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어?”
갑작스러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쌍둥이들을 보며 씩 웃었다.
내 쪽에서 먼저 선전포고했다. 우리 애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아직 어린아이이긴 해도 우리 쪽에는 대공이라는 든든한 히든 키가 붙어 있다고. 이 일로 대공비에게 직접 선제공격을 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분명히 그녀는 연락을 해 올 것이다.
“어쨌든 이제부터 난 라리의 모든 걸 함께할 거야.”
“내 모든 걸?”
먹는 걸로는 비슷한 상황이 되지 않았으니 입는 것부터 모든 걸 다 똑같이 할 거다.
‘로헨은 아무 이상이 없는 거 보면, 로헨은 하지 않지만 라리는 하는 것, 그게 문제인 거겠지.’
난 씩 웃으며 라리의 손을 잡았다.
“자자.”
“으응…… 같이 자는 거야, 오늘은?”
“그래. 그러니까 눈 꼭 감고, 잘 자. 라리. 로헨.”
“응! 너무 좋다.”
라리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양 인형을 힘껏 끌어안았다. 행복하다는 듯 웃으면서.
그런 라리를 보며 나 또한 눈을 감았다.
‘이번엔 내가 너희들을 지켜 줄게. 내가 없어도 되게 바꿔 놓고 나갈게.’
단 한 달밖에 기회가 없더라도, 적어도 대공비에게 너희들이 쉽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 주고 갈게. 그리고…….
‘아프지 않게, 건강할 수 있게.’
난 라리의 손을 꼭 잡고 믿지 않는 신을 염원했다.
힘들었던 아이들이 더 이상 힘들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하루는 빠르게 지나갔다.
***
이틀 후.
라리와 똑같이 옷을 입고, 라리가 들고 다니던 인형을 안고 식사를 하고 그런 일상을 산 지 이틀째 되던 날, 막 식사를 끝낸 우리 앞에 처음 보는 시종이 나타났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온 남자. 그는 라리와 똑같이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안색을 굳혔다.
네가 왜 그 옷을 입고 있냐는 표정이다. 물론 나는 그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뭐죠?”
“대공비 마마께서 찾으십니다.”
블레어 대공비. 드디어 나를 찾는다는 것인가. 나는 올 것이 왔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끝이십니까?”
“그럼요?”
“대공비 마마께서 찾으시면 바로 가셔야 하는 게 이곳에서의 예의입니다.”
역시나 나를 만만하게 본 건지 시종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바라봤다. 이번에도 로헨이 나서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난 로헨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신 그와 눈을 맞췄다.
“저기요.”
“저기요라니. 어디서 그런 말버릇을…….”
“예의 없고 버릇없는 건 그쪽 아닌가요?”
“허……허. 지금 저한테 그런 말을 한 것입니까?”
하긴. 저런 반응이 매우 당연한 것이다. 난 귀족은커녕 평민의 아이일 뿐이니까. 신분이 보증되지 않은 아이. 쌍둥이들 덕분에 대공가에 들어와서 비싼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객식구일 뿐이니까.
그러니 그런 객식구인 아이가, 귀족인지도 모를 아이가 자신을 향해 말대답을 하는 건 시종인 그로서 굉장히 기분 나쁠 일이었다.
“네.”
“네라니, 네라니요! 역시 외부에서 온, 신분도 모를 아이이기에 버릇도 예의도 없군요.”
“당신 눈앞에 있는 게 누구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먹던 포크를 내려 두었다.
“누구기는요. 객식구죠.”
“나이가 있으셔서 그런지 눈이 잘 안 보이시나 봐요.”
신분도 모르는 꼬마애한테 무시를 당해서였을까, 남자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조용히 하세요. 당신 앞에 있는 건 대공가의 대공자와 대공녀일 텐데요.”
“아…….”
그제야 그는 작은 탄식을 뱉어 내며 내 옆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송구합니다. 도련님, 아가씨.”
“대공자. 대공녀.”
“…….”
“왜요. 그 말이 힘든 건가요? 대공비 마마께서 보내신 시종이라 누구보다 예의가 바를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네요. 저보다도 더 예의가 없으신 거 같으니.”
나보고 버릇도 예의도 없다고 한 시종에게 그대로 갚아 주는 중이다.
나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아니다. 이곳은 대공가. 그리고 저들은 대공가에게 종속되어 있는 사용인들일 뿐이다. 쌍둥이들은 이 가문의 주인이고 저들이 모셔야 할 사람이니까.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꼴은 절대로 못 본다.
“…….”
“거기에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고, 대공자와 대공녀의 식사 시간에 따지듯 들어오는 건 어디서 배운 예법이죠? 부모도 없이 고아원에서 자란 저도 아는 걸. 대공가라 해서 대단한 곳인 줄 알았더니 뭐, 그렇지도 않은가 봐요.”
살짝 코웃음 치며 그를 바라봤다. 다른 이도 아닌 내게 무시당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이도 아닌 내 앞에서 쌍둥이들을 무시하면 쓰나.
“아닌가요?”
난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당연히 오라고 하면 냅다 갈 줄 알았나 보지?
물론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무시하니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대공비 마마께서 찾으면 가야 하는 건 예절이면서, 대공자와 대공녀에게 예를 갖추는 건 예절이 아닌가 보죠. 그러면 가지 않겠어요.”
“가셔야 합니다.”
“이번에도 그게 예절이고 예의라고 할 건가요. 그럴 거면 본인부터 제대로 하세요.”
없는 예의 따져 가면서 말하지 말고. 아무리 내가 객식구에 손님이라고 하지만, 어느 누가 오라면 오고 가란다면 가야 하겠는가.
내가 정식으로 이 집에 채용된 사람도 아니고. 세상에 저런 법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손님에게 오라 가라 하는 법도가.
그 때문에 난 어느새 앞에 놓인 푸딩을 바라봤다.
“그럼 우리는 아직 식사가 안 끝나서 말이죠.”
“인사드립니다. 대공자, 대공녀님. 갑작스럽게 식사 시간에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그래.”
기다렸다는 듯 로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그의 성질을 더 건드린 듯, 시종이 주먹을 꽉 쥐다가 나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됐냐는 표정으로.
“되었습니까.”
“아니, 사과는 걔한테도 해야지.”
로헨은 기다렸다는 듯 내 말에 호응했다. 시종은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대공자님.”
“왜 아니야? 난 맞는 거 같은데. 나와 같은 취급을 하라고 분명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
“라리와 내 식사 시간뿐만 아니라 아이샤의 식사 시간을 방해했잖아. 그러니 사과해야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하고 있었지만, 로헨의 목소리에는 강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대공의 것과 매우 흡사한.
그래서 시종은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된다는 것처럼.
“제가 무례를 끼쳤습니다.”
“됐어요.”
“그럼 가시죠.”
“그런데 본인이 누군지 소개하는 게 우선 아닌가요?”
끝까지 쉽게 물러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리고 내 말에 그는 울컥 짜증을 뱉어 냈다.
“악! 테르입니다.”
“악! 테르. 화라도 났나 봐요.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거 보면.”
난 보란 듯이 그의 이름을 똑같이 불렀다.
“화가 나다니요. 그저 순간 재채기가 나올 뻔해서 그리 말한 것뿐이죠. 그러면 이제 정말 가도 되겠습니까. 대공비 마마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래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가 가면 나도 갈래.”
“나도.”
라리와 로헨이 연이어 말했다.
“안 되십니다. 이.분.만. 모셔 오라는 대공비 마마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 나 혼자 갔다 올게.”
“안 돼. 걱정돼.”
로헨은 꽤나 단호했다. 라리는 내 팔을 잡은 채 놓지 않았고.
“아냐. 괜찮아. 설마 악! 테르가 무슨 짓을 하겠어? 혹여나 내가 제시간에 안 오면 악! 테르를 찾으면 되잖아.”
그 말에 로헨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서렸다. 무슨 일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아이의 표정은 사납고 매서웠다,
“우웅…… 시른데. 그런데 언니야가 이렇게 말하니까 보내 줘야지.”
라리는 내 팔을 놓고선 악테르를 바라봤다.
“언니야한테 조금이라도 일이 생기면 죽여 버릴 거야. 헤헤. 그러니까 잘 데려와야 해.”
순진무구한 얼굴로 하는 말은 전혀 순진하지 않았다.
뜻을 알고 하는 건지, 아니면 뜻을 모르고 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로헨에 이어 라리에게까지 협박 아닌 협박을 듣자 악테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세요…… 무서워서 이 방엔 다시 오지도 못하겠습니다.”
볼멘소리를 하던 그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어차피 대공비는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 정말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있는 시간에 대놓고 데려가진 않았겠지.’
그렇다는 건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다 알게끔 나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난 두 아이들에게 해맑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나 갔다 올게.”
“빨리 갔다 와.”
“언니야 푸딩 남겨 놓을게!”
“응.”
그 말을 끝을 나는 악테르와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매우 불만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물론 그렇다 한들 내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악테르는 매우 불편한 표정을 짓다가 뛰어가듯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것처럼. 마치 나를 약 올리는 듯한 그 모습에 난 아주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결국 나를 보지도 않고 뛰어가던 악테르는 뒤늦게 내게로 돌아왔다.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멈춰 서서 창밖을 구경하고 있던 나는, 짜증을 울컥 뱉어 내는 그와 마주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아. 하도 빨리 가길래 나 버리고 가는 줄 알았죠? 아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