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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36)화 (36/99)

-36화- 

아닌 게 아니라 보육원에 있을 때는 안 그랬던 라리는 잠에 잔뜩 취해서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여기 와서 그런 거야?”

“우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요새 너무너무 심해. 눈이 안 떠져…….”

어디 아픈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라리의 상태는 꽤 심각했다.

“진료는 받아 봤어?”

“웅. 괜찮다 해써!”

하지만 라리는 정말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볼 때는 조금 심각했다. 잘 먹고 잘 자서 살이 찌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요 며칠 지켜본 바로는 밥도 잘 안 먹고 잠만 자느라 정신없었으니까.

‘일반적이지 않은데.’

하지만 로헨도 라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이상한 걸 느낀다 한들 진료까지 받아 봤다 했기에 다른 말을 더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 이상할 정도다.

‘마음 같아선 다른 의원의 진료를 받아 보게 하고 싶은데.’

그러다 책 속에 잠깐 언급된 이야기가 떠올랐다. 라리가 어린 시절 크게 아팠다는 이야기. 그로 인해 로헨의 성격은 더 예민해졌다고.

‘원래 몸이 좋지 않았던 걸까. 책을 생각하면 그렇지만 좀 이상해. 고아원에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라리야. 다른 이상한 건 없어?”

“우웅…… 정말 잠만 와. 하암.”

자면서 걷는다는 말이 뭔지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라리는 비틀거리면서도 로헨과 내가 움직이는 대로 잘 걸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방에서 쉬는 게 나을 거 같긴 한데.”

그 말에 라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럴 순 없어! 내가 여기 다 안내할 거야! 내가 먼저 와서 엄청 비밀스러운 데 많이 찾아 놨어어어.”

하지만 금세 잠에 취한 듯 눈이 감긴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기엔 이상이 심하게 있는 것만 같다.

“나 갈 거야. 언니야한테 안내하러 갈 거야, 구로니까아…… 말리지 마아…….”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말릴 방도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라리가 소개해 줘.”

“웅!”

나가겠다고 박박 우기는 통에 결국 난 라리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던 그때였다.

방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익숙한 사람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제프리였다.

“아. 왜 찾아왔어요?”

로헨이 먼저 적대감을 내비치기 전 내가 적대감을 내비쳤다. 내외부적으로는 참 좋은 사람. 모든 이들에게 잘하고, 굴러온 돌멩이인 쌍둥이들에게도 잘했던 사람.

‘그래서 쌍둥이들이 누구보다 의지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쌍둥이를 론보다 더 머리 아프게 만든 사람이지.’

쌍둥이들은 그를 좋아했다. 딱히 맘 둘 곳 없는 대공가에서 누구보다 친절했던 이니까. 그래서였을까, 쌍둥이들은 제프리에게 마음을 꽤 연 상태였다.

그가 원하는 일이라면 어지간해선 다 들어줬으니까.

제프리는 대공가의 적자임에도, 현 대공비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공비나 론에게는 물론이거나와 대공가의 사용인들에게조차 무시를 당해 왔다.

그래서 그는 쌍둥이들이 모두 자란 뒤, 대공가를 그들이 먹자마자 자신을 무시했던 이들을 쌍둥이들에게 해결해 달라 했다. 모두 다 죽여 달라고. 거기에 대공가에 관심이 없던 아이들을 대신해 자신이 대공의 자리에 올라서려 했다.

‘만에 하나 대공이, 자신이 죽은 뒤에 아이들을 대공으로 올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들은 이용만 당했겠지.’

갑작스러운 대공의 죽음.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너무나 건강했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이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에는 역시나 수상쩍은 일들이 가득했고, 모두들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가졌다.

‘그가 남긴 유언 때문에도 꽤 골치 아팠지만.’

대공이 남긴 유언이라고는 하나 대공비가 너무나 잘 살아 있던 탓에, 그녀를 따르는 무리들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막 성인이 된 쌍둥이들은 무력으로 그들을 하나씩 무찔러 냈다.

말이 무찔러 낸 거지 모두 도륙 내버린 거지만.

어쨌든 그런 와중에 저 하나 살겠다고 갑자기 제프리는 군에 자원 입대를 해버렸다. 그렇게 떠났고, 1년 만에 모두를 도륙 내버리자 제프리는 그제야 돌아와서 은근슬쩍 그 자리를 탐냈지.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친한 척이야?’

아니, 이제 와서가 아니라 벌써부터 친한 척이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난 눈을 작게 흘겨 그를 노려봤다.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 웃는 얼굴에 자신의 속마음을 감춰 둔, 악마 같은 인간.’

이 집안에서 쌍둥이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대공 정도인데, 그는 사랑을 주는 방법도 모르고 분란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는 인간이니.

그나마 쌍둥이들을 안타깝게 여긴 몇 명의 사용인들이 이곳에 있을 뿐이다. 소설 속에도 언급되는 이들. 내가 할 일은 대공의 신임을 얻어, 쌍둥이들을 돌보는 일의 전반을 내가 하면서 그들을 데려오는 거겠지.

“왜 찾아왔냐니. 그저 너희들이 보고 싶어서 온 것일 뿐.”

“그런가요.”

“그래. 이 가문에서 불순물 같은 존재들끼리 잘 지내면 좋지 않을까? 로헨, 라리, 그리고 아이샤.”

난 그런 그를 향해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요. 불순물 같은 존재 아닌데요. 얘네들은. 설사 그렇다 해도 그리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요.”

우리를 보호하려는 듯 앞서 나선 로헨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과연 얘네들도 그리 생각할까?”

그런 내 모습이 흥미로운 듯 제프리는 한쪽 입술만 끌어 올렸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고 쓰여 있던 것과 달리 그의 감정은 꽤나 솔직해 보였다.

그리고 가만히 우리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리가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언니야의 생각이 우리 생각이야.”

“맞아.”

“호오. 생각보다 쌍둥이들이 너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아이샤.”

누가 보면 엄청 친한 사이인 줄 알겠네. 그래 봐야 지난번에 한 번 본 게 전부면서 제프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그래서요?”

“뭐. 좋지. 쌍둥이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있는 건. 하지만 말이야, 결국은 널 쌍둥이들이 지켜 줘야 하겠지. 대공가에서 말이야, 지켜 줘야 하는 상대가 있는 만큼 약점이 되는 것은 없거든.”

“누군가에게 보호받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시비를 걸려고 온 건가요?”

“그럴 리가. 그저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에서 온 거지.”

말은 그리했지만, 그의 표정이 내내 좋지 않음이 느껴졌다. 뭔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짜증이랄까.

“그래요? 그러면 그대로 가시면 되겠네요.”

“뭐……?”

“친하게 지낼 마음 전혀 없거든요.”

아이들의 어린 시절부터 문제가 될 만한 모든 것들을 다 사전 차단할 거다. 그래야 내가 없어진 후에도 그나마 과거보다 덜 힘들 거니까.

쌍둥이들에게 힘든 기억, 슬픈 기억 무엇 하나 남기지 않을 거다. 다른 아이들처럼 사랑받은 기억만 남을 수 있게,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 즐거웠던 것들만 남을 수 있게.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는데, 제프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정말.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이구나. 그대로 가라니. 친하게 지낼 마음이 없다니. 하지만 내가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건 쌍둥이들인걸.”

“우리는 언니야의 뜻대로 할 거야.”

“바보처럼, 인형처럼 그리 굴 거라고?”

제프리는 열심히 입을 움직이는 라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 인형…… 아닌데. 라리는 인형 아닌데…….”

“그러면 주체를 가지고 살아.”

“이미 충분히 주체가 있는 아이들이야. 괜한 말로 현혹하려 하지 마. 도리어 억지로 비슷한 처치니 뭐니 해서 아이들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는 건 당신이잖아요.”

좋은 말이 나갈 수가 없다. 난 라리를 꼭 껴안으며 그를 노려봤고, 그제야 제프리가 씩 웃었다.

“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희들을 도와줄 수 있는 건 나뿐일 거야. 이 가문에서 너희들을 긍정적으로 보는 건 나뿐일 테니까.”

“네네.”

“그리고 아이샤. 너도 이곳에 오래 있고 싶다면, 어지간해선 말투부터 고치는 게 좋을 거야.”

소설에서처럼 멋진 일이 없을 거라는 건 잘 안다.

고위 귀족 가문에 갔더니 모두가 날 사랑해 준다, 이딴 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일이다. 그런 마법 같은 일은, 내게는 벌어질 리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러기에 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요.”

“그래. 뭐 어찌 되었든 좋게 생각하길 바라.”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반응이 올 거란 걸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그는 지나가려는 우리 앞을 다시금 막았다.

“만에 하나 계속 지금처럼 아이들에게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면 말이야, 나는 아이샤 너를 내쫓는 이들의 말에 동의하게 될 거 같거든.”

“협박하는 거예요?”

“응.”

해맑게 웃으며 긍정하는 그의 모습에 순간 황당함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잘 지내보자고. 그럼 바빠 보이는데 난 물러날게.”

그렇게 사람 속을 실컷 긁어 놓은 그는 혼자서 결론을 내리고선 몸을 돌렸다.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말해 봤자 짜증만 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자.”

“저대로 보내도 괜찮아?”

로헨은 그런 제프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을 아주 작게 흘겼다.

“응. 괜찮아. 쓸데없는 인간이 하는 말이니까 무시해도 돼. 조금도 뜻대로 해주지 않을 거거든.”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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