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럼 어디로 가면 돼?”
“…어디로 가다니.”
“내가 그쪽 아들이라며. 그래서 데려온 거 아냐? 여기서 지내라고?”
“맞다.”
오히려 당황한 건 대공 쪽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당황하는 법도 없던 그는 흠흠 거리며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안내하라고.”
“그러도록 하지.”
제 감정을 숨기려는 것처럼 그는 앞장섰고, 그 뒤를 따라가려던 로헨이 내 팔을 잡았다.
“가자.”
“어?”
“왜. 여기서 더 할 말 있어?”
“아니 없어.”
없는데 론은 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아직도 우리에게 시선도 떼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내 표정 관리를 하고 있던 대공비는 이 이상의 관리가 안 되는 듯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가며 론의 어깨를 다독였다.
네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대놓고 로헨을 비난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러했다.
“알았어. 알았는데, 그럼 저건 뭔데. 저 거지 같은 것도 형제야? 쟨 머리 색도 다른데?”
대공비가 달래 주는 덕에 어느 정도 화를 삭인 론의 손가락이 내게로 향했다.
“어?”
“저것도냐고! 도대체 애새끼가 몇인 건데! 난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데!”
“아. 쟤는 아니란다. 우리 가문의 아이가 아냐. 쌍둥이들이 데려오고 싶어 해서, 어쩔 수 없이 데려온 아이란다.”
활자로만 놓고 본다면 꽤 다정한 말들이었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뭐? 뭔데. 그럼.”
“그냥 곧 내쫓길 아이니까 신경 쓸 거 없단다. 우리 아드님. 화낼 필요도, 상종할 가치도 없는 아이야.”
“…….”
“뭐라도 주워 먹으려고 들어온 아이야.”
방금 전까지 로헨에게 말 한마디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던 론은 그제야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아아. 거지새끼네.”
“그래. 그러니까 화내지 말고, 응? 우리 아드님이 화를 내면 이 어미는 마음이 아파 온단다.”
“어어. 알겠어.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진 내가 다 이해해야지.”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결론을 내린 듯 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말 같지 않은 소리들이었고,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이 들던 그때 로헨이 잡고 있던 내 팔을 아까보다 더 강하게 끌었다.
“그럼 가자. 뭐 얼마나 대단한 곳으로 안내하는지 가 봐야 하지 않겠어?”
내내 상황만 살피던 라리도 멈췄던 몸을 움직였다.
“응, 언니야 가자!”
“응. 가자.”
누군가에게 미움을 당하는 것. 그런 것들은 이미 익숙해져 버린 감정이었다. 아이샤가 되기 전, 책 속의 엑스트라가 되어버리기 전의 내 삶도 언제나 그러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미움을 당하는 것.
그 미움의 이유는 언제나 사소한 거였지만, 미움에 대한 괴롭힘은 절대 사소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나약하기만 했다. 왜 저 사람이 날 미워할까. 난 왜 미움을 당해야만 할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나약했고, 바보 같았고,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렇다 해서 지금의 미움이 익숙해지지는 않았지만.’
상처를 내고 또 내서 그 상처를 무뎌지게 하는 것. 그게 그나마 나의 대처법이었다. 그리고 난 이곳에서도 똑같이 할 거다.
‘적어도 미움의 이유 정도는 아니까.’
오히려 무섭지 않다. 그때는 지킬 게 없었고, 이제 지킬 게 있으니까. 어느 누군가는 지킬 게 있으면 더 두렵다고 하지만, 난 도리어 반대다.
내 팔목을 잡은 로헨과, 내게 매달린 라리. 두 아이들을 보며 난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아이들과 함께 이곳으로 오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마음은 더 단단해졌으니까.
“내가 구경시켜 주께. 라리방 엄청 크다! 혼자 자기 무서울 정도야!”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라리는 어느 때보다 신난 눈치였다. 로헨은 그런 라리의 모습에 불편감을 간간이 내비쳤지만, 결국은 포기한 듯 앞장서고 말았다.
“다음에 또 보자.”
대공비와 론이 있는 그 자리를 벗어나던 그때였다. 조금 거리를 두고 있던 제프리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시선이 그쪽으로 가는 건 당연했다.
“아.”
로헨이나 라리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제프리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너랑 나랑 비슷한 입장일 거 같아서 말이지.”
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제프리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지었다. 같은 입장이라. 어찌 보면 그런 입장이고 또 어찌 보면 그런 입장이 아닌지라 나는 굳은 얼굴 말고는 지어 보일 게 없었다.
‘친한 척해 봤자, 미래에 우리 애들을 괴롭힐 당신도 아웃이야.’
이 가문에서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때문에 난 더 씩씩하게 그를 지나쳐 걸었다.
“친하게 지내지 마.
”
“어?”
앞장서 걷고 있던 로헨은 그곳에서 꽤 벗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까 그놈이랑. 아니 이 가문에 어느 누구랑도 친하게 지내지 마. 아, 아니다. 우리들하고만 친하게 지내.”
“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질투라도 하는 거야?”
그냥 해 본 말인데, 로헨의 반응은 예상 범주를 훨씬 뛰어넘었다. 당연히 아니라고, 네가 뭔데 질투를 하겠냐고.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아이의 통통한 머리통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기분 나빠.”
“어……?”
“네가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거 보면 기분 나쁘다고. 그러니까 어울리지 마.”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어… 어. 기, 기분 나쁘구나. 그럴 줄은 몰랐어.”
“……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냐.”
한발 늦게 정신이 돌아온 건지, 로헨은 이전처럼 잔뜩 뿔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다른 뜻이 없으면 뭔데?”
“그니까…….”
우물쭈물하던 로헨은 잘 정돈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렇게 했음에도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니까! 여, 여기 사람들 영 별로잖아. 사람 세워놓고 무안하게 하질 않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괜히 잘해 준다고 바보처럼 헤헤 하지 말란 거야.”
“그렇게 날 생각해 주는 거야?”
“아니라고. 생각해 주는 거. 그냥 짜증 나니까 그러는 것뿐이라고! 얼른 따라 오기나 해.”
괜스레 성질을 버럭 낸 로헨은 말과 달리 아까보다 훨씬 천천히 걸으며 보폭을 맞췄다. 툴툴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뒤를 살펴 가며 우리를 챙기는 일은 잊지 않았다.
‘이렇게 착한 애들인데, 이렇게 다정한 애들인데.’
때문에 내게 더한 책임감이 찾아왔다. 과거의 상처가 있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금방 나아질 거다. 그걸 알기에 난 라리의 손을 꼭 잡고 로헨과 함께 대공의 뒤를 따랐다.
***
걷고 또 걷고 또 걸으면서 생각한 점은 진짜 더럽게 크다는 것이다.
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저택은 웅장하고 엄청났다. 성처럼 우뚝 솟아 있는 건 아녔지만, 네 개의 건물로 이뤄진 대공가.
말로는 네 개의 건물이라지만 커다란 건물이 네 개고 부수적인 건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거기에 건물 하나하나당 딸려 있는 정원이 얼마나 큰지…….
“하아…….”
등 뒤로는 땀이 나고, 다리가 조금 아파올 정도였다. 보육원 시절에도 그리 편히만 보낸 게 아니라서 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는데, 이건 좀 정도를 지나친 것 같다.
“왜. 힘들어?”
역시나 내 한숨 소리를 제일 먼저 들은 건 로헨이었다. 아니. 본인도 힘들어 가지고 내게 말을 건 걸지도.
“어. 조금은?”
“애 힘들다는데.”
아무래도 본인이 힘든 건 맞는 듯, 로헨의 목소리가 아주 살짝 떨렸다. 내가 힘들다고 할 때는 쳐다도 안 보던 대공의 얼굴이 조금은 굳어졌다.
“그래서.”
“쟤가 힘들면 나도 힘든 거야.”
“…….”
대공의 시선이 날카롭게 내게로 꽂혀왔다. 네가 뭔데 내가 신경 써야 하냐며. 그런 말들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아냐. 나 괜찮아. 그냥 가자.”
그냥 오늘은 이대로 넘어가자. 이미 기운이 다 빠져버린 상태였다. 이미 대공비가 있던 그 자리를 벗어나던 그때부터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가만히 나와 로헨을 살피던 대공은 뒤를 따르던 기사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무슨 말을 더하나 싶었는데,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저들끼리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기사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뭘 하려는 건가 싶던 찰나, 기사 하나가 나를 안아 들었다.
“어? 어?”
“이 정도면 되었나.”
“아.”
놀라는 나와 아무렇지 않아하는 대공. 그리고 그런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로헨까지.
“이제 가지.”
심지어 대공은 만족했는지 별 표정 변화 없이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마치 짐짝을 드는 것처럼 날 옆구리에 낀 기사도 그를 따라서 움직였다. 그가 걸을 때마다 마치 인형이라도 된 듯 몸은 위아래로 통통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