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28)화 (28/99)

-28화-

결국 그 손을 잡은 채 난 라리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한눈에 담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위용의 건물이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단지 활자로 표현된 것과 실제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와…….”

차마 감탄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촌스럽기는.”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 로헨은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무시를 철철 담아서. 본인도 놀라 가지고 눈이 동그랗게 변해 놓고 저런다.

“언니 안 촌스러워! 언니야는 이뻐!”

그때였다.

우리끼리 잠시 이야기를 하던 그때,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멀리서부터 라리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나왔다.

“라리!”

마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한 여자가 뛰어나왔다. 금발의 머리칼을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여인. 난 굳이 누구라고 듣지 않았음에도 그 여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헬렌.

블레어 대공비.

그리고 쌍둥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소설 속 흑막들을 탄생시키는 데 주력한 그 여자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얼굴에 가면을 쓴 채 좋은 엄마인 척 라리에게 달려왔다.

“아줌마!”

라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조금의 주저없이 반가움을 토로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그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이에게 마음을 금방 여는.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쉽게 열진 않았을 테지만 나와의 관계가 좋았어서였을까, 라리는 생각보다 빨리 대공비랑 친해진 듯했다.

“아줌마라니. 엄마라고 불러야지.”

대공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가 봐도 좋은 엄마인 것처럼. 겉보기에는, 완벽할 정도로.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그녀는 몸을 수그려 라리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아니…… 그거는…….”

“지금 당장 말해 달라는 건 아니란다. 나중에 된다면 엄마라고 불러 주겠니?”

“응!”

선뜻 엄마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 듯 라리는 우물거렸다. 라리를 향해 어색하게 팔을 벌리고 있던 대공비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세웠다. 대신 잘 관리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지.”

정말 아이에게 빠진 사람처럼 대공비는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히려 그녀를 보면서 신기할 정도였다. 원작 속에서 딱히 그녀가 인상이 나쁘다는 말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그녀가 예민하고 날카롭게 생겼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대공비는 도리어 누가 봐도 착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살짝 통통한 볼과 전체적으로 작고 짧은 얼굴은 나이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어려 보였고, 착해 보였다.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은 얼굴. 그게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모든 건 연기겠지.’

저런 얼굴이었기에 의심을 받지 않았던 건가. 도리어 저렇게 다정하고 좋은 인상을 가진 그녀를 의심하는 내가 못된 사람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러는 사이 대공비의 시선이 라리를 지나 대공에게로 그리고 로헨에게로 향했다. 아예 내가 보이지 않는 건지, 당연스레 그녀는 나를 무시한 상태였다.

“설마 저 아이는…….”

로헨을 보자마자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모르고 본다면 아이를 보고 감격에 겨운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그걸 눈치챈 대공이 대공비와 로헨을 번갈아 봤다.

“이름은 로헨. 라리즈의 쌍둥이라더군.”

“쌍둥이라니. 그럼 알고 간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감정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렇지.”

참으로 묘했다. 대공비가 묻는 말, 하는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을 하면서도 무언가 불편해 보인다. 원작 속에서 둘의 관계는 언제나 묘했다. 속사정은 그렇다 쳐도 대공은 대공비를 볼 때마다 언제나 약자가 된 것처럼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아마도 그건 대공비에게서 낳은 아이가 아닌 쌍둥이들 때문에 미안한 감정을 가져서일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두 사람을 보니 조금 더 묘했다.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이랄까.

그러는 사이 대공비는 로헨에게 성큼 다가왔다.

“세상에…… 라리를 데리고 어딜 간 거였나 했는데…… 이 아이를 데리러 간 거였어요……? 그럼 나도 데려가지 그랬어요. 세상에.”

마치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를 만난 것처럼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안녕……?”

새하얀 그녀의 손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로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왜. 이번엔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인간이야?”

“어……?”

“그럴 생각 없으니까 친한 척 하지 마.”

라리가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로헨의 말투에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약하디약한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날카로운 가시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로헨이 꼭 그러했다.

살기 위해, 조금의 틈을 주지도 않으려는 것처럼 잔뜩 가시를 세웠다.

“안 불러도 된단다. 너의 자유니까.”

“어. 부를 일 없어. 이 집안 인간들은 하나같이 짜증 나.”

로헨은 어느새 나와 라리가 있는 곳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라리. 너도 저딴 것한테 엄마라고 부를 생각 하지도 마. 아니. 그냥 여기 인간들이랑 친해질 생각도 하지 마. 알잖아. 세상엔 우리뿐이라는 거…….”

우리를 만난 이후부터 내내 밝은 표정이었던 라리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맞아. 세상엔 우리뿐이야. 오빠랑…… 나랑…… 언니야뿐.”

그 며칠 동안 그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처럼, 라리는 내 팔을 꽉 잡은 채 몸을 움츠렸다.

“라리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이곳의 모든 사람은 다 네 편인걸.”

“…….”

이전까지는 이런 종류의 설득이 잘 통했던 건지, 대공비는 몇 분 만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거리를 두는 라리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맞아. 그랬어. 아무도…… 아무도 없었어. 우리는.”

그동안 이곳에서 잘 지내긴 하긴 했나 보다. 뒤늦게 현실을 파악하기라도 한 것처럼, 라리는 꽤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그래 봐야 어린아이다. 어린 시절이 모두 나쁜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때문에 난 라리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지금은 나도 있잖아.”

“우웅…… 언니야 있어.”

그리고 나서야 내 존재 자체를 파악한 건지, 아니면 상종할 가치를 느낀 건지 대공비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하지만 라리나 로헨에게 보이던 것과 달리 마치 선을 긋는 것처럼 날 보는 그녀의 시선은 대공과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저 아이는 뭐죠.”

날이 선 목소리와 말투. 다정한 모습 따윈 없는 그녀는 날 위아래로 훑었다.

“저 아이는…….”

“또 다른 아이라도 어디서 낳아 오신 건가요.”

‘또’라는 말에 대공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최소한의 예의를 차려 말하려고 했던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는 것처럼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남들이 오해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대공비라는 자가.”

“오해할 만한 말이라니요. 맞는 말이잖아요. 본처를 두고, 제 자식을 두고 다른 이에게서 낳은 아이를 데려온 건 당신이었어요. 그래 놓고 얼마만큼의 이해를 바라는 거죠?”

“……그만하지. 그리고 저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대공비가 다른 사람이 있는 앞에서 대공의 치부를 일부러 드러낸다는 느낌이랄까. 여기서도 이렇게 대공을 무시하는데 다른 곳에선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 위해 평상시에도 저런 걸까? 대외적으로는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했는데…….’

사실상 원작에서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서술된 바는 없었다. 그저 대공비가 쌍둥이들의 존재를 매우 고까워했고, 그렇기에 쌍둥이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빼돌린 거라고.

죽이고 싶었으나, 강한 생명력 때문에 쌍둥이들을 죽일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런 게 전부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통해 낳은 아이를 대외적으로는 잘해 준 대공비. 그런 대공비에게 속아 살았던 대공.

그 때문에 눈앞에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이 상황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럼…… 저 아이는 뭐죠?”

“라리, 로헨과 함께 있던 아이라더군. 두 아이들이 원해서 데려온 것뿐, 나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날 보는 대공비의 시선도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반감이 엄청난 듯하다.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일이 없어야 하고, 모든 게 제 뜻대로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렇군요. 내가 요새 예민해서 순간 흥분했네요.”

“…….”

사과를 건네는 대공비의 말에도 대공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이 익숙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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