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뭘 하기는. 우선 당장은 그 사람이 낸 숙제를 풀어야겠지. 그후에는 너희들에 대한 모든 걸 일임할 거야. 누굴 만나고 어떤 걸 하고 무엇을 배우고 이런 것들.”
“……그런 것까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가 애도 아니고.”
“애야. 내 눈에는.”
그 한마디에 순간 로헨의 표정이 달라졌다. 애 취급한다고 바로 뭐라 할 줄 알았더니, 도리어 입술만 삐죽거렸다.
“너도 애야.”
“뭐?”
“누나, 너도 애라고. 키도 쪼고만 한 게. 나, 남들이 보면 네가 엄마라도 되는 줄 알겠네.”
마음속으로는 이미 엄마고 누나고 가족이고 전부다. 순수하게 너희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 나쁜 의도 하나 없이 그러길 바라는 사람.
“어어. 그냥 이른 나이에 애 생겼다고 생각할래.”
“난 싫어.”
“뭐?”
“엄마 싫다고. 가족도 싫고. 아니 가족 같은 사이는 좋은데, 가족은 싫어.”
혼자 우다다 말한 로헨은 다시금 말이 없어졌다. 때마침 방문이 열렸다. 마치 내가 일어난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긴 다리로 뚜벅거리며 대공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좀 괜찮아졌나 보군.”
대공은 이전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첫날 그렇게 본 이후에, 처음 보는 그는 첫날보다는 조금 변한 듯싶다.
하지만 말없이 날 보는 그의 시선은 절대 긍정의 의미가 담겨 있진 않았다. 그래서 앉은 채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며 나름의 변명을 했다.
“어음…. 그러니까 이 방에서는……”
“…난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방에선 곧 물러나겠다고 이야기하려는데, 그의 입에서는 역시나 예상대로 한 대 때리고 싶은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아저씨.
마음 같아서는 그리 말하고 싶었다. 사사건건 날 볼 때마다 시비 거는 인간에게 잘해 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갑을병정에서 을… 아니……. 병… 아니……. 정… 아니……. 논외의 인간이다.
대공이라는 자가 손가락 까딱하면 당장 내쫓겨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
“알죠.”
“…보통 이런 말하면 애들은 울먹거리던데.”
아, 내가 그러길 바라는 건가. 난 가만히 침대에 앉아 그를 바라봤다. 울고 싶어도, 상처받은 척하고 싶어도 그의 말에는 조금도 감흥이 없는걸.
“아쉽게도 별 타격이 없어서요.”
“들을 때마다, 볼 때마다 참 신기한 아이야.”
“그런 말 많이 듣긴 하죠. 어쨌든 내가 이곳에 있는 건 죄송합니다.”
뭐 나도 딱히 원해서 이곳으로 온 건 아니잖아. 내가 쓰러졌고, 기억에도 없는 일인데, 그것까지 내가 이리 욕먹어야 하는 일인가.
“그런데 죄송한 건 죄송한 건데…….”
“그다음은?”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나도 모르게 본성이 튀어나왔다. 말끝을 흐린다고 흐린 건데 이때를 놓치지 않는 듯 대공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아니. 뭐. 그렇다구요.”
“…정말 한마디도 지지 않아. 재미있어.”
내내 굳은 표정이었던 대공의 얼굴이 밝아진 건 그때였다. 무 잘라먹듯 말을 툭 잘라버린 나를 보며 성질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팔짱을 낀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조건적으로 미워해야 하는 존재라 생각했는데, 꽤 재미는 있어. 물론 너 때문에 내 아들과 언쟁이 오갔던 일 때문에 그리 기분이 좋진 않지만….”
“아……. 네.”
“몸은 괜찮은 건가.”
“얘한테 또 시비 걸려고 하는 거지.”
그때. 로헨이 나와 대공 사이에 껴들었다. 팔짱까지 낀 로헨은 불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시비 거는 게 아니다.”
“그럼 아픈 애한테 뭐하는 건데. 지난번처럼 죽을병이라는 둥, 전염병 아니냐는 둥 그런 소리 하려는 거잖아.”
“글쎄.”
“하지 마. 애가 피죽도 얻어먹지 못한 것처럼 불쌍하게 빼빼 마른 것뿐이야. 좀 구걸할 것처럼 없이 생긴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로헨. 네가 제일 나빠.
내가 조금 마르긴 했지만, 없이 생겼다니. 충격에 입만 벌린 채 로헨을 바라봤다. 하지만 자신이 한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듯 로헨은 대공을 노려보기 바빴다.
대공이 들어온 이후 자리에서 일어나있던 라리가 로헨의 말에 함께 고개를 끄덕인 것 또한 충격이다.
“그렇긴 하지. 기품따윈 하나도 없어 보이기는 하지.”
아 진짜. 이놈이나 저놈이나. 누가 부자 아니라고 할까 봐 아주 똑같다. 사람 상처 주는 방법이. 물론 거기서 내가 더 할 말은 없었기에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조금 살찌면 볼만한데.
‘크면 그래도 미인이란 소리는 듣고 다녔…….’
순간 내 모습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내가 생각지도 않은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내가 큰 모습이 어떤지는 소설 속에서 나오지도 않아서 모르는데, 미인이란 소리를 듣고 다닌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놀란 마음에 급히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기분은 묘했다. 그 꿈 때문에 단순히 그런 건가 생각했지만 갑자기 머릿속에는 다 성장한 후에 내 모습이 그려지는 듯 했다.
허리까지 오는 굽이치듯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 반짝거리는 분홍 눈동자. 날카롭게 빠진 턱선과 오뚝한 코. 딱 봤을 때도 예쁘다는 인상을 주는 얼굴. 그게 바로 내가 기억하는 내 미래의 모습이었다.
지금 내 모습에서는 절대 상상도 못 할 미래의 모습.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비쩍 마른 몸에 퀭하게 파인 볼. 볼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그 모든 게 내 현재의 모습이었으니까.
“충격받은 건가.”
내 스스로 떠올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우물쭈물하던 그때, 대공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추, 충격은 아니고…….”
“스스로 알고 있단 건가.”
“어쨌든…. 방에서는 곧 나갈게요.”
“…….”
잠시 그가 로헨을 바라봤다. 마치 어떻게 하길 바라냐는 말을 하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명백하게 변했다. 내가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 수는 없으나 로헨의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 팍팍 든다랄까.
“너 나갈 필요 없어. 이 방에서 이제 셋이 지낼 거야. 열 명이 누워 자도 될 정도로 침대도 넓은데, 뭐하러 나가.”
“그렇다고 하는군.”
“…그게 끝……이에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지. 내 아드님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뭐지. 정말 이렇게 바뀐다고. 내가 없는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렇대. 그니까 자꾸 헛소리하지 말고 여기 있어. 일어나지도 말고.”
“어……. 아니 정말 있어도 되…나요?”
“편할 대로 하도록. 나는 여전히 네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더군.”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이건가. 드디어 아이들을 향한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자신의 마음을 안 건가.
“그래요?”
“아주 짜증 나더군. 쨍알쨍알. 본인이 원하는걸 이룰 때까지 짜증은 또 어찌나 내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공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져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듯했지만, 꽤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보였다.
“그렇구나. 아빠 닮았나 보죠.”
“…….”
“자식은 원래 아빠 닮는 거 아니겠어요. 어찌 되었든. 그런 말을 하러 온 건가요?”
“겸사겸사. 혹시나 그사이 병이라도 있는 게 밝혀지면 안 되니까. 그래서 온 것뿐이다.”
말은 세상 나쁜 사람처럼 했지만, 걱정해서 온 거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왜?’
그 의문만이 떠올랐다. 끝까지 대공은 이런 사람이 아녔는데. 자기 자식들에게 원하는 걸 다 해줬을 뿐, 감정적인 교류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냉혈한. 얼음. 그런 말이 어울렸는데 지금 보니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아니면 변한 건가.’
“왜 그렇게 쳐다보지.”
“아니 그냥… 신기해서요.”
“신기하다?”
“아, 아녜요. 어쨌든 이곳에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앉아 있는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흠흠 목을 가다듬던 대공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몸을 휙 돌렸다.
“알면 되었다. 그리고 몸이 나아지는 대로 신전으로 갈 테니 그것도 준비하도록 해.”
“아.”
“신전에 가서 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물론 그때 약속한 건 잊지 않도록 하고. 아프더라도, 몸이 회복되지 않더라도 그건 해야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잊지 않고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꽤나 고민하고 있는 상태니까.
“그럼 쉬도록.”
그 말을 끝으로 대공은 몸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뭐 대단한 말을 할거라는 예상과 달리 허탈할 정도로 그는 별말 안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라리가 날 꼭 껴안았을 때쯤의 일이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우리는 더 자자. 언니 껴안고 코코 잘래!”
“아. 오늘은 그래도 외출이라도 해볼까 하는데.”
“난 시른데. 언니랑 이렇게 뒹굴뒹굴할 건데!”
“그래도. 오랜만에 바람 좀 쐬고 싶어.”
내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로헨이 내 앞에 섰다.
“이번에는 막아도 갈 거야. 좀 답답하단 말야.”
“……고집은.”
“고집이라 해도 갈래. 로헨이 같이 가주면 괜찮지 않을까.”
원래라면 진작 이 가문의 상황을 파악했어야 했는데, 도리어 늦은 편이었다. 며칠 동안 누워 있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어? 내가?”
“어. 로헨이 부축해주고 옆에 있어 주면 별일 없겠지.”
“…아. 그렇지. 흠흠. 내가 좀 든든하긴 하지. 알았어. 그렇게까지 원하니까 내가 같이 가줘야겠네.”
내 말이 마음에 드는 건지 로헨은 갑작스레 어깨를 쭉 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가지.”
“그래.”
며칠 동안 누워 있었던 것 때문인지 생각보다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어느 정도 예상한 건지 한숨을 푹 내쉬던 로헨은 단단한 팔로 내 팔을 잡았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럴 줄 알기는. 나 괜찮거든. 그보다 로헨이나 라리는 대공가를 좀 살펴봤어?”
“뭐 살펴볼 게 있나.”
“그래도 가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뭐 그런 것들?”
“당연히.”
“오오. 그러면 나 구경 좀 시켜줘.”
졸린눈을 비비며 일어난 라리는 품에 양 인형을 든 채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응응. 근데 언니야. 나 자꾸만 졸려. 요새 자도 자도 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