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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31)화 (31/99)

-31화- 

차라리 발이 아프더라도 걸어가는 게 더 낫겠단 생각이 절로 든다. 이게 뭐야. 짐짝도 아니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재미있어 보였던 건지, 눈을 반짝이던 라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도, 나도 그렇게 갈래!”

“네?”

내내 말이 없던 기사는 퍽 놀란 듯 앞서 걸어가던 대공을 빤히 바라봤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대공은 뒤로 슬쩍 다가와서는 라리에게 손을 내밀려 했다. 하지만.

“아니. 나 언니야랑 같이 갈래!”

“그건…….”

“언니야랑 똑같은 거 하꺼야.”

“그러니까 내가 안아 주겠다. 라리.”

“싫어! 언니야랑 똑.같.게!”

아무리 우리가 작고 말랐다고는 하나 다섯 살을 훨씬 넘은 나이인지라, 기사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똑같게……?”

“응. 언니 바로 옆에!”

그 말에 기사와 라리를 번갈아 보던 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나를 안고 있던 기사가 내 몸을 바닥에 내려 두었다.

그러자 대공이 나를 방금 기사가 안고 있던 것처럼 안아 들었다.

“됐나.”

“응! 그럼 나도 안아죠!”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던 라리는 인형을 품에 꼭 안은 채 반대 손을 쭉 내밀었다. 내내 표정이 굳어져 있던 대공의 얼굴이 아주 잠깐 미세하게 풀렸다.

‘정말 사랑스러워서 미친 것처럼.’

미묘한 그 표정의 변화를 모를 리 없다. 물론 바로 표정을 지워버리긴 했지만, 확실한 건 대공 또한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그리 가볍지 않다는 거다.

물론 라리에 대한 거 같긴 하지만.

‘라리는 내가 봐도 사랑스럽긴 하지.’

다행이라는 마음과 어딘지 모를 뿌듯함이 몰려왔다. 물론 양쪽에 다섯 살이 넘는 아이 둘을 든 대공의 얼굴은 시간이 점점 더 굳어졌다.

땀도 조금씩 나는 거 같고.

거기에 우리를 슬쩍 보며 옆에 걷던 로헨은 부러운 듯 입을 살짝 내밀고 있었다.

“로헨도 힘든 거 아냐?”

“어?”

그 말에 아주 잠깐 로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대공은 그 말을 살짝 무시하곤 빠르게 걸을 뿐이었다. 힘들긴 힘든 듯, 여기에 더 추가로 안을 수 없단 것처럼.

뛰는 것처럼 그렇게. 그 덕분이라 할지 우리는 어느새 커다란 건물 앞에 당도했다. 그는 그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급히 내려줬다.

“이제 가도록 하지.”

로헨이 어떤 표정인지 파악도 하지 못한 대공은 그렇게 앞서가고 말았다.

로헨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건 라리도 마찬가지인 듯, 라리는 내 팔을 끼고 질질 끌기 시작했다.

“언니야. 어서 가자. 방이 엄청 넓어!”

“어……, 어. 응!”

그렇게 난 반강제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로헨은 아까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없었다. 다행히 앞서가던 대공은 그걸 느낀 건지 드디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왜 안 오지?”

“가.”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참 좋을 텐데, 대공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선택적 관심인지 뭔지. 결국 스스로 포기한 건지 로헨이 아까보다 더 굳어진 얼굴로 우리 뒤를 따랐다.

라리처럼 차라리 맘 편히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면 좋을 텐데, 로헨이 그렇게 되기에는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

자신이 오빠이기에, 내내 라리를 그렇게 지켜온 로헨은 제 감정을 솔직하게 내비칠 수 없는 어른 아이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난 우리보다 한참이나 뒤처져서 오는 로헨에게 달려가 손을 꼭 잡았다.

“얼른 가자.”

“뭐야. 손은.”

“원래 우리 이렇게 셋이 함께였잖아.”

씩 웃으며 로헨의 손을 꼭 잡았다. 처음에는 부끄러움에, 혹은 불편함에 빼려던 로헨은 어느새 우리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아이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풀어졌다.

고작 이 정도에 금방 마음을 푸는 아이인데. 이렇게나 아이 같은데.

‘왜 몰라줄까. 그저 자세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실상 속은 여리디여린 아이인걸. 때문에 아이를 잡은 손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대공은 2층으로 올라갔고, 중앙에 있는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여기다.”

꽤 많은 사용인들이 문 앞에 즐비하게 서 있었다. 우리가 등장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연 그들 덕에 우리는 바로 방 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들어가는 그를 따라 놀라움을 꾹 참고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마 놀라움은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말하면 보육원 방을 모두 합친 것만큼 크다.

헉 하는 소리가 입으로 나오려다가 겨우 참아졌다. 어떻게 방이 이렇게 클 수 있을까. 심지어 쓴 벽지나 바닥에 깔린 카페트, 천장을 수놓고 있는 아름다운 샹들리에까지 모두가 다 고가로 보인다.

거기에 방 안에는 또 방들이 여럿이 있었는데, 커다란 거실 하나와 딸린 문이 여러 개다. 결국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난 감탄을 뱉어내고 말았다.

“와아.”

정말 감탄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곳이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 듯 로헨도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언니야. 여기야가 내 방이야! 아빠가 그랬는데, 오빠 오면 여기서 같이 지낼 거라 했어!”

“그, 그래?”

“응! 오빠도 맘에 들지!”

제자리에서 방방 뛰던 라리는 내 손을 잡고 여기저기 이끌기 바빴다. 이방은 침실이고, 여기는 옷방이고. 여기는 놀이방이고 또 여기는 빈방이고. 또 여기는 이러면서. 얼마나 방이 큰지 방 안에는 또 다른 방들이 또 존재했다.

여기서 길 잃어버리면 큰일 나겠다 싶을 정도로. 놀랍고 엄청나고. 한참 동안 돌아다니고 나서야 라리는 거실로 나왔다.

“되게 좋지!”

“그, 그러네……?”

“오빠도 좋지!”

“좋기는.”

그 말을 하면서도 로헨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기쁜 게 보이는데 아닌 척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좋아서.”

“……좋아?”

“응, 너무 좋은데.”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로헨은 괜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됐지, 뭐.”

“방은 마음에 드나. 원래 두 개의 방을 준비하려 했지만, 라리가 항상 함께해야 한다더군.”

“뭐. 조금. 마음에 드네.”

“그럼 되었다.”

대공도 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 보이다가 아이들을 지나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아 소녀. 너 또한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도록.”

“여기서 지내도 돼요?”

나를 의심하면서 아이들과 한방에서는 못 자게 할 줄 알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되물었는데, 그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물론 네가 지낼 곳은 여기가 아니다. 저기다.”

약간 감동하려던 찰나, 마치 너의 감동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대공은 방에 딸린 문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아. 그렇죠.”

“설마 이곳에서 지낼 마음을 먹은 게 아니겠지. 아무리 아이들이 좋아한다고는 하나, 너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예예. 알고말고요.

“그래서 놀란 것이에요.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시나 하고.”

“배려라.”

“뭐. 이곳에 지내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죠. 감사해요.”

슬쩍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방을 다르게 쓰게 하면 어쩌지 그런 고민을 했는데,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그래도 방에 딸려 있는 작은 방을 쓰게 해 준 것만 해도 충분한 배려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나름 인사를 한 건데 대공의 조금 많이 묘했다.

분명 여기서 바로 물러날 줄 알았는데, 그는 나가려던 걸음을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그래서 고아 소녀.”

“네?”

“……이름이 뭐지?”

갑자기 내 이름을 물어본다고? 이곳에서 지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의외의 말을 하는 그를 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평생 내 이름은 안 부르고 고아 소녀라고만 부를 줄 알았는데.

“아. 그렇군. 그런 거군.”

“네?”

뭐 혼자 말하고 혼자 결론을 내린대.

“이름이 없군. 그래. 이해하지. 부모도 없는 애가 이름이 없을 수도 있지.”

“아닌데요.”

“응? 아닌가? 이름이 있나? 갑자기 지어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 하나님. 제게 투명 망치를 주신다면, 저 오만하고, 말하는 족족 사람에게 상처 주는 저놈의 머리를 세게 강타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고아라고 해도 이름은 있어요. 아이샤예요.”

“아이샤라. 알았다 고아 소녀.”

이름을 들었으면 이름으로 불러 주던가, 물어보고 나서 고아 소녀 할 건 또 뭐람. 안 그러고 싶어도 좋게 보이질 않는다.

“아, 예.”

그래서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건지 그는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이게 나의 배려다.”

“…아. 네.”

이름을 물어본 게 배려라니. 정말 선을 그어놓고, 너와 나는 급이 다르다고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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