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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27)화 (27/99)

-27화-

“뭔데!”

로헨이 다시금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대공은 재밌다는 듯이 입술을 비죽였다.

“왜 그렇게까지 흥분하는 거지?”

본인의 아들한테 하는 말치고는 참으로 정 없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 자체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로헨은 그저 성질 내기에 바빴다.

“왜 나에 관한 걸로 조건을 내세우는데!”

“글쎄?”

이런 걸 하라고 할 줄이야. 황당함과 황망함에 입을 어물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긴장감에 어쩔 줄 모르던 로헨은 그 긴장감을 잊어버린 듯 씩씩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 따위는 내 마음이지!”

“그래. 네 마음이지. 로헨. 네가 정말 저 고아 소녀를 옆에 두고 싶다면 아빠라고 부르면 될 일이다.”

“미쳤어? 이제껏 찾아오지 않아 놓고!”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넌 네 입으로 그 말을 하기 어렵겠지. 그러니 조건을 건 거다. 너희들의 보호자로 옆에 있어도 되는, 쓸모있는 아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조건.”

말은 뻔지르르하게 했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다.

아니, 솔직히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정말 최악의 인간상이 아닐 수 없다.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도 모자랄 아이에게 강요하는 꼴이라니. 마음이라는 건 강제로 열려 한다고 열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럴수록 반감만 생겨서 더 굳은 빗장이 생기는 게 마음이란 건데.

“휴.”

“왜, 어렵나, 고아 소녀.”

내 한숨을 알아차린 대공은 이때다 싶은 건지 입술을 비죽거렸다.

“싫다면 지금 포기해도 된다. 아이들이 질릴 때쯤 조금 챙겨 주는 돈을 가지고 나가면 될 테니까. 장난감은 장난감답게 그러면 된다.”

하느님, 제게 정의로운 망치가 있다면 저 대공의 머리를 한 대만 찍게 해주세요.

어쩜 말을 저렇게 밉게 하는지. 손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모든 신경을 내게로 쏟고 있는 쌍둥이들이 알아차릴지도 모른단 생각에 난 최대한 긴장을 풀며 그를 바라봤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호오. 그러면 내 아들의 마음을 얻겠다는 건가?”

네 아들의 마음은 네가 얻어야지.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앞에 있는 자는 대공이고, 난 어떻게서든 쌍둥이들과 함께 가야 했기에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자신 있나 보군?”

“자신이 없다 해도 해야 하니까요! ”

그때, 로헨이 내 팔을 연신 툭툭 건드렸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려는 것처럼.

“그래. 좋군. 기한은 한 달이면 족하려나.”

“좋아요. 대신 하나만 확인할게요. 대공 전하. 아빠라는 단어를 듣기만 하면 되시는 거죠?”

아주 잠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닌가요? 이제 와 말을 바꾸시려는 건가요?”

“썩 유쾌하진 않군.”

“어쨌든 약속해 주셨으니까 지키시리라 믿어요!”

“……그래. 알았다.”

쥐도 도망칠 구멍은 만들어야 했기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둔 난 배시시 웃으며 연신 걱정하는 로헨의 손을 꼭 잡았다.

“난 안 할 거야.”

“응. 알아. 로헨. 넌 그런 말 할 사람 아니라는 거.”

“그러면 왜 한다 그랬는데. 당장이라도 약속을…….”

성질을 잔뜩 내는 로헨을 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 안 되면 그냥 놀다가 떠나는 거지, 뭐.”

“못 떠나! 계속 계속 내 옆에 있어야 해.”

“맞아! 언니야는 우리랑 평생 살아야 해! 나눈 언니야랑 결혼하꾸야!”

로헨에 이어 라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물론 라리의 그 말에 대공은 꽤 충격받은 얼굴을 했지만, 그의 행동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쌍둥이는 대공에게 조금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정말 멍청이야. 그건 아무리 너라 할지라도…….”

“로헨. 고민할 필요 없어. 네가 하기 싫음 하지 않아도 돼. 언제나 말했듯이 난 너희들에게 강요 안 해.”

“…….”

“대공 전하께서 나를 내쫓는다 하지 않았으니까.”

영 못마땅한 얼굴을 하는 로헨을 보다 몸을 뒤로 기대었다.

“아, 이제 자면서 가야지. 자, 로헨. 라리. 자자.”

내 손길이 싫다는 듯 손을 빼는 로헨의 손을 꽉 잡아 가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반항하던 로헨과 좋다는 듯 내게 몸을 기댄 라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잠들었다.

물론 이런 불편한 자리에서 내가 잠이 올 리는 만무했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자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본능이 나를 계속 깨웠다.

앞에 있는 자는 미친개라 불리는 대공이라고. 조금의 트집도 잡히면 안 된다고.

‘물론 이미 트집이 잡히긴 했지만.’

아이들을 위해 대공과 했던 말도 안 되는 조건이 자꾸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쌍둥이들만 아녔으면 조건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죽임당했을 나일 테니까.

‘정말 내가 미친 게 확실해.’

자꾸만 쌍둥이들과 엮이면 평온하고 안온하게 삶을 살자는 내 마음이 깨진다. 자고로 단명하는 인간들의 특징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사람이라던데. 어쩐지 내가 그렇게 돼버린 기분이다.

하지만 들판에 핀 꽃처럼, 밟아도 다시금 활짝 피어오르는 들꽃 같은 쌍둥이들을 그냥 둘 수가 없다.

들꽃인 척하는 여리디여린 꽃들을 온실에 무사히 두어 잘 자라게 하는 게, 아마 내가 이곳에 빙의된 이유 같으니까.

“하아…….”

“잠이 오지 않으면 억지로 눈을 감고 있지 않아도 된다.”

아주 깊은 속 어디서부터 올라온 내 한숨 소리를 들은 건지 대공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잠도 없나. 살짝 실눈을 뜨며 그를 바라봤다. 동상이라도 된 듯 그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아까 그 자세 그대로였다.

“아뇨. 잠 옵니다.”

“재미있군.”

“…….”

당신이나 재미있겠지. 난 조금도 재미없거든. 하지만 더 이상의 선을 넘으면 안 되기에 난 아까보다 눈을 더 질끈 감았다.

그렇게 마차는 빠르게 달렸다. 속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끝없는 수레바퀴처럼. 달리고 달리고. 내가 앉아 본 의자 중에 제일 푹신한 의자에 앉았음에도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이쯤 되면 잠이 올 만했지만, 정말 한숨도 못 잤다.

가시방석이라는 말을 여실히 느낄 정도였다.

“곧 도착한다. 내릴 준비 하도록.”

내가 최근에 들은 말 중에 제일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대공가에 가서 편할 리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보단 나을 게 분명하다.

지금은 숨 쉬는 것조차 불편한 상태니까.

난 대공의 말에도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쌍둥이들을 흔들었다.

“다 도착했대. 일어나.”

“……안 잤거든.”

비몽사몽 일어나서는 날 껴안는 라리와 달리 로헨은 눈을 부릅뜨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잤어?”

“응. 한숨도 못 잤어.”

그런 거치고는 졸음이 눈에 한가득 졸음이 찬 로헨은 하품을 쩍쩍 해 보였다. 감정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한 대공은 그런 로헨의 모습이 귀여웠던 건지, 문득문득 떠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뱉어 냈다.

물론 소리 없는 웃음을 알아차리는 건 나 혼자뿐이지만.

“나눈 졸려어…….”

“졸리면.”

우리 대화에 어떻게서든 끼고 싶은 사람처럼 대공은 급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의아함을 담은 세 개의 머리통이 움직였다.

마치 이 타이밍에 당신이 왜 껴드냐고. 그 날것에 가까운 감정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쌍둥이들에게서도.

그걸 느낀 건지, 흠흠거리던 대공은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리면 언제든 내가 안아서 데려갈 수 있다는 말을 하려 한 것뿐이다. 뭐 필요가 없을 거 같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한 부모는 없다. 그걸 대공이 딱 보여 주는 듯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벽을 치면서 아이들에게만은 최대한 그 벽을 없애려는 것을. 물론 그런다 한들 쌍둥이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는 없었지만.

“응. 필요 없어. 나는 언니야랑 이렇게 꼭 붙어갈 거야아.”

“그래. 그러도록.”

자신의 제안이 무시당한 것에 대해 아주 조금 당황했던 대공은 그사이 열린 마차 문을 통해 먼저 내려갔다.

“이제 내리도록.”

“어.”

간단명료한 대답을 들은 로헨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서는 우리를 바라봤다. 내게 꼭 달라붙어 있는 라리와 내리려고 하던 그때, 로헨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든가.”

“오. 걱정해 주는 거야?”

“아니거든. 그냥 칠칠치 못해서 내리다가 나까지 건들까 봐 그런 거지. 싫으면 말든가.”

언제나 그러하듯, 불친절하게 툭툭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어느 때보다 다정했다. 당장이라도 손을 거둘 거라는 예상과 달리 로헨은 내가 그 손을 잡을 때까지 내내 자세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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