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럼 쉬도록.”
그 말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문 쪽에서 기다리던 여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쌍둥이들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 보여주는 듯한 이들의 표정이었다.
예를 지키나, 감정이 없는.
“내 자식들이니까.”
잘 돌보도록. 그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넣은 대공은 이제 정말 가려는 듯 몸을 돌리다가 로헨을 빤히 바라봤다.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나한테 하는 말이야. 뭐. 또 아빠라 부르라고?”
“아니.”
“원하는 대로 지내거라. 그게 너희들이 여기서 해야 할 일이다.”
“원하는 대로?”
“그래.”
예상을 빗나간 말에 로헨은 입만 어물거렸다.
말도 안 되게 사랑한다느니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참 멋없고 재미없고 애정이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그 말이 어떤 말보다 내게 더 강한 인상을 풍겨왔다.
거짓말을 해가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더욱. 더더욱 간질거리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도 뭔가 말하고 나서 좀 묘했던 건지, 더 이상의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자 사용인들은 빠르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예를 지킨다고는 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그들의 예의가 완벽할 리가 없었다.
은연중에 묘하게 그들의 시선이 그래 보였는데, 라리에게 툭 내뱉은 한마디가 내 신경을 마구 긁었다.
“그럼 씻는 걸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웅?”
“따라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가씨.”
이들이 보기에 쌍둥이들은 뒷배도 없는 핏줄일 뿐이다. 진짜 대공의 자식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고, 설사 맞다 하더라도 이미 대공가에는 후계로 낙점된 론이 있다.
그러니 저들이 쌍둥이에게 잘할 필요는 없긴 하다.
하지만 강압적이라니. 대공가의 자제들에게.
순간 주먹에 힘이 빡 들어갔다. 그때 이런 내 맘을 알 리 없는 라리가 내게로 바짝 달라붙었다.
“시러. 나 언니야랑 같이 씻을 거야!”
그 말에 나름 유순한 표정으로 굴던 사용인들 중 몇 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 잘 들으시더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건….”
라리의 커다란 눈동자가 나와 로헨을 번갈아 봤다.
“그냥 따르세요.”
“네. 이렇게 나오시면 이러면 미움 당하실 거예요. 혼날 겁니다.”
“미움 당하고 싶으세요?”
“…….”
어린아이를 상대로 압박을 넣는다니. 생각만 해도 그냥 짜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라리는 안 되겠다 싶은 건지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살짝 놓았다.
“알…….”
알았어. 라는 말을 하려는 라리의 팔을 꼭 잡았다.
이제부터 나쁜 건, 미움 받는 건 내가 할 일이다. 어차피 마주할 이들이고, 어차피 마주할 상황이 빨리 온 것뿐이다. 그래서 난 그들 앞에 바로 섰다.
“그쪽들은 뭐죠?”
“…….”
갑작스럽게 내가 사이에 끼자 시녀들은 굉장히 불편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걸 대답해 말아. 이런 느낌을 여실히 풍겨가며.
“…저희가 대답해야 하나요? 아니. 그 전에 그쪽에게 이런 말을 들을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두 분이 불편해하시는 거면 몰라도.”
네까짓 것한테 이런 말을 들을 건 아니라고. 너는 뭔데 여기서 껴드냐고.
그런 명확한 말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미 사용인들끼리는 그 감정을 내게 여실히 풍기고 있었다. 익숙한 시선들.
이미 보육원에서도, 진짜 내 삶에서도 수많이 받아온 그 시선들을 감당 못 할 게 아녔다. 도리어 그 시간들에 비하면 지금은 굉장히 소소한 편이었다. 그래서 난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요. 말하는 것만 보면 마치 아이들이 나 같은 취급을 당하는 거 같아서요. 귀족가의 자제들 보면 사용인들이 이런 식의 협박은 하지 않던 거 같던데요.”
순간 그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당황하고 있을 때 한 번 더 그들을 더 압박했다.
“아닌가요.”
“그건…….”
“내가 오해하는 건가. 하지만 말이 그렇잖아요. 혼날 거라고? 미움 당할 거라고? 그게 얘네들한테 할 말이에요? 오히려 그쪽들이 더 높은 사람들 같아요. 얘네들을 모실 사람이 아니라.”
내 말에 그들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 말이 저들이 생각해도 진짜니까 그런 거겠지. 아마 대공비가 그렇게 하라 시켰을 것이다. 아이들의 교육이니 뭐니 핑계를 대가며 사용인들을 뽑아 이곳에 넣은 게 바로 그녀일 테니까.
대공 성격에 거기까지 세세하게 신경 쓸 리도 없고, 대외적으로 대공비는 먼저 온 라리에게 잘하는 사람이니까.
‘대공비가 보낸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라리와 로헨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그녀에게 보고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점점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감시와 억압하기 위해 보낸 이들에게 그대로 당해야만 했던 아이들.
소설 속 흑막들이기에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들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24시간 자신들을 감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쌍둥이들은 제대로 자랄 수 없었을 거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들은 일상이 되었을 테니까.
불쌍하게도. 안쓰럽게도. 지켜 줄 어른 없이, 이런 종류의 무시와 억압과 감시가 당연하다고 자랄 아이들. 이젠 내가 그렇게 안 둘 거다.
“…그건 오해입니다.”
“오해라면, 이곳 사용인들은 교육을 잘 못 받은 건가요.”
열 살도 안 된 내가 이야기가 할지 몰랐던 이야기라 당황한 듯 그들은 서로 수군덕거리기 바빴다. 당황했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그래서 난 더욱더 강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그런 말들은 하지 말아줘요. 이 아이들은 당신들이 기죽여서 맘대로 할 아이들이 아니라, 본인들이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는 대공가의 아이들이에요.”
“그건……. 저희는 당연히….”
“끝까지 그렇게 하겠다고는 안 하네요?”
도리어 큰 어른이 아이들과 함께 왔더라면 이들은 이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았을 거다. 대공은 그저 대공비가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있다 생각할 테고, 좋은 거 해 주면 아이들이 알아서 잘 클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 방임들이 만들어낸 아이들의 성격들. 때문에 난 그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정말 저희가 절대 두 분을 어찌하려고 한 건 아니라는 말을…….”
“대답이요.”
“…알겠습니다.”
얼굴이 빨갛다 못해 검게 변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던 사용인들은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의 눈에 어찌 보일지 몰랐던 터라, 저희가 미숙했습니다. 로헨 도련님. 라리 아가씨.”
나를 한참이나 째려보던 이들은 겨우겨우 한 자 한 자 참아가며 말을 뱉어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로헨은 팔장을 낀 채 그들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퍽 못마땅한 듯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왜 얘한테 사과 안 해?”
“……네?”
“얘, 그쪽 아니고 아이샤고, 우리에겐 너희보다 더 중요한 사람인데. 너희가 방금 얘한테도 나쁘게 말했잖아.”
“맞아! 우리한테 나쁘게 군 건 괜찮지만, 언니야한테는 그렇게 하는 거 절대 용서 못 해!”
그동안 잘 먹고 잘 지낸 덕분인지 이전보다 훨씬 말을 잘하게 된 라리가 로헨에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사용인들은 황당하단 듯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저희가…….”
“사과해.”
“사과를… 해야 하나요.”
차마 내게 사과하고 싶진 않았던 건지, 그들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안 한다고?”
“…….”
“명령이야. 사과해. 너희들 우리 명 듣고 일하는 사람들 아냐?”
“마…, 맞습니다.”
“그러니 사과해.”
내가 말할 때는 우물거리던 시녀들이,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억지로 뱉어진 그 말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적어도 이곳에서 아이들이 받는 취급이 최악은 아니라는 걸, 외부적으로는 쌍둥이들의 말을 듣는다는 걸 보여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정말 죄송한 거 맞아?”
“…….”
“얘는, 아이샤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야. 한 번이라도 더 험하게 굴거나, 무시하거나, 아이샤가 이곳에서 나간다는 말을 하면 우리도 이곳에서 나갈 거다.”
“도련님. 그건…….”
마치 대공을 작게 함축해 놓은 듯, 로헨은 아무렇지 않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다른 협박은 통하지 않더라도, 로헨이 이곳에서 나간다는 협박은 꽤나 먹혀들어 간 듯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시녀들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조금 감동을 받으려던 그때였다.
“얜 내 거야. 그러니까 괴롭히는 건 나만 할 수 있어.”
감동은 와장창 깨졌다. 그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