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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37)화 (37/99)

-37화- 

우리의 말은 기가 막히게 들은 건지 꽤 멀어졌던 제프리의 몸이 휘청거렸다.

너무 크게 말했나. 하지만 제프리는 아무리 봐도 우리에게 있어 쓸데없는 인간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정확히는 절대 상종도 하지 않을 인간.

그래서 난 로헨과 라리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도망가자.”

“어?”

“지금 당장 와서 또 잔소리할 거 같으니까 얼른 도망가자.”

그리고 난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다가 로헨의 손을 냉큼 잡았다.

“도, 도망?”

“어. 라리야. 눈 뜨자. 우리 오랜만에 고아원 때처럼 달리자.”

“으응!”

제프리와 이야기하느라 정신을 조금 차리고 있던 라리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제프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려는 듯 성큼성큼 걸어왔다. 우리는 피식 웃으며 제프리에게서 벗어났다.

“잠깐! 오해는 풀고 가야지!”

그런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제프리와는 잘 지낼 마음이 없으니까. 초장부터 희망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우리는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어디로 갈지 말하지 않아도 갈 곳이 정해진 것처럼 라리는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지금은 정신을 차린 건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걷고 있다.

고아원때의 모습이 떠올랐던지라 어쩐지 마음이 두근두근한다.

‘그래도…… 그곳에서 힘들긴 했지만 꽤 즐거운 기억이었던 거 같네. 그게 떠오르면서 이렇게 즐거운 거 보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우리들끼리 즐거웠던 시간들. 앞으로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은 시간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만큼 머릿속에 소중히 남은 기억들은 없다.

‘적어도 로헨과 라리도 이런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내게 바짝 붙어서 뛰어오는 로헨을 바라봤다. 이곳에 온 후 어지간해선 무표정으로 지내왔던 로헨의 얼굴도 아까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그냥 좋아서. 이렇게 셋이 있는 시간들이…… 너무 소중해서. 나만 그런가 하고 봤어. 그런데 로헨의 얼굴도 비슷해 보이네.”

“뭐…… 좋긴 좋지. 아, 뭐 네가 좋다는 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뛰는 시간이.”

말끝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웅얼거리던 로헨은 어느새 나를 앞장서 버렸다. 얘네들은 내가 이제 겨우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나.

그래도 내 몸의 회복력은 일반 아이를 넘어서는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못 일어나던 몸은 어느새 걷고 뛰고 있었다.

‘언제나 회복력 하나는 기가 막혔지.’

누군가 회복 포션이라도 먹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아팠다가도 금방금방 낫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내가…… 그랬었나?’

그때. 또 내 기억인지 아닌지 모를 기억들이 혼합되어 들어왔다.

어릴 적에 크게 아팠던 적이 있었나. 그랬던 적이 없던 거 같은데. 왜 자꾸만 나는 이상한 생각들을 확정적으로 해버리는 거지.

순간 머리가 아파 왔다. 이상한 꿈을 꾼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왜 그래?”

“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어.”

“아…… 아니야.”

지난번과 달리 머리 아픈 건 금세 괜찮아졌다.

“그런데 뛰는 건 괜찮아?”

“응! 이상하게 금세 몸이 회복되었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럼 다행이고. 어서 가자.”

참 이상했다.

아팠던 적이 언제였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 상태는 점점 더 좋아졌다. 머리 아픈 게 사라지고 나니까 뛰는 것도 가벼울 정도였다.

그때였다.

“누나.”

“응?”

“이런 시간들 내가 계속해서 만들어 줄게. 이런 소중한 시간들.”

“얼른 와! 다 왔어!”

“어?”

로헨이 무어라고 말하던 그 타이밍에 맞춰 앞으로 후다닥 뛰어갔던 라리가 소리를 질렀다.

“어…… 응! 그런데 로헨, 뭐라고 했어?”

“아니야. 얼른 가자. 라리가 기다릴라.”

“으응…….”

결국 우리는 숲속 깊은 곳에서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마치 이곳에만 햇빛이 스며드는 듯 울창한 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연못 위에 나무만 휑하니 비어 있었다.

아주 작지도, 그리 크지도 않은 연못.

주변에는 꽃들이 가득했고, 푹신푹신한 풀들이 연못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와, 예쁘다.”

“그렇지, 언니! 여기는 나도 얼마 전에 찾은 곳인데, 사람도 오지 않고 좋아.”

라리는 만족스러운 듯 연못 주변을 돌다가 근처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곳에 자주 오는 듯 라리가 앉은 그 근처 풀들만 숨이 죽어 있다. 라리의 옆에 주저앉자 로헨도 우리를 따라 털썩 주저앉았다.

“시녀들이 너를 따라오거나 하진 않아?”

“응! 그냥 시간 맞춰 돌아오라고만 했어. 옷이 더러워지면 조금 뭐라 하긴 하는데, 그래도…… 뭐라 하는 사람은 크게 없어.”

해맑게 웃는 라리의 볼을 쓰다듬었다.

“라리.”

“응?”

“이제부터 누가 뭐라 하면 같이 뭐라 해.”

“그래도 돼?”

라리는 통통하고 동그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미역처럼 움직이는 머리카락이 참 귀엽다.

“응. 라리. 있잖아. 라리도 로헨도 이 가문에서 인정한 진짜 자식이잖아. 그러니까 예전처럼 주눅들 필요도 없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그냥 지켜볼 필요도 없어.”

“우웅…….”

“너희들은 누구보다 소중한 아이들이야. 귀한 아이들이고.”

“누나, 너도 마찬가지야.”

“응?”

내가 라리를 다독이고 있자, 로헨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툭 뱉었다.

“그러니까 우리들만 귀하고 우리들만 소중하고 그런 말 하지 마. 우리가 소중하면 그런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너도 소중한 사람이니까.”

“어…… 응…….”

“맞아. 언니야는 소중한 사람이야! 오빠도 나도 언니야 없으면 안 돼. 그러니까 언니도 언니를 소중히 여겨.”

“……응!”

하지만 너희들과 나는 태생적으로 다른걸.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부모가 찾지도 않는 아이인 나. 소설이라는 세계관에서도 아주 작게 언급돼 있는 게 전부인 나와 너희들은…….

‘대공이 표현을 잘 하지 못해서 그렇지, 누구보다 너희들을 아끼는 건 맞아. 그 사랑이 과한 면들도 있지만. 거기에 너희들을 낳은 엄마도 어떻게서든 너희를 지키고 싶어했으니까.’

난 두 아이들의 손을 꼭 잡았다.

“응. 우리는 소중해.”

그때였다.

라리가 주변을 살피다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풀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눈만 깜짝였다.

“라리?”

“여기는 언니가 좋아했던 산딸기가 있어. 그리고 언니가 좋아하던 감자도 여기다 심어 놨어. 있잖아. 언니, 예전같이 누가 우리 미워하면 여기로 숨으면 돼.”

그러더니 양손 가득 산딸기를 들고선 토끼처럼 폴짝 뛰어나왔다.

“이거 먹어. 엄청 맛있어.”

라리는 우리 옆에 앉았고, 난 라리가 내민 산딸기를 한 개 집어 먹었다.

“맛있다.”

“응! 그렇지.”

그러면서도 아직 시선은 주변을 향해 있었다.

대공가에 인접한 숲.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대충 가늠이 간다. 대공가로 가는 길목에 있는 거대한 숲.

딱히 누군가의 소유는 아니지만, 제국민들은 이 숲을 대공가의 숲으로 여기고 출입하는 이들이 없었다.

딱히 위험한 동물도 없었지만, 간간이 이곳에 들어갔다가 실종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만 전해 오는 곳.

소설 속에도 이곳에 대한 언급이 살짝 스쳐 지나가긴 했다.

대공가에서 온갖 악행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소문이 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 출입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쌍둥이 흑막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집처럼 찾곤 했다.

여주를 납치해 데려온 곳도 이 숲이었다.

어머니의 숲. 숲의 중앙으로 가면 갈수록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곳. 하지만 숲의 겉면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것처럼 매우 위험한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과거와 이건 같구나. 너희들은 이곳을 안식처로 삼아 자주 오게 될 거야. 이곳에만은 너희들을 위협하는 이들은 없으니까.’

짐승처럼 소리와 냄새에 예민한 아이들이 숨기 딱 좋은 곳.

“아무도 오지 않아. 그리고 내가 막 나오는 거 이것저것 다 묻어 놨어!”

라리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지트라…….”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피해 올 수 있는 곳. 난 근처의 나무를 살폈다.

아름드리나무가 가득한 곳. 워낙 울창한 숲이었기에 나무들은 죄다 거대했고, 푸르렀다.

“저 나무 위에 아지트를 만들면 좋겠다.”

“아지트?”

“응! 나무 위에 나무 집을 짓는 거지. 천장도 만들어서 거기에 비상식량도 가져다 놓는 거야. 비가 와도 그곳에 있을 수 있게. 예전처럼 오는 길에는 작은 표시를 해놓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같은 곳에 있지 못할 때도 여기에서 만날 수 있게 하는 거야.”

그냥 꿈 같은 말이었다. 그런 게 있으면 아이들에게 마음의 안식처 같은 곳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으니까.

솔직히 그런 곳이 생긴다 한들, 나는 올라갈 수 없다. 인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무를 잘 타는 라리, 로헨과 달리 나는 나무를 못 타니까.

“아지트……라.”

“언니야. 그런 멋진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

“그냥 책에서 봤어, 책에서.”

라리와 로헤이 동시에 나무 위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괜한 말을 한 것인가.

푸념하듯 뱉은 말이었는데 둘이 꽤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만들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나는 급히 말을 돌렸다.

“그보다 이런 곳도 찾아내고 라리 멋진데?”

“헤헤. 근데 사실 요새 자꾸 잠이 늘어서 여기 못 왔었어. 여기 와서 깜빡 잠들었다가 저녁 늦게 돌아간 적이 있거든.”

“그랬어?”

“응! 그래서 시녀들이 난처하다고 했었어. 난처하게 만들면 모두가 날 미워할 거라고 다신 그러지 말라 해서 못 왔었어.”

“혼낸 거야?”

라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때리진 않았으니까 혼낸 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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