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새근새근 내 옆에서 자고 있는 라리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혈색은 좋아지고 있었다. 마치 독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것처럼.
하지만 그날 이후 변화는 없었다. 라리는 여전히 잠에 취해서 살고 있었다.
‘달라진 게 있긴 하지.’
라리가 입는 옷, 라리가 먹는 음식, 라리가 하는 모든 행동. 그것들을 따라 한 탓에 내 건강도 조금씩 나빠졌다. 잠이 많아졌고, 조금만 걸었음에도 피로해졌다.
차마 로헨에게조차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분명 걱정할 거 아니까.
‘완벽하게 라리와 같은 상태가 된 이후, 다시 반대로 하나씩 빼다 보면 뭐가 제일 문제인지 알겠지.’
아무도 우리 편이 되어 주지 않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알아내는 방법은 이런 것뿐이다.
대공에게 말해 봤자, 아무 증거가 없다면 지난번과 달라질 게 없을 테니까.
“벌써 일어났어?”
그때였다. 몸을 반쯤 세운 채 라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 로헨이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오늘따라 눈이 번쩍 떠졌어.”
“깨우지 그랬어.”
“뭘 또. 어차피 때 되면 알아서 일어날 텐데.”
로헨을 향해 싱긋 웃었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응? 그래?”
“어.”
“나 평상시에는 기분 안 좋아 보였어?”
“조금은……?”
“미안.”
급히 사과를 했다. 살면서 내내 좋은 경험이 없던 쌍둥이들이라 상대의 기분에 예민할 게 뻔한데, 내가 너무 감정에 충실히 살았나 보다.
“왜 미안해해?”
“그냥.”
“……미안하단 말 하지 마. 나한테고 다른 사람한테고. 주눅 들지도 마. 기분 나빠.”
로헨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누가 봐도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가며.
“기분 나빠?”
“어쨌든…… 그런 말 하지 마. 왜 네가 미안해해야 돼. 미안할 거 하나도 없는데.”
“알았어.”
난 억지로 웃으며 로헨을 바라봤다. 이곳에 온 이후 로헨은 이상하리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원래 대공가에 온 이후에는 계속 이런 건지. 과거의 로헨을 내가 알지 못했기에 조금 의아할 따름이었다.
‘라리가 아파서 예민해진 건가.’
“미안하다는 말 안 할게.”
“……미아…….”
그런 내 반응에 로헨은 깊은 한숨만 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응?”
“아니야. 미안하다고 안 했어.”
“……미안하다고 한 거야?”
“아니라고! 오늘 신전 간다며, 빨리 갔다 오자. 라리. 일어나. 나가야 하는 시간이야.”
로헨은 어색한 듯 라리를 흔들어 깨웠다.
“우우우…… 웅……?”
겨우 눈을 뜬 라리는 좌우를 살피다가 나를 껴안았다.
“언니야……!”
“응. 잘 잤어?”
“뽀뽀해 줘!”
해맑게 웃는 라리는 자신의 이마를 내게 들이밀었다. 고아원에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는 부쩍 더 아기같이 구는 거 같다. 뽀뽀라는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건지, 나는 라리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웅! 나 꿈에서 언니야 봤어.”
라리는 아기처럼 내 품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키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 탓에 라리의 머리는 자꾸만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결국 안 되겠는지 라리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나를 봤어?”
“응! 근데 언니야가 엄청 큰 어른이 되어 있었어!”
“그랬어?”
“웅웅! 나한테 아가씨라고 불렀어! 그래서 그러지 말라 했어야 했는데 언니야가 계속 계속 그랬어. 언니야는 나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돼? 나는 라리야! 언니야 예쁜 동생!”
라리의 머리를 보드랍게 어루만졌다.
“또, 무슨 꿈을 꿨어?”
“뽀뽀라는 말도 거기서 배웠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하는 거랬어. 하지만 거기서는 나한테 뽀뽀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딱 한 사람 빼고는.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알려 줬어.”
슬픈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또 기쁜 듯 웃는 라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리의 말이 내게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지만,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뾰로통하게 바라보는 로헨의 모습 때문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로헨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그냥…….”
“그냥?”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로헨은 우물거리다가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뭔가 우리가 이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싶다.
“뽀뽀하지 말까?”
“아니, 해!”
“응? 해?”
“어. 해. 그거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며. 그러니까 해. 아주 계속 계속 해도 돼!”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듯 보이던 로헨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제야 알았다. 로헨이 라리에게 샘을 내고 있다는 걸. 왜 나한테 이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샘이었다.
“그래도 라리랑 뽀뽀하는 일은 최대한 없게 할게.”
“어. 그래, 좋아.”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로헨은 라리와 뽀뽀하지 말라는 게 맞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힝…… 난 언니야랑 뽀뽀하고 싶은데.”
“안 돼.”
“치…… 오빠야는 욕심쟁이야!”
“응. 나 욕심쟁이야.”
왜 로헨이 욕심쟁이가 된 건지 두 사람의 대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난 그럼에도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는 사이 라리가 꾸물꾸물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래서 나 왜 깨운 고야?”
“응. 오늘 신전 가는 날이야. 아이샤 때문에.”
“아, 맞다! 맞아. 우리 처음으로 셋이서 외출하눈 날이야! 히히.”
라리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라리. 위험해.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 애가.”
“그래도 쪼아! 너무 쪼아. 언니야.”
“그래. 나도 좋아.”
그러는 사이 우리의 소란을 알아차린 건지 시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기계라도 된 듯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준비시키기 시작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나와 라리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물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나는 매번 시녀들이 입혀 주는 대로 입었다가, 라리와 옷을 바꿔 입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이 라리에게 해주는 모든 것들을 그리했더니 아주 매우 불만스럽게 나를 보기 일쑤였다.
“오늘도 바꿔 입으실 건가요.”
“오늘은 그냥 입을래요.”
“……언제까지 이렇게 하실 건가요.”
“문제 될 건 없잖아요? 라리와 옷 사이즈도 거의 같아서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는데.”
저들의 반응을 보며 알게 된 건, 확실히 그때 의원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는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내가 행동한 이후부터 라리의 증세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바뀌었다. 나빠지지 않는 상태.
물론 그 변화가 너무나 미약해서 대공에게 말할 수도 없었고, 이걸 증거로 밀어넣을 수도 없는 상태다. 하지만 시녀들이 저러는 거 보면, 아직 그들은 라리에 대해서 포기 못 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라리에게만은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보죠?”
“그럴 리가요.”
“그러면 그냥 준비해 줘요. 너무나 수상한 행동들을 보이면 대공 전하께 말해야 할 거 같으니까.”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나를 보며 이를 아득 갈던 시녀들은 다시금 준비를 시작했다.
“언니야 싫어하지 않았으면 해! 언니야는 나고, 나는 언니야야. 언니야한테 나쁜말 하지 마!”
내내 순종적이던 라리가 그렇게 말하자 시녀들은 황당한 듯 입을 어물거렸다.
“아, 아니. 아가씨. 저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저희에게 뭐라 한건…….”
하지만 라리는 눈을 작게 흘겼다. 내내 착하고 말 잘 듣던 라리가 그런 표정을 짓자 그녀들은 입을 어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야 아가씨다워 보인다. 난 라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라리 잘하고 있어.”
“응! 나는 언니야한테 나쁘게 하는 사람들은 절대 그냥 못 넘겨!”
환하게 웃는 라리의 모습을 보며 나도 함께 웃었다.
그렇게 다시금 준비는 시작되었다. 거추장스럽게 하는 게 싫다며 로헨은 언제나처럼 가볍게 입었고, 라리와 나는 한 세트처럼 맞춰 입은 채 우리는 마차로 향했다.
역시나 그곳에는 대공이 있었고, 우리는 그와 함께 마차에 올라타서는 신전으로 향했다.
***
대공가의 마차가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폴짝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익숙한 사람과 제일 먼저 마주했다.
“멜로디아 신녀님!!”
“아이샤. 세상에.”
멜로디아 신녀였다. 보육원에 있던 시절 마주했던 그녀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잘 지냈니? 못 본 사이 너무나 이뻐졌구나.”
“신녀님 덕분이에요.”
나를 좋아해 주었던 사람. 그리고 아이들에게 진심을 다했던 사람. 그렇기에 난 그녀의 옷자락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그러니? 나는 뭐 한 게 없는걸? 그보다 너를 이곳에서 볼 수 있을지 몰랐구나.”
“신녀님이 저를 보자고 하신 거 아니셔요?”
“응? 아니. 나는 그저 대공가에서 손님들이 온다 해서 마중을 나온 것뿐이란다.”
이건 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신전에서 왔던 사람이, 쓰러졌던 나를 진료하며 나에게 신전으로 오라 했을 때 멜로디아 신녀가 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오늘도 나와 있길래 당연히 그녀가 수를 쓴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요?”
“응. 그보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은 모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