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42)화 (42/99)

-42화-

난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날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날 상대로 깔아뭉개려고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제대로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악테르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봤다.

“정말…….”

“왜요. 이번에도 버릇없다 예의 없다 하시려구요?”

“하. 말을 말아야죠. 어린아이를 상대로 뭘 하자는 건지.”

스스로도 한심하다 생각한 건지 그가 혀를 끌 찼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말다툼하는 것도, 가는 길에 마주하는 대공가의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퍽 민망한 상황이겠지.’

결국 그는 아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난 그런 그를 따라 대공가의 여기저기를 돌고 돌아 대공비가 있는 정원에 당도했다. 딱히 나를 고생시키기 위해서 빙빙 도는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그도 나와 있는 이 순간이 꽤 피곤해 보였으니까.

“잠깐 여기 계시죠.”

“네~.”

쌍둥이들이 없는 상황에서 굳이 그와 트러블을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잘 관리된 잔디 위에 놓여 있는 티테이블. 내가 있는 곳과 대공비가 앉아 있는 곳은 꽤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멀리 있어서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으나, 대공비의 얼굴이 굳어지는 건 너무나도 잘 보인다.

악테르가 아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듯, 그녀는 주먹까지 꽉 쥐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그와 동시에 악테르가 내 쪽으로 다시 걸어왔다.

“대공비 마마께서 오라고 하십니다.”

“네~.”

“……아까 쌍둥…… 아니, 대공자, 대공녀님과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르군요.”

“저 그거 할 줄 알거든요.”

“그거?”

“주제 파악이요.”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어이없다는 듯 그가 나를 바라봤다. 질린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정말…… 당신은 예상을 벗어나는 아이군요. 두 분이 안 계실 때에도 당당할 줄 알았는데.”

“뭐. 칭찬으로 알아듣죠. 그럼 가시죠. 대공비 마마께서 기다리실 텐데.”

아까 쌍둥이와 있었던 일 때문에 나에 대해 매우 나쁘게 생각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신기한 듯 나를 바라봤다.

‘아까 일을 까먹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렇게 신기한가.’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었다. 오늘의 목적지에는 당도했으니까.

역시나 기선제압을 하려는 것처럼 대공비는 날 보자마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대공비 마마를 뵙습니다.”

“…….”

홀짝홀짝. 찻물을 흡입하는 소리만 들려온다. 난 잠시 살피다가 앞에 있는 의자를 바라봤다.

“저 앉아도 되죠?”

딱 앉기 좋게 뒤로 빠져 있는 의자.

“대답 없으시면 앉을게요.”

그러고선 냉큼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시선조차 주지 않던 대공비가 나를 바라봤다.

“예의라곤 참 없구나?”

“이렇게 해야 대공비 마마께서 저를 봐주실 거 같아서요.”

그녀와 결은 다르지만 기선제압이었다. 당신이 어떤 짓을 하든 나는 절대 겁을 먹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는, 내 나름대로의 기선제압.

역시나 대공비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 코를 벌름거렸다. 예쁘장한 그녀의 콧구멍이 동전 두 개 들어갈 만큼 커졌다.

“역시 출신이 문제야. 이래서 잡종들은 참 마음에 들지 않아.”

혀를 끌끌 차던 그녀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앗. 제 출신 아세요? 저도 알려 주세요. 제 부모님에 대해 알아 오신 거예요?”

“너는 어쩜 애가 이다지도 뻔뻔하니?”

“뻔뻔해야죠. 고아원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정말 제 부모님을 알아 오신 거예요?”

“아, 알기는. 그냥 해본 소리지. 네 부모를 알면 당장이라도 데려가라고 내쫓았겠지.”

거짓인가 했지만, 이 부분은 진실인가 보다. 대공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지는 거 보면.

이제껏 살아오면서 다들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사람만 본 그녀로선 나의 존재가 영 달갑지 않아 보였다. 원래도 달갑지 않은데, 처음 봤을 때부터 참으로 못마땅했는데 오늘 더더욱 이러고 있으니 그녀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듯했다.

그녀 앞이라면 아이고 어른이고 언제나 납작 엎드렸다. 다른 이도 아닌 대공비이다. 어느 누가 대공비 앞에서 이리도 뻔뻔스럽게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정도로 말한다고, 갑자기 나를 죽일 리도 없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의 목적 자체가, 살아남기가 아니라 쌍둥이들을 위한 게 아닐까 하고. 이상한 꿈을 꾼 이후부터는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고아로 자라서 세상에 두려움이 많은 내게, 신이 주신 일종의 버프 같은 거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해봤다. 아니고서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라리에게는 친절한 대공비라 할지라도 너한테는 아닐 텐데? 상황 파악을 할 줄 아는,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 아이라 하더니 그건 또 아닌가 보지?”

“아니요. 저 파악 잘해요. 주제 파악도 잘하고, 상황 파악도 잘하고.”

또한 당신이 나를 절대 해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적어도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대공이 툭하면 쫓아낼 것처럼 굴긴 했지만, 아직 나는 내쫓기지 않은 상태이며 쌍둥이들이 진심을 다해 아끼는 존재니까.

‘유효 기간이 이곳에 있는 동안인 게 아쉽네.’

안 그랬으면 실컷 약 올렸을 텐데.

어쨌든 지금은 상황 파악을 참 잘해 내서, 대공비에게 알려 주는 게 중요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아이들은, 마냥 어린아이들이 아니라고. 언제든 당신의 목덜미를 물 수 있다고.

그래야만 그녀는 아이들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그러는 사이 어이없이 나를 바라보던 대공비가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보다. 네 옷 말이야.”

“네!”

언제쯤 이야기하나 했는데, 이제야 대공비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그 옷을 입고 있냐, 그런 표정으로.

“그건 라리즈의 옷이 아니더냐. 네가 왜 그 옷을 입고 있는 거지?”

“라리가 워낙 저를 좋아해서 말이죠. 본인이 입는 옷도 전부 다 똑같이 입고 싶어해서 별수 없었어요.”

반은 사실이고 반은 틀렸다.

라리가 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옷을 같이 입자고 한 적은 없었다. 다른 이들이 있는 앞에서는 슬쩍 그런 종류의 말을 시키긴 했지만, 라리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

“감히 너 같은 평민이 라리즈에게 주어진 옷을 입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이니?”

“옷은 라리에게 들어간 순간 라리의 것이에요. 그리고 그 옷의 주인이 저와 같이 입기를 원했으니 전 따랐을 뿐이고요. 대공비 마마 말씀처럼 평민인 제가 어떻게 대공녀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 있겠어요.”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순수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다른 마음은 전혀 없는 것처럼, 그런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녀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럴 만하지. 당신이 라리를 지금 상태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해둔 것 같으니까.’

분명 이름도 모를 독약을 만들었고, 그것을 여러 방면으로 라리에게 먹이고 있다. 왜 그녀가 라리를 아프게 만드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소설 속에서도 언급이 되지 않았고, 또한 대략적으로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이유가 맞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하나. 라리를 아프게 만들어서 쌍둥이 중 하나라도 없애려 한다.

둘. 라리를 아프게 만들고, 자신이 보살펴 줌으로써 라리의 호감을 얻는다.

셋. 라리를 아프게 만드는 건 개인적인 원한일 뿐 어떠한 이유도 없다.

셋 다일 수도 있고, 셋 다 아닐 수도 있고.

그래서 나도 라리와 같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먹는 거에도 미량의 독이 들어가 있을 거야. 하지만 로헨과 내가 멀쩡했던 거 보면 대공비는 복합적으로 독을 쓴 게 맞겠지. 의원의 말처럼. 그러니 라리가 하는 모든 걸 내가 똑같이 하면, 어디가 문제인지 결국 알겠지. 또한 대공에게 라리의 몸 상태가 성장 과정 중에 오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줄 수 있을 거야.’

“아주 당당하구나.”

“당당하지 못할 게 없으니까요.”

내가 라리와 똑같이 하고 있는 걸 보고 나서야 그녀는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 마음은 명확했다.

‘나까지 아파 버리면, 결국 대공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라리의 증상은 딱히 졸음이 많아졌다는 것 외에는 없다. 그 때문에 무언가 문제를 걸 만한 거리도 없고, 성장 과정 중이라고 말을 해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나가 아닌 두 사람이 똑같이 아파 버리면? 대공 또한 의심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리의 증상이 일반적인 성장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가뜩이나 나 때문에 의원을 불러온 게 퍽 마음에 드시지 않을 텐데, 얼마나 짜증 나겠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적이 없던 대공비다. 대공 또한 딱히 그녀가 뭘 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가 없었더라면 필시 이번 일도 대공비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의원을 추가로 부르는 일은 그녀의 계획에 조금도 없는 일일 테니까.

‘그래도 바보는 아니라서 언제나 대공비는 뒤로 수작을 부리면서, 최소의 사람으로 그 일을 움직이곤 했어.’

많은 사람들이 알아 봤자, 입막음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그 때문에 의원들을 사주해서 원하는 대로 말을 맞췄다 해도, 그녀의 계획은 이미 틀어진 거다. 자신의 계획을, 자신의 생각을, 그녀가 라리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늘어났으니까.

그러는 사이 이런 식으로 해봤자 말이 안 끝날 걸 알아차린 건지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 집안에 너처럼 출신이 미천한 아이를 두는 걸 원치 않는다. 사용인들조차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쌍둥이들의 곁에 네가 있는 꼴은 정말 볼 수가 없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