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43)화 (43/99)

-43화-

이거 그건가.

너 같은 게 내 아들을 만나는 걸 허락지 않는다. 그러니 돈을 줄 테니 떨어져 나가라.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그런 거?

물론 이런 상황들을 충분히 예상했기에 난 그녀를 보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럼 저보고 나가라는 건가요?”

“물론.”

“맨입으로요?”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인지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를 크게 당황시키긴 한 듯하다. 한참 동안 우물거리던 그녀는 다시금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참 예쁜데, 저렇게 자신의 얼굴을 망친다니까.

난 팔로 의자를 꼭 잡은 채 다리를 굴렸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이를 아득 갈며 나를 바라봤다.

“돈이라도 내놓으란 건가?”

“그 정도의 성의는 있어야 고민이라도 해보겠단 거죠.”

“허, 허 참. 대단한 아이로구나.”

“대단할 게 어디 있나요.”

“그걸 바라고 이곳에 들어온 게 맞나 보구나? 이래서 미천한 잡종들은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해.”

그녀는 이제야 내 의도를 알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정말 그런 걸 바라고 들어왔더라면 대공 전하께서 제게 말씀하셨을 때 필요한 걸 말했을 테죠.”

“뭐?”

“아쉽게도 그냥 해본 소리였답니다. 저는 딱히 뭔가 필요하지 않아요. 필요한 게 있다면 쌍둥이들 곁에 있는 정도랄까요?”

“나를 가지고 지금 장난 친 거니? 하. 네가 정말……!”

어떻게서든 나를 몰아가려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요. 그저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가 여기 있는 걸 그리 원치 않으셨으면, 처음부터 저를 이곳에 들이지 마셨어야 했다는 걸요.”

그녀와 잘 지낼 마음 따윈 하나 없다.

다른 이도 아니고 우리 쌍둥이들을 그렇게 괴롭힌 사람인데.

“제가 어떻게 해서 대공 전하의 맘에 들어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는데요.”

“그래 봤자 결국 한 달짜리 시한부면서.”

하지만 금세 상황은 역전되었다. 내내 나를 보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던 그녀는 혀를 끌끌 찼다. 이제야 나를 상대할 무슨 말이 떠오른 모양이다.

“아. 그렇죠.”

“만약 한 달이 돼서 쫓겨난다면, 넌 아무것도 받지 못할 거야. 대공이 무언가 해준다 하면 내가 다 막아 버릴 거니까.”

“그런가요.”

그녀 나름의 협박이라 생각한 건지, 대공비는 아까보다 더 굳은 얼굴을 했다.

“……빈털터리로 쫓겨나게 될 거라는 거다.”

“괜찮아요. 살면서 무언가 제 거인 적이 없어서, 상관없어요.”

“허…….”

질린다는 표정이 절로 묻어났다. 원래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건 꽤 피곤한 일이다. 어른처럼 원하는 게 명확하지 않으니까, 어른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바라곤 하니까.

그걸 느낀 건지 머리가 아픈 듯 그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걱정 마세요. 쫓겨날 일은 없을 거니까. 대공 전하와 약조한 걸 해내면 전 이곳에 있을 수 있거든요.”

“과연 로헨이 그런 말을 할까?”

“글쎄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제 목적은 달성되는걸요.”

“네 목적?”

난 그녀가 불안할 수 있게끔 말을 하다 말았다.

한국인이건, 이 나라 사람이건 말을 하다 말면 다들 화가 많이 나나 보다.

그녀는 이를 아득아득 갈며 나를 노려봤다.

“왜 말을 하다 말지?”

“목적까지 다 말할 이유는 없잖아요.”

“……네가 정말…….”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대공비를 바라봤다. 많이 화나겠지. 이렇게까지 제 뜻대로 안 된 적이 없으니까 지금 분노가 치밀어오를 거다. 나는 그걸 바라고 있고, 생각보다 잘되고 있다.

‘거기에 내 목적은 당신인걸.’

아이들에게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려 주는 것. 이 가문이 어떤 곳인지, 왜 너희가 버려졌던 거고 다시 데려와진 건지. 모든 배후에는 누가 있는지.

조금이라도 힘이 생긴다면, 아이들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모든 걸 말할 것이다. 지금 말해 봤자 믿어 줄지 안 믿어 줄지도 모르는 상황인 데다가, 혹여나 로헨이 따져 묻는다고 해도 증거가 없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 내가 뭘 아는지, 아이들한테 뭘 어떻게 할 건지 당신은 궁금해 미치겠지.’

당신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걸 직접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녀에게 나는 고아 아이일 뿐이다. 신경조차 쓰지 않아도 되고, 그녀 말대로 좀 있으면 쫓겨날 그런 아이.

하지만 그런 나를 이렇게까지 불렀다는 건, 그녀가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반증했다.

‘뭐가 그리도 불안할까.’

라리가 혼자 있을 때만 해도 말을 잘 들었는데, 최근 들어 말을 듣지 않게 된 것?

로헨이 와서가 문제가 아니라, 나는 라리에게 시녀들에게도 휘둘리지 말고 대공녀로서 할 말은 다 하라 했다. 그게 아무래도 대공비의 마음에 아주 들지 않았나 보다.

‘내 계획대로. 그녀의 성질을 건드리는 데는 성공했어.’

로헨은 건드릴 수 없으니, 나를 건드린 거겠지.

그런 나를 보던 대공비는 무언가 달리 생각하는 것처럼 갑작스레 표정을 변화시켰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표정이 오락가락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던 차, 그녀가 결론을 내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조금 대공비 같네.’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의 대공비는 지금처럼 바보 같지 않았다.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은 맞았다. 그러니 쌍둥이들을 죽이려고 한 것도 모자라, 고아원으로 보내서 가둬 놓고, 그도 모자라 또 괴롭히고 또 괴롭혔던 거겠지.

주기적으로 고아원장을 시켜 괴롭힌 대공비. 결국 그녀는 그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소설 속에서 다 티 내고 다니다가 대공한테 들키고 말지.

‘하지만 이번엔 표정을 꽤 잘 숨기네.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아무래도 바꿔야겠구나.”

“뭐를 말이죠?”

“너, 네 부모를 알고 싶지?”

오. 이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공비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하기에는 놀랍고 신통하다. 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난 너같이 특이한 머리 색과 눈동자를 지닌 이를 본 적이 있다. 검은 머리칼에 벚꽃잎을 닮은 분홍색 눈동자는 참 희귀한 조합이야. 그러니 내가 본 그자가 아마도 네 모친이겠지. 그자에 대해 알아봐 주마.”

갑작스럽게 말을 바꾸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요? 아. 그렇게 해서 나를 내쫓으려구요?”

“아니. 그걸 알려 줄 테니, 내 뜻대로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

갑작스럽게 대공비의 말투가 바뀌었다. 

“제게 뭘 시키시려구요?”

“음…… 나는 어미 된 자로서 자식들을 올바르게 키우고 싶단다. 잘 지내고 싶어. 하지만 쌍둥이들은 밖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그런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원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더구나.”

잘 지내고 싶기는. 웃음이 날 정도다.

저런 말로 나를 현혹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가.

“뭐. 네 얼굴은 전혀 믿지 않는 듯한 얼굴이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그렇단다. 그래서 네 도움을 받고자 해.”

“제 도움 뭐요?”

“아주 간단해.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놀이를 좋아하고 어떤 선물들을 좋아하는지, 이런 것들을 알아 오면 된단다.”

“흐음.”

보통 아이였다면 여기서 넘어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나와 이야기해 놓고 이렇게 나를 물로 볼 줄이야. 이런 걸로 내가 넘어갈 거라 생각하는 건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아이들이 하루 종일 뭘 하고 지내는지. 이 정도면 충분해. 다른 건 바라지도 않는다. 네가 정말 아이들하고 친하다고 하니, 다른 이들은 모를 것들을 알고 있겠지. 그걸 알아 오면 된다.”

이렇게 말하고 내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 온다면…….

‘아이들에게 내가 자신들이 하는 모든 걸 보고한다고 말하겠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낸 것처럼, 아이들에게 가서, 안쓰럽다고 위로하면서 내가 스파이 짓을 하고 있다 하겠지. 이제는 생각을 달리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내게 정보도 얻고, 아이들과 내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고.’

내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대공비는 무언가 통했다고 생각한 건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낳아 준 이가 보고 싶지 않니?”

“음…….”

“원한다면 네 엄마를 찾아 주고, 너를 데려가 달라 말해 주마.”

난 그녀를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엄마라…… 가족이 궁금하긴 했어요.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고아원에서 자랐으니까.”

대공비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내 모친에 관한 건 지난 삶에서도 알아내지 못한 사실이니까.’

순간 떠오른 말에 난 얼굴을 굳혔다.

‘지난 삶……?’

자연스럽게 떠오른 내 기억. 자연스럽게 언급되어 버린 지난 삶. 놀란 나머지 다시금 그 말을 언급했지만, 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내 안에…… 다른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왜 이러는 거지?’

나는 멍하니 굳어 버리고 말았다. 혹시 이 몸…… 아이샤의 원주인일까.

내가 아이샤가 된 후 계속해서 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말이 안 되잖아. 이 몸은…… 소설 속 등장인물일 뿐인데, 어떻게…… 지난 삶이라든가…….’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꿈속에서의 나, 어른이 되어 버린 나. 날 보며 화를 내던…….

‘보육원장. 그러면…… 그건 꿈이 아니라 이 몸의 원기억인가. 이 몸…… 아이샤는…… 그냥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녔던 건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혹시…… 회귀라도 한 것인가.’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기억 때문에 내가 멍하게 있자, 대공비는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생각한 건지 씩 웃었다.

“어린아이들은 제 부모가 궁금할 만하지. 다 이해한다. 그래 봐야 너도 아직 어린아이일 테니까. 부모의 품이 궁금하고, 부모의 사랑이 궁금할 나이지.”

아닌데요, 그거.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제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저를 낳으신 거겠네요.”

“어?”

“결혼한 상태로 일반적인 과정에서 낳은 아이라면, 엄마만 언급하는 게 아니라 아빠도 언급하셨겠죠. 하지만 계속해서 모친에 관한 말만 하는 거 보면…… 분명 문제가 있다는 거겠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