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아. 일어났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만 깜빡이던 그때, 대공은 아주 평이한 목소리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갑작스럽게 나를 어디론가 던졌다.
“꺄악!”
다행히 등 뒤에 느껴진 건 폭신한 침대의 감촉이었다. 꽤 위에서 던진 건 아닌 듯, 생각보다 하강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금방 바닥에 닿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놀란 건 놀란 거다.
‘감정이 없는 거야, 뭐야!’
마음 같아서는 버럭 짜증 내고 싶었지만, 대공이 다른 이의 손도 아닌 본인 손으로 직접 나를 안고 왔다는 사실에 아주 쥐똥만큼 감동받았던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닥으로 안 던진 건 고맙긴 한데…….
얌전히 바닥으로 내려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한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무슨 짓?”
빽빽 소리 지르는 로헨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던져져서 한발 늦게 몸을 일으켜 세운 내게로 로헨이 달려왔다.
이럴 때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멍멍이 같다니까. 어찌나 귀여운지. 화내는 모습도 이제는 귀여울 정도다.
“내가 분명 얘 건드리지 말라 했지.”
“안 건드렸다. 네가 말해 보도록, 고아 소녀.”
“고아 소녀 아니고 아이샤야!”
“그래. 아이샤.”
로헨의 말에는 끔뻑 넘어가는 듯, 대공은 조금의 주저 없이 내 호칭을 바꿨다.
“모르겠어. 나는 그냥…….”
그냥 걷다가 잠든 것뿐인데, 대공님이 안아서 데려다주셨나 봐. 거기까지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로헨이 내 팔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때문에 팔목이 통증이 몰려왔다.
“아파아…….”
하지만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로헨은 씩씩거리기 바빴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빠든 뭐든…… 아이샤를 괴롭히는 건 다 가만 안 둬.”
야생 짐승처럼, 당장이라도 상대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것처럼 로헨은 날카롭기만 했다. 대공이 뿜어내던 그 기운보다 더 차갑고 위험한 기운이 방 안을 넘실넘실 채웠다.
“그거구나.”
대공은 그런 로헨의 모습보다는 다른 쪽에 더 신경을 쓰는 듯했다.
“뭐가 그건데. 계속 괴롭히겠다고?”
“아니. 네게 있어 답은 아이샤로구나.”
“뭐?”
“아이샤. 너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겠지?”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닌 로헨을 보던 그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언제나 겨울 같았던 대공의 얼굴에 조금은 꽃이 피어난 듯 표정이 좋았다.
“네.”
그리고 난 그가 말한 뜻이 뭔지 알아 버렸다.
로헨이 무의식적으로 뱉어 낸 아빠라는 말. 대공이 꽤 듣고 싶어하던 그 말이 나와 버린 것이다.
“또 수작 부리는 거야? 아이샤한테?”
“로헨.”
“왜.”
“너는 왜 그렇게까지 아이샤에게 집착하는 것이냐.”
“그건…….!”
무언가 말하려던 로헨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너의 모든 건 아이샤로구나.”
“아니거든. 뭐가 다 아이샤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래.”
대공은 쉽사리 호응했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왔다 해도 상관없는 것처럼. 로헨의 그 말이 꽤 마음에 드는 것처럼.
“이대로 가면 되겠구나. 고아…… 아니, 아이샤.”
“네. 다행이에요.”
“뭐가 다행인 건데. 무슨 말을 하는 건데.”
잔뜩 성질을 내고 있는 로헨의 손을 꼭 잡았다.
“대공비 마마한테 갔다 오다가 길을 잃어버렸거든. 거기서 대공 전하를 만났고, 나를 직접 안아서 데려다주신 거야.”
이번에도 로헨이 무 자르듯 말을 잘라 먹을까 봐 재빠르게 이야기를 했다.
“어……? 그런 거야?”
“어어.”
“그, 그럼 그 여자는 왜 안 데려다줬대, 너를! 아니, 얼마나 길을 헤매면…… 오다가 잠이 들어! 그렇게 건강하던 애가!”
본인이 잘못 짚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서인지 로헨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도 어찌나 귀여운지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러게 말이야. 대공 전하.”
“응?”
“다음부터 그런 사람들 있으면 얘기해도 돼요?”
내 말에 대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자신한테 왜 이야기하냐는 표정으로.
“그 사람들 때문에 대공 전하께서 하지 않아도 되는 걸음을 하신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
“네. 다음번엔 그 사람들 전부 다 말할게요.”
“필요한 의미로 나를 이용해 먹다니. 참 대단한 아이야. 어린아이라면 응당 나를 두려워할 텐데 그런 것도 없고.”
“칭찬으로 생각할게요.”
내가 사랑받거나 하는 아이는 아닌지라, 이런 수를 쓰지 않으면 나를 챙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야 운이 좋아서 대공을 만났다지만, 만에 하나 그를 못 만났으면 넓고 넓은 대공가에서 탈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그러면 다음에는 꼭 이야기할게요.”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혹여라도 네가 혼자 돌아다닐 때 도와주지 않는 이들에 대해 지적이라도 하라는 것이지? 그러지 않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뻔뻔하군. 뭐. 네 말이 틀린 건 아니니까.”
설마하는 마음에 뱉은 말인데, 생각보다 그는 쉽게 받아들였다.
‘역시나 로헨이 아빠라는 말을 해서인가. 정말 보상은 확실하네.’
이 정도라면, 자신이 한 말을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지키는 이라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다.
“네!”
“그럼 됐다. 가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대공은 밖으로 나갔다. 이전이었다면 잔뜩 노려봤을 로헨은 주눅이 들어서였을까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방 안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로헨은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뭐가?”
“아니. 저 남자가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그거 진작 말하지 그랬어.”
“말하려 했는데 네가 말 끊었어.”
“아니, 그래도 말은 해야지……!!”
어느 때는 감정이 없는 짐승처럼 무표정하다가, 또 어느 때에는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모습이 자꾸만 내 가슴 어딘가를 자극했다.
“부끄러워?”
“부, 부끄럽기는! 그냥 저 남자 앞에서 실수하고 싶지 않아.”
난 한쪽 소파에 고이 잠들어 있는 라리 옆으로 가서는 로헨과 눈을 마주쳤다.
“왜? 부친이잖아.”
“몰라. 그냥 실수하는 게 싫어. 나를 만만하게 볼까 봐…….”
“으음…….”
“저 시선도 마음에 들지 않아. 나를 다 아는 것처럼 바라보는 저 시선.”
저 시선이 너와 퍽 닮았다고, 너도 저런 눈으로 사람을 바라본다고. 그래서 둘은 정말 부자관계라고 그리 말하면…… 로헨이 기분 나빠하겠지.
“근데 너랑 똑같아.”
물론 내가 로헨의 눈치를 보는 인간은 아니었다.
“뭐?”
“정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마. 저 사람도 너만큼이나 표현하지 못하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결국 너희 때문에 세상을 떠나게 되니까.’
그때였다.
또 머릿속에 이상한 말들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어쩌다 한번 떠오른 말. 하지만 이제는 이상하리만큼 자주 말이 떠올랐다.
그날, 크게 아파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 이상한 꿈을 꾼 이후로는 자주다.
그래서 급히 머리를 감쌌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얼굴이 왜 갑자기 하얗게 질린 거야.”
로헨은 급히 내 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퍽 걱정스러운 얼굴과 퍽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괜찮아. 라리는 아까부터 자는 거야?”
“그래. 딱히 나아지지 않네. 진짜 문제 있는 거 같은데…… 아무도 관심 두질 않으니…….”
혀를 끌끌 찬 로헨은 나를 바라봤다. 정말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어떻게든 해보라는 표정으로.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게…….”
하지만 그런 문제들보다 아까 들려왔던 이상한 음성이 내 신경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대공이 아이들 때문에 죽는다.’
이건 정말 신이 내게 내리는 계시 같은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소설 속 이야기를 해주는 걸까.
어찌 되었든 대공이 죽는 건 맞다. 대공의 죽음. 너무나 건강했던 그는, 누구에게도 무예로는 절대 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했던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아이들이 전부 큰 후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죽음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니까.
소설 속에서도 분명 그리 끝났는데…….
‘나는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도대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말들은 뭐지.’
“하아…….”
“걱정하지 마.”
그때였다.
자꾸만 떠오르는 말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숨을 내뱉자 로헨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다 알아서 해?”
“우리는 여기서 헤어지는 일 따윈 없을 거야. 내가 그리 만들 거야.”
“어어. 알았어.”
“……날 못 믿는 눈치다?”
난 내 머리를 연신 쓰다듬는 로헨을 향해 환히 웃었다.
“아니. 믿어. 넌 한다면 하는 애잖아.”
“어. 어…… 뭐 그렇지?”
너의 첫 번째 성취감은 내가 될게. 언제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네가 처음으로 이룬 것. 그게 내가 되도록 할게.
“응. 기다릴게. 이제 쉬자.”
자신이 말해 놓고 연신 부끄러움이 몰려온 건지, 로헨은 인형처럼 움직여서는 라리의 옆에 앉았다.
우리 둘의 시선은 여전히 라리를 향했다. 문득문득 로헨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로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공비와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할 게 뻔한데.
그렇기에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나, 신전으로 가는 날이 왔다.
이상할 정도로 번쩍 떠진 눈. 마치 내 몸이 신전으로 가길 원하는 것처럼 참으로 가뿐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