직이게 한 걸까.

“이야기요? 저한테 혹시 큰 문제가 있나요?”

“내가 누군가를 찾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아이샤는 내가 찾던 그 아이인 거 같아서 말이죠.”

“제가요?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평범한 아이일 뿐인데. 이곳이 소설 속임을 아는 사람일 뿐이지, 특별할 것 없는.

심지어 소설 속 내용이 너무나 한정적이라 레벨리아 대신녀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지도 못했다. 소설 속 여주와 레벨리아 대신녀는 접점도 없는 데다가, 황태자의 편이었던 여주는 어찌 된 영문인지 레벨리아 대신녀를 싫어했으니까.

“음…… 아이샤.”

“네.”

“아무것도 아닌 아이는 없어요. 저마다 생긴 게 다른 것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이샤에게는 아주 특별한 힘이 있어요.”

“네?”

그럴 리가. 소설 속에서 진작에 죽었을 그런 인물. 보육원에서 이미 죽었어야 할 운명을 바꿔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마 조금도 모르는 것 같군요. 그 힘은 아주 귀한 힘이에요. 원래라면 아이샤를 바로 신전에 데려오고 싶을 만큼 아주 특별한 힘이랍니다.”

그 말을 하는 레벨리아 대신녀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슬프……세요?”

“응?”

“그냥 슬퍼 보여서요.”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녀의 손이 내 쪽으로 향했다. 눈이 가려져 있음에도 내가 있는 곳을 단번에 알아차린 듯 그 손은 차분히 움직여졌다.

나는 그 손에 뺨을 가져다대었다. 너무나 그 손이 따뜻해서,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엄마의 품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어쨌든…… 이상한 건 스스로 그 힘을 봉인하고 있는 거예요. 아이샤.”

“봉인이요?”

“아이샤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신성력은 어떤 방식이건 간에 자신을 보호하려는 성질이 강해요. 뛰어난 회복력을 가진 신성력. 그 또한 자신을 지키려는 방도의 하나랍니다.”

내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조금 이상하긴 하다. 보통은 타고났다고 할 텐데, 그녀는 가지고 있다고 정확히 언급했다.

원래는 내 것이 아닌 걸 얻었다는 느낌으로 꺼낸 말이라고 느껴지는 건 나의 착각일까.

‘그보다 내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면…… 신성력은 남을 치유해 줄 수 있으니까…… 혹시 라리를 도울 수 있는 걸까? 아. 그래서 내가…… 라리와 같은 것들을 하는데도 라리처럼 아프지 않는 걸까?’

“저…… 대신녀님.”

“네.”

“그러면 저도 신성력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거예요? 아프지 않게…….”

“네. 하지만 지금은 신성력 자체가 봉인되어 있어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른 사람을 통하지 않고 도울 수만 있다면, 라리와 로헨을 도울 수만 있다면 나는,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해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답니다. 봉인은 스스로 깨야 해요.”

“아아…….”

“아이샤. 누군가를 도와야 하나요. 아프지 않게?”

그녀의 손가락이 내 볼을 차분히 쓸었다. 

“네…….”

“누군가를 돕는 건 힘든 일이랍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어요. 스스로 봉인을 깨고 훈련을 한다 해도 10년 이상은 걸릴 거예요.”

가슴에 부풀었던 희망이 풍선 터지는 것처럼 터져 버렸다.

“아아…… 그렇구나…….”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요. 아이샤.”

“정말요?”

“하지만 이유 없이 도와줄 순 없어요.”

“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저만 도와주실 수 있다면…… 전…… 전…….”

그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이상하게 그래야 할 것만 같다.

내 가슴속 어딘가에 있는 마음이, 그렇게 울부짖었다. 어떻게서든 두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어떻게서든 두 사람에게 다른 미래를 안겨 줘야 한다고.

대신녀의 손이 내 볼에 닿자 자꾸만 마음속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마치……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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