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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29)화 (29/99)

-29화-

“그래서 저 아이는 어떻게 할 거죠?”

“글쎄. 쌍둥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하더군.”

“어느 가문의 어떤 아이인데요?”

나와는 말조차 섞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대공비는 무표정하게 대공을 바라봤다.

“어차피 고아 출신들은 다 똑같지 않나. 가문이랄 것도 없고, 설령 있다 한들 버려진 애들이니.”

“……그런 아이를 우리 가문에 두겠다고? 출생도 모르고 어떤 부모의 피를 이어받았는지도 모를 애를?”

“아이들이 원하는데 별수 있나.”

“그래도 나는 반대예요. 더러운 피를 이어받았을지 모르는데?”

당장이라도 나와 아이들을 떼어놓으려는 것처럼 눈빛이 흉흉하게 변했다. 나와 자신들을 분리하려는 걸 이미 알아차린 듯 라리는 아까보다 더 강하게 내 팔을 잡았다.

“그냥 적당히 해서 보내면 되잖아요. 저 애가 순진한 애들을 꼬신 것 같은데, 그런 걸 쳐내지 않고 데려온 것 자체가 문제예요.”

“하. 내가 왜 여기서 비난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대공비.”

“비난이 아니잖아요. 아이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거죠.”

“적당히 하도록 해. 대공비. 내가 그대에게 한 일이 있어 최대한 봐주고 있지만, 선은 지키도록 해.”

날카롭고 날 선 목소리가 유난히도 커다란 공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말투에 대공비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굳어졌다. 고작 저딴 애 때문에 자신이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냐며, 그런 표정을 여실히 보여 줄 정도다.

“당신은…….”

불편하고 기분 나쁘고 그런 감정들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대신 대공비는 큰 상처를 받은 사람처럼 입을 우물거리다가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 변한 분위기를 대공도 느낀 건지,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말이 심했군.”

“……나는 당신을 위해 최대한 참고 최대한 노력하는데…….”

그런 거치곤 되게 심하게 비난하던데.

내가 쌍둥이의 입장만 되었어도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겠지만, 난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해파리 같은 존재다.

언제 어디로 쓸려갈지 모르는. 그러니 본능을 참아내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 그래. 그대는 최선을 다하지.”

“잘못한 건 당신이면서.”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당신이 잘하고 있는 건 아니까…… 그만.”

우리에게 보여 주던, 책에서 서술되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그는 대공비를 보며 쩔쩔매기에 이르렀다.

‘사랑 없이 한 결혼. 최소한 부부로서의 격식만 차리는 사이. 하지만 쌍둥이들 때문에 대공이 저러는 걸까.’

어찌 되었든 밖에서 낳아 가지고 온 자식이니까. 아니면,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지금도 대공비에게 사과를 하는 그의 눈에는 문득문득 알 수 없는 감정이 보였다. 감정 없는, 분노에 찬 얼굴이.

‘제 부인이니까 그저 잘해 주는 걸까. 그저 그런 것뿐일까.’

어찌 되었든 지금은 정상인 같아 보였다. 생각보다 미친놈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더 묘해진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대공비가 걸어 나온 저 뒤편 길에서 누군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뒤편에서부터 웅성웅성했기에 시선은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어느새 우리 쪽으로 다가온 두 명의 남자아이. 유난스레 볼이 통통한 남자아이들이었다.

은발에 푸른 눈동자. 쌍둥이의 특징과 꼭 닮았다. 마치 은빛 늑대를 연상시키는듯한 외향. 다른 게 있다면 누가 봐도 귀하게 자랐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듯 둘이 입고 있는 옷은 꽤 귀해 보였고, 머리카락은 잘 관리된 듯 반짝거렸다.

조금 탄 듯 피부가 어둡긴 하지만 꽤 건강해 보였다.

햇빛도 제대로 보지 못해 얼굴이 새하얗고, 관리를 받지 못해 머리카락이나 피부가 엉망인 쌍둥이들과는 또 달랐다.

거기에 한 명은 키가 아이들에 비해 한 뼘 반은 컸고, 다른 아이는 반 뼘 정도 컸다.

그냥 등장만으로 그들이 누군지 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론. 제프리.”

좀 큰 아이는 우호적이었고, 쌍둥이들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아이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대공비가 차례로 이름을 부르자, 론이란 아이는 아까보다 더 불편한 표정을 보였고 키가 큰 편에 속하는 제프리는 급히 표정 관리를 시작했다.

론. 론 블레어.

현 대공인 카시미르 블레어와 대공비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아들.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던 대공비가 겨우 낳은 아이로 그녀가 제일 애지중지 키우는 아이였다. 그 때문에 버릇이 없는 편에 속했고, 원작 속에서도 사사건건 쌍둥이들을 괴롭히는 존재였다.

제프리 블레어는 선대 대공이자 블레어 대공의 형이 낳은 유일한 자식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선대 대공은 유난히도 빠른 결혼을 했고, 이른 나이에 아들을 하나 얻게 되었다.

하지만 선대 대공비는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났고, 선대 대공도 아이가 자라는 걸 채 보지도 못한 채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카시미르가 대공에 오르자마자 그 아이를 거두게 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스스로를 부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존재. 혹여나 미움받아서 쫓겨날까 봐 대외적으로는 쌍둥이에게도 모든 이에게도 잘하긴 하지만,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자격지심은 나이가 들수록 좋지 않게 발현해 쌍둥이들이 성인이 된 후 제일 머리 아프게 만드는 이 중 하나다.

“안녕. 너는, 아니 너희는 누구니.”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인사하는 제프리와 달리 론은 굉장히 불편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대공비는 제 아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형처럼 아이들에게 얼른 인사해야지. 론.”

“……자꾸 어디서 거지 같은 것들을 주워 오는 거야. 저 여자애도 맘에 안 드는데, 저것들은 뭐냐고.”

아무리 상대가 싫다곤 하지만, 저 정도의 적대감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자신의 밥그릇을 뺏긴 동물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악의적인 적대감을 바로 내비치진 않는다. 상대가 어떤 사람일지 모르니까.

하지만 론은 달랐다. 

쌍둥이들에 대한 원초적인 적대감. 본능에서 나온 그 감정을 론은 숨김없이 내비쳤다.

“저것들이라니. 네 형제들이란다. 그러니 인사해야지?”

그런 아이의 모습이 익숙했던 건지 대공비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시키고 론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 다 싫다고. 내쫓아.”

“론.”

“저것들이 누군 줄 알고. 그냥 거지새끼들 데려온 것밖에 더해?”

이 정도 발언이면 대공비도 대공도 막을 법했지만, 역시나 둘은 론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대공비는 그렇다 쳐도 쌍둥이들을 데려온 대공조차.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대공이 싫었던 건 언제나 방관자처럼 아이들이 필요할 땐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미친놈이나 나쁜 사람이 잘도 되면서, 가족들 특히 아이들에게만은 나쁜 사람이고 싶지 않은 것.

“론.”

도리어 꽤 난처한 얼굴을 한 건 대공비 쪽이었다.

“왜 틀린 말했어?”

“우리 아드님이 하는 말이 틀릴 리가 없지.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출하면 안 된단다.”

여기서 교육을 하고 있는 건지, 대공비는 론에게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해가며 달래고 있다.

‘저딴 식으로 교육하니까 애가 저따위로 크지.’

욕이 절로 나온다. 아무리 애지중지 소중한 아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키울 줄이야.

“어쨌든. 저것들 들일 거야? 저 거지새끼 같은 것들 들일 거냐고!”

“그, 그래야지. 대공가의 아이들이라고 아버지가 데려온 아이들이지 않니.”

“속아서 데려왔을 줄 어떻게 알아!”

“속아서 데려온 거면 속은 놈이 멍청한 거지.”

그때였다. 아무도 폭주를 막지 못하는 상황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은 당연스레 그 말이 튀어나온 곳으로 향했다.

로헨이었다. 머리 뒤로 손깍지를 낀 로헨은 론의 말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뚜벅뚜벅 앞서 걸었다. 예상치 못한 그 행동에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당혹감과 황당함.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모두가 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대부분 같은 표정으로 로헨을 바라봤다.

“왜. 틀린 말했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는 아닌 것 같다고. 그런 말들이 사람들의 눈을 통해 감정으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로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무, 뭐?”

어버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결국 입을 연 건 론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당황해? 조금도 틀린 말 없잖아? 속아서 데려왔다면, 그 속은 사람이 바보인 거 아냐?”

“……그래서 네가 가짜라는 거야?”

“아. 멍청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네.”

로헨의 한마디에 론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하지만 그런 론의 상태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듯 로헨은 뒤에 있던 대공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어디로 가면 돼?”

“…어디로 가다니.”

“내가 그쪽 아들이라며. 그래서 데려온 거 아냐? 여기서 지내라고?”

“맞다.”

오히려 당황한 건 대공 쪽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당황하는 법도 없던 그는 흠흠 거리며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안내하라고.”

“그러도록 하지.”

제 감정을 숨기려는 것처럼 그는 앞장섰고, 그 뒤를 따라가려던 로헨이 내 팔을 잡았다.

“가자.”

“어?”

“왜. 여기서 더 할 말 있어?”

“아니 없어.”

없는데 론은 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아직도 우리에게 시선도 떼지 못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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