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옆집 애 이야기도 저렇게는 말하지 않겠네.
정말 말로 전해지지 않을 만큼 그의 어조는 매우 단조로웠다. 음성의 고저가 없다랄까.
“글쎄요.”
“음…… 한참 클 때라서 그런가?”
“다른 자식들은 어땠어요? 다른 자식들도 모두 클 때 잠이 많았어요?”
그 말에 대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죠?”
“잘 모르겠다. 크게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서.”
몸이 순간 휘청거릴 뻔했다.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정말 새로운 인간상이다.
“어, 어쨌든…… 이렇게 자는 건 좀 이상해요. 그래서 부탁드리려 해요.”
“……부탁? 아, 부탁하려고 했던 건가. 굉장히 독특해.”
“네…… 뭐……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의원을 들여 주세요. 제가 봤을 때 라리의 상태가 너무 이상해요. 고아원에서 함께 있을 때만 해도, 잠이 많은 아이이긴 했으나 이 정도는 아녔어요.”
그제야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비에게 말해 놓으마.”
“대공 전하께서 직접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도 대공가에서 우리가 믿을 사람은 대공 전하뿐인데.”
“나를…… 믿는다?”
내내 감정이 없던 대공의 얼굴에 조금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딱히 대공을 정말 믿어서 하는 말은 아녔다. 단지 대공비는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니까 그리 말한 건데, 대공은 큰 감명을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죠, 뭐. 어쨌든 그래서 의원을 불러 주세요. 라리가 너무 걱정돼요.”
“알았다. 그리 부탁하니…… 거기에 내 아이에 관한 일이니 그리하도록 하지.”
그제야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공이 불러오는 자가 진료를 본다 해도 완벽하게 사실을 알려 주진 않을 거란 걸 안다. 그자 또한 대공비에게 다 말할 게 뻔하지.
‘그래도 대공비에게 대공이 아이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계기가 될 거야.’
그녀 또한 아이들을 함부로 할 수 없게.
‘거기에…… 혹시 모르잖아. 라리가 갑자기 잠이 많아지게 된 것, 그 이유를 작은 힌트라도 들을 수 있을지도.’
난 라리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원하는 바를 이뤘으니 대공과 더 이야기할 건 없었다. 그래서 라리에게로 갔는데 대공이 어느새 나를 따라와 버렸다.
“그런데 참 이상해. 아주 버릇없는데, 나도 모르게 네 말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구나.”
“그건 다 옳은 말만 하니까 그런 거예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대공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 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서 입을 다물었을 테고, 어른들은 대공의 눈에 들기 위해 어떻게든 아부를 했을 테니까.
그나마 그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낼 사람은 대공비뿐인데, 대공비도 나처럼은 하지 않았을 거니.
“그런가. 새로운 기분이군.”
이건 마치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런 레퍼토리인가.
‘아니, 그건 그래도 남녀관계잖아. 대공에게 새로운 기분을 안겨 줬다고 죽이는 건 아니겠지.’
실컷 질러 놓고 막상 걱정이 몰려왔다.
‘라리의 일이라고 너무 막 나간 듯해. 아무래도 내 목숨을 소중히 해야겠어. 한 달 후면…… 정말 로헨이 아빠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난 쫓겨나는 것도 모자라 죽을지도 모르니까.’
“어, 어쨌든…… 감사해요.”
“감사할 거 없다. 내 자식에 관한 거니, 당연히 해야 하는 것. 단지 내가 모든 걸 다 신경 쓸 수 없어서 말이지.”
“그러니 제가 필요한 거예요. 누구보다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람. 누구보다 아이들을 걱정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홍보하는 건가. 말은 참 잘해. 대공인 내 앞에서 주눅도 들지 않고.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쳇. 이 정도면 아주 조금 마음이 흔들릴 법한데, 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인간이었다.
“이제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알아요.”
“하지만 로헨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더군. 아직까지 조금의 변화도 없는 거 보면.”
아버지로서 아버지다운 짓을 해야 아버지라 부르죠.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로헨을 바라봤다.
“때가 되면 부르겠죠.”
“너를 증명하라 했다. 그게 아니면 너를 증명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다.”
“네네.”
“그래. 멍청하지 않아서 좋아. 떼라도 쓸까 봐 걱정했는데 말이지. 아, 그렇지.”
앞뒤를 다 잘라먹고 이야기해도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아먹어서 그런지, 대공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요……?”
“아. 곧 신전에 가게 될 것이다. 준비하도록 해.”
“오늘이요?”
“며칠 후에.”
그게 끝이었다. 왜 가는지, 누가 때문에 가는 건지, 어떤 연유로 가는 건지에 대한 말은 없었다.
‘아무래도 대공은 말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할 거 같아.’
난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가도 되는 거예요? 왜 가는 거예요?”
“아아. 너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가야지. 지난번에 요청이 왔다. 너를 데리고 신전으로 와달라고. 그래서 가는 것이다. 신전에서 먼저 와달라 요청하는 경우는 더욱이 없기에 가려는 것이고.”
“아아.”
“물론 거기에서 어떤 말을 듣건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럼 가마.”
그 말이 전부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자기 할 말만 모두 한 대공은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아.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그래도 의원 불러 준다잖아. 그러니까 괜찮은 거야.”
“……누나, 너한테 하는 말들이 너무 다 별로야. 마치 상처 주려고 작정한 사람 같아.”
로헨이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내가 봤을 땐 로헨이나 대공이나 거기서 거기다. 조금 매운 맛과 조금 덜 매운 정도의 차이랄까.
하지만 로헨은 자신과 말투가 퍽 비슷한 대공을 저주하듯 싫어했고, 차마 너와 똑같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의원이 찾아왔다. 대공이 보낸 사람이라며 들어온 세 명의 의원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잠만 자는 라리를 가만히 살폈다.
하지만 세 의원 모두 똑같은 말을 하기 바빴다.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성장 과정일 뿐, 몸에 이상은 없습니다.”
“딱히…….”
심지어 대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을 맞춘 사람처럼 굴기 바빴다.
“잘 봐봐요. 성장 과정 중에 하나일 리가 없잖아요. 이유가 없다니요.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녔는데, 갑작스레 변했다니까요.”
라리 옆에 있던 내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말을 했음에도 의원들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누가 봐도 허름한 행색의 아이가 바로 나였으니까. 슬쩍 나를 훑은 그들은 무시하기 바빴다.
“정말 자세히 살폈음에도 별 이상이 없단 건가?”
누가 봐도 그들은 대공비 쪽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라리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게 보일 정도였으니.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제대로 살피고선 저런 말을 했다면 이해해 봤겠지만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았다. 그대들의 뜻이 그러하니 그게 맞는 거겠지. 이쪽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우리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
그 말에 의원들은 부리나케 나가려는 듯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대들의 말에 거짓이 있을 시, 나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의원이 그대들만 있는 건 아닐 테니.”
“허허…… 거, 걱정 마십쇼. 저희들 진료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그, 그럼요……!”
그때였다. 그나마 ‘이유를 알 수 없다’라는 진료를 했던 젊은 의원이 살짝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의학적으로는 이상이 없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원래 사람의 몸은 복합적인 것이라…… 꼭 한 가지에서 이유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냥 제 의견일 뿐입니다. 저희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건 맞으나 이유를 한 가지로만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다방면으로 알아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너무 의원을 불러 원인을 찾으려고 하시는 거 같아서……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희를 의심하지 말아 주세요.”
누가 봐도 찝찝한 말이었다. 하지만 거의 울 듯이 이야기하는 의원으 말에 대공은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나가라.”
“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원인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건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독을 쓴다는 건가?’
독이 아니고서야 아이가 이렇게까지 잠만 잘 수 없다. 원래 대공비는 소설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서슴없이 독을 쓴 사람이다. 고아원에 가둔 것도, 그런 아이들을 죽이려 한 것도 그녀니까.
‘어쩌면 방법을 찾은 걸까. 아이들을 죽일 방법을?’
하지만 소설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걸 지금 발견했을 리는 없다. 그럼 뭘까. 도대체 뭘까.
난 라리를 바라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보통 독이라고 하면 먹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나는 라리가 이상한 걸 느낀 후부터 라리가 먹는 모든 음식들을 같이 먹었다. 물에서부터 간식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난 멀쩡하다. 로헨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뭐지. 정말 그저 성장기라서일까.
“네 말대로 의원을 불렀으나 이유가 없다 하는군.”
“……불러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도 예상처럼 대공비에게 경고를 확실히 보냈다. 대공이 직접 의원을 부르는 걸로. 또, 의원의 찝찝한 말도 아주 작은 힌트를 주었다. 한 가지에서 원인을 찾지 말라는 힌트를.
“감사할 게 있나. 라리는…… 내 딸이기도 하니까. 네 말을 듣고 나니…… 걱정이라는 감정이 생겼다. 아주 조금은. 그러니 앞으로 내가 알아보도록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