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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33)화 (33/99)

-33화- 

“맞아. 언니야 괴롭히는 건 우리만 할 수 있어. 언니야는 우리 거야!”

라리까지 한마디 보탰다. 그럼 그렇지. 쌍둥이들에게 있어 나는 물건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니까.

‘참 고맙네.’

“네…….”

시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로헨은 꽤 뿌듯했던 건지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 전 시녀들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눈으로. 마치 ‘나 잘했지?’라는 감정을 여실히 보여 주는 듯했다.

“흠흠.”

내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자, 로헨은 칭찬을 기다리는 것처럼 목을 가다듬었다.

“아이샤.”

“어.”

“할 말 없어?”

“응. 없어.”

“왜. 방금 나 되게 멋졌던 거 같은데.”

이럴 때는 꼭 아이라니까. 스스로 멋지다고 하는 로헨을 보며 결국 난 참고 있던 웃음을 뱉어내고 말았다.

“왜 웃어!”

“귀여워서.”

“나 안 귀여워. 나 되게 멋져.”

“멋진 사람은 말 안 해도 알아서 멋져 보이는 거야.”

그 말에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로헨이 아,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대공처럼?”

“어?”

“그러고 보니. 아이샤. 대공을 보는 표정이 조금 묘했어.”

“아닌데.”

“아니긴.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팔짱을 낀 로헨은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건 좀 억울한데. 억울하다 해 봤자 로헨은 들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정말 아닌데. 뭐 맘대로 생각해.”

대공에게 표정이 묘했던 건, 저 미친놈이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 날 죽여 버릴까 봐 나름 조심한다고 한 건데. 이런 걸 알 리 없는 로헨의 미간에는 어느새 깊은 주름이 졌다.

“어쨌든 배고프지 않아? 여기서 계속 서 있을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배고프다.”

“언니야. 라리도 배고프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 들어오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도 여기저기 아파 오고, 배도 고팠다. 마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했던 것도 있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기운이 하나도 없다.

로헨이랑 말다툼을 할 힘도.

“그러면 씻고 나서 바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건지, 방금 전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녀가 냉큼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우리가 더러워 보였나 보지.’

배고프다 했으면 바로 식사를 준비해 줄 법한데, 그들은 꽤 단호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에 들어오고 나니 우리 몸에서 냄새마저 나는 기분이다. 언제나 헌 옷을 돌려 입었으니 당연한 거다.

“그럼 우리 씻으러 가자. 라리. 로헨.”

“난 나중에 씻을 거야. 둘이 먼저 씻고 와.”

그 말에 시녀가 매우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씻도록 도와드려도 될까요.”

“응! 난 언니야랑 함께할 수 있으면 뭐든 좋아!”

“그래. 그럼 씻으러 가자.”

그제야 라리는 내 손을 잡고 다시금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우리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엄청 크네.’

소설 속 몇 줄로 언급된 욕실의 풍경. 커다란 창을 통해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고, 그곳에서 조금 거리를 둔 곳에 몇 명이 들어가도 남을 만큼 커다란 탕이 놓여져 있었다. 공기를 가득 채우는 따스한 수증기의 향기는…….

‘왜 익숙한 걸까.’

글자로만 봤을 뿐인데, 이런 호사를 누려 본 적도 없는데 이상하게 현재의 상황을 어디선가 겪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나와 라리의 옷이 벗겨졌다. 분명 보는 시야는 달랐지만, 이런 종류의 욕실에 분명 온 기억이 있다.

‘뭐지…… 왜지.’

눈앞에 드리운 희뿌연 수증기처럼, 무언가에 가려져 버린 듯한 기억들. 아무리 들여다보려 해도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지난번부터 들어버린 묘한 감정. 그게 또 가슴 어딘가를 쿵쿵 울렸다.

내 감정인데 내 감정이 아닌. 아주 깊은 곳부터 느껴지는 그 원초적인 감정들.

그게 다시금 불쑥 튀어나왔다. 감정과 기억이 서로 엉켜버린 것처럼, 그 감정들이 튀어나오자 묘한 풍경이 눈앞에서 서로 엇갈렸다. 본 적 없는 기억과 본 적 있는 기억.

‘이게…… 뭐지.’

“언니? 물 받아져 있어! 이제 들어가면 돼!”

해맑은 라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여야 하건만, 몸은 마치 남의 것이라도 된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잘만 말하던 입술도. 아니 숨 쉬는 것조차 힘들다.

“하…. 하…….”

숨을 제대로 못 쉬어서인지, 갑작스레 눈앞이 희뿌옇게 변해갔다. 욕실 안에 있는 모든 수증기가 내 앞으로 와버린 것처럼, 눈앞이 보이질 않는다.

“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얼굴이 하얘!”

아니야. 난 괜찮아. 그냥 숨이 안 쉬어져. 그 말을 해야 하는데, 하얀 수증기가 가득해졌던 시야는 어느새 검게 변했다.

그리고 난 느꼈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서 있던 내 몸이 옆으로 쓰러지고 있단 사실을. 누군가가 받아 준 것 같긴 하지만, 내 몸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녔다.

“언니……!”

놀란 라리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렇게 기억은 툭 끊겼다.

***

다시금 정신이 돌아온 건, 천천히 시야가 밝아지면서였다. 아까보다 훨씬 맑아진 시야.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방금 전 보던 풍경과 매우 다른 것이었다.

머리가 닿을 듯 낮은 천장. 알 수 없는 지독한 냄새가 가득한 곳. 허름한 움막.

대공가의 욕실과는 확연히 다른 곳.

그리고 그곳에 있는 건 나 혼자만이 아녔다.

[정신 차려라. 아이샤.]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난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내 이름을 어찌 알지? 이건 꿈인 건가? 아니면 현실. 구분이 가기도 전에, 내 입에서는 자연스레 소리가 흘러나갔다.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원장님…!]

내 목소리도 아녔고, 내가 의도한 말도 아녔다.

마치 영화가 상영되듯 눈앞에 갑작스레 보이는 모습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녔다. 그저 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성난 내 목소리. 그리고 차분하지만 잔뜩 화나 있는 다른 여인의 목소리.

이게 꿈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꿈인 걸 알아 내고 나서야 난 그 속의 내용을 천천히 각인했다.

[그럼 이대로 넘어가라고? 절대 안 된다. 다 죽여버릴 거야. 너도 정신 차려. 그놈들 때문에 너와 자라던 애들이 모두 죽었는데, 그 시체들을 보고 자랐으면서 이제 와 착한 척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하, 하지만…. 그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존재 자체가 잘못이야!]

순간 내 눈앞에 보인 건 얼굴의 반 이상이 화상으로 녹아내린 비쩍 마른 어느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 눈에 든 독기는 보통의 여인이 아닌 것만 같다.

거기에 익숙한 목소리.

‘설마…. 설마. 보육원장?’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외향적인 건 그녀가 확실했다.

[그렇다 해서… 그렇다 해서…… 그 아이들에게…….]

[다른 걸 하라는 게 아니잖느냐. 그저 그곳에 가서 그 아이들을 지켜보라는 것뿐이지.]

[…….]

[아마네트. 내가 널 어찌 키웠는지 알지? 죽을 뻔한 상황에서 널 구해 준 게 누군지, 이날까지 널 키워 준 게 누군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꿈속에서의 내용은 내가 어찌할 순 없었지만, 간단하게 몸을 움직이거나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들려진 손은…. 아이의 손이 아녔다. 성인 여성? 적어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이의 손이었다.

[아….]

[착한 네가 그런 일을 부담스러워하는 건 알지. 알다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면 나는 그곳에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느냐. 하지만 너는 다르지. 그 아이들은 널 기억도 못 할 거다. 출신도 대충 속이면 되고.]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잔말 말고 가거라. 내가 어떻게 널 키웠는지 안다면. 대공가로 가!]

그 말에 꿈속에서의 내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여졌다. 덜덜 떨리는 손은 어느새 치맛단을 붙들고 있었고, 어느새 난 몸을 돌려 집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굉장히 허름한 움막. 그리고 밖을 보자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는 듯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꿈은… 도대체 뭐야. 미래…인 건가? 하지만 난 지금 쌍둥이들이랑 있는데….?’

그러는 사이 난 마차로 올라타고 있는 상태였다. 어느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한 장의 종이만 존재할 뿐. 내 신분을 속이기 위해서인지 가짜 이름과 가짜 가문. 주의해야 할 것들. 온통 그런 것들이 가득 한 종이였다.

이 꿈의 정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어버버거리는 사이 마차는 출발했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천천히 변했다.

‘이곳은…….’

그렇게 보인 밖의 풍경은, 꽤 익숙한 곳의 모습이었다. 꼬부랑꼬부랑 산길을 내려오는 마차가 보여 주는 그 풍경. 지난번 로헨과 함께 불꽃놀이를 봤던 뒷산.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의자. 묘하게 익숙했든 그곳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 잠시…….”

잠시만 멈춰 보라며, 잠깐 볼 게 있다며. 그 말을 하려던 그때, 아마 정해놓은 말이 아닌 다른 말을 해서였을까 주변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직 안 된다고. 확인할 게 있다고. 이 상황이 뭔지, 어떻게 된 건지. 지금 여기는 어디인지 그런 것들을 묻고 싶었지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눈앞은 점점 검게 변해 갔고, 내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화려한 벽지가 깔끔하게 붙어 있는 방 안이었다. 방금 전 보이던 배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

“괜찮은 거야?”

짧은 탄식을 내뱉자 익숙한 머리통 하나가 쑥 하고 튀어나왔다. 로헨이었다.

“어…?”

“괜찮은 거냐고!”

“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멍청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했어야 할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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