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너 말이야.”
그때였다. 막 나가려던 나를 대공비가 멈춰 세웠다.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바로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선 그녀를 바라봤다.
“네!”
“내가 한 말들을 쌍둥이들에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왜요?”
“알아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만에 하나 네가 그걸 말한다면, 난 내 모든 권력을 써서 네가 온전한 모습으로 공작가에서 나가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협박.
이번엔 꽤 진심인 건지 그녀의 얼굴이 분노에 휩싸였다. 예쁘장하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호감형이었던 인상은 순식간에 변했다. 매서운 얼굴로.
‘저 얼굴로 쌍둥이들을 위협해 온 거겠지. 저런 얼굴로, 저런 표정으로.’
착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이, 좋은 인상이었던 사람이 변하니 꽤 무서워 보였다.
어린아이들은 충분히 두려워할 만큼.
“그러면 공작가에서는 안 내쫓긴다는 소리예요?”
“멍청한 소릴……!”
“대공비 마마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그냥 해본 말이에요. 걱정 마세요. 제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르는데, 그걸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리 없잖아요.”
생긋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여전히 그녀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헛웃음만 뱉어 낼 뿐이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어이없어하는 대공비를 뒤로하고, 그렇게 그곳에서 나왔다.
뒤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대공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목소리는 애써 무시했다.
대신 꽤 거리가 생긴 이후에 돌아본 대공비의 표정은 매우 짜증이 난 듯싶었다.
찻잔을 강하게 내리치는 땅땅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으니까.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알아차린 건지 대공비는 부들부들 떨며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나 어쩐지 내 명을 단축한 거 같은데.’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할 거 같았다. 이제부터 대공비는 나를 내쫓기 위해서 쌍둥이들을 괴롭히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자신의 편이 될 수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녀의 괴롭힘은 내게로만 향할 것이다.
‘그러니 괜찮아. 너희들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과거 같은 일이 반복되지만 않을 수 있다면.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쌍둥이들의 행복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실상 쌍둥이들은 추억이 될 이들일 뿐이다. 그저 내가 여기서 쫓겨나게 된다면 과거의 기억이 될 아이들.
소설 속에서 안쓰러운 인생을 살았고, 어린 시절 비일비재한 학대로 인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지 못할 아이들.
하지만 이 시간을 사는 내게 그게 중요할까. 이곳에 있다 한들 내가 행복할 순 없을 텐데.
나는 여전히 고아원의 아이로 보통의 삶은 살지 못할 텐데.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는 걸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스스로 이야기하면서도 그게 아닌 걸 느꼈으니까.
내 스스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 모르겠다. 나도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건지. 정말…… 안쓰러운 마음 때문인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마음이 있는 건지…….”
머리가 아파 올 정도였다.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 목소리가 아닌 듯한 그 이상한 목소리 때문에도 더욱더 그렇다.
“우선 돌아가야겠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올 때와 달리 가는 길을 안내해 주는 이는 당연히 없었다. 가뜩이나 넓고 넓은 대공가. 거기에 내게 친절한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가의 사람들은 대부분 대공비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대공비에게 미움을 당하고 있는 내게 잘해 줄 리가 만무하다. 결국 난 최대한 기억을 떠올려 가며 돌아가려 했다.
“하…… 무슨 집이 이렇게나 넓어.”
여긴가 싶으면 아니고, 또 여긴가 하면 아니고.
“라리랑 로헨이 기다릴 텐데…….”
내 푸딩 남겨 놓고 기다린댔는데. 이렇게 오지 않으면 대공비에게 무슨 일을 당한 걸까 봐 애들이 많이 기다릴 텐데. 난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곳저곳을 살폈다.
심지어 지금은 아주 음습한 곳에 온 기분이다.
기사들이 훈련을 하는 곳인 듯 여기저기 목도가 정리되어 있었다. 무언가 대나무들이 가득해야 할 것만 같은 공간. 그 안에서 한 사람만이 열심히 훈련 중이었다.
“어음…… 뭔가 너무 잘못 온 거 같은데……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나는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온 길로 나가면 좋겠지만…… 어마어마한 방향치인지라 방향을 까먹었다.
방금 전 들어온 길도 모르다니. 난 정말…… 심각한 길치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가운데에서 칼을 휘두르는 사람만 있어서 물어볼 사람이 영 마뜩지 않다.
“저…… 사람한테 물어봐야겠지.”
무슨 훈련장이 미로야, 미로.
결국 난 훈련하는 사람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아무리 대공가에서 미움을 당한다지만, 그래도 나가는 길 정도 알려 달라고.
그런데 그곳에 있는 건 다른 이도 아닌 대공이었다. 표정 변화 없이 온전히 칼에만 집중하는 남자.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칼에서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대공의 모습이 눈에 가득 찼다.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모습. 몸에서는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몸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아…….”
정말 몸은 타고났네. 우리 로헨도 언젠가 저런 몸이 되려나. 저 정도 돼야 나쁜 놈들 다 패버리고 혼자 잘 먹고 잘 살 텐데.
“언제 건강해지려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말과 함께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긴 후였으니까. 나한테 하는 말인가 했다.
“아.”
“아니군.”
내게 한 말은 맞는 듯 대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라리인 줄 알았다.”
“아. 죄송해요.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입고 다녔…… 아, 저 있는 거 어찌 알았어요?”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의아했지. 외양은 라리인데, 풍겨 오는 기운은 달랐으니까.”
“기운이라…… 무슨 기운이에요, 저는?”
방금 전의 당혹감은 금세 사라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공은 말을 이어 갔고,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서 수건을 하나 집어 들어서는 자신의 이마를 닦아 냈다.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곳의 기운을 퍽 닮아서 말이지.”
“좋아하지 않는 곳?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런 게 있다. 그래서 왜 돌아다니고 있는거지? 여기까지 온 거 보면…… 역시 너는…….”
그때였다.
방금 전까지 별다른 분위기를 풍기지 않던 공작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살기랄까.
‘아,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구나.’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나야 순수하게 길을 잃어서 온 것이지만 그가 봤을 때에는 ‘대공이 혼자 훈련하는 틈을 타 자객이 온 것이다.’라고 결론 내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아아!! 아, 아니에요!”
“뭐가 아니라는거지?”
“절대 여기저기 살피려고 다닌 거 아니에요. 대공 전하를 어쩌려고 한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길을 잃었어요…… 저도 딱히 땀냄새 나는 훈련장에 오고 싶진 않았어요. 올 거면 예쁜 꽃밭에 가고 싶고, 갈 거면 애들이랑 가고 싶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에게 오해받을까 봐 주절주절 말하다 보니 이상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게…….”
“풋.”
“……네……?”
“미안하군. 오픈되어 있어서 땀냄새가 그렇게 기겁할 정도로 많이 나는지 몰랐어. 거기에 순간 의심했는데,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아…….”
다행이다. 물론 약간 상처받은 느낌도 들긴 한다. 내가 땀내 난다고 해서 그런가.
그는 갑작스럽게 수건을 여러 개 들더니 몸 여기저기를 닦기 시작했다.
“헤헤…….”
“생각해 보니 네가 자객이라든가, 혹여나 그런 의뢰를 받은 자면 당당하게 날 구경할 리도 없겠다 생각했다. 네 어설픈 말을 들으며.”
“아아! 그렇죠!”
“그래. 나를 살필 자였으면, 그렇게 있진 않았겠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죠. 절대 몸매 구경 하고 있진 않…… 아니에요.”
이곳까지 걸어오는 데 지쳐서였을까, 대공비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후여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앞에서 보통의 아이처럼 보이고 싶었던 건지 평소와 다르게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재미있군.”
다행이네요. 죽이고 싶군, 이런 말이 아니라서.
“그래서 길을 잃었다고?”
“네. 어디로 나가는지만 알려 주시면 바로 나갈게요.”
“아니다. 직접 데려다주도록 하지.”
“앗, 네.”
너무 예상외의 모습이었다. 그는 한편에 있던 자신의 옷을 대충 걸치고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쫄레쫄레 그의 옆으로 달려갔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문은 내가 들어온 곳 말고도 다른 곳이 있는 듯, 대공은 어디론가 나갔다. 그러자 그의 기사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오늘은 일찍 나오셨습니다.”
“그래.”
“그 옆의 것은…… 무엇입니까. 들어가실 때는 혼자셨는데.”
“들어왔더군.”
“송구합니다. 다른 쪽 입구가 열려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나름대로 막아 놨던 거구나.
어쩐지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가 다른 데와 조금 다르긴 했다. 한쪽으로 밀어지는 문은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아이의 몸이 아니고서야 지나갈 수 없는 아래쪽 홈을 제외하곤 굳건히 닫혀 있었다.
‘난 그래서 이쪽이 길인 줄 알았지.’
뭔가 그런 수상한 게 있으면 항상 문이니까.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