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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26)화 (26/99)

-26화-

‘본인이 더 긴장하면서.’

평소라면 내가 웃는 그런 모습을 놀렸을 로헨은 한참이 지나도록 몸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귀엽다. 아이 같다. 로헨도 라리도 정말 그 나이 또래의 보통의 아이들 같다. 이 아이들의 행복을 지켜 주고 싶다. 그런 마음이 떠오른 건 그쯤이었다. 재수 없는 대공이 뭐라 하든, 대공가로 가기로 했으니까, 제대로 하겠노라고.

그래서 대공을 빤히 바라봤다.

꽤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던 대공은 아닌 척하면서 흘끔흘끔 쌍둥이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보육원을 모두 불태워 버리려고 했던 그가, 나한테 장난감이라고 칭해 버린 그가 죽도록 싫지만 쌍둥이들은 아녔다.

‘할 거면, 제대로 해볼까.’

그런 생각들이 미치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대공을 볼 때마다 본능적으로 쭈뼛쭈뼛 서던 털들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쉬이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난 마차를 타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럼 따라가는 대신에 조건이 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어서였을까, 그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감히 너 따위가 조건이라는 말을 입에 담냐는 듯, 적대감이 내비쳤다.

본능적으로 몸이 움찔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군.”

“아닌데요. 맞는데요.”

“감히 나를 상대로 조건을 걸어?”

음악처럼 퉁퉁 움직이는 마차의 움직임 때문에, 까무룩 잠이 들었던 두 아이들이 살짝씩 움직였다.

“네.”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인가.”

“알죠. 대공 전하잖아요.”

그의 입꼬리가 삐뚤어지게 올라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네 위치에 대해서는?”

“쌍둥이들이 원해서 데려가는 짐 정도로 생각하시잖아요.”

“어린아이치곤 멍청이는 아닌가 보군.”

고압적으로 꼬아져 있던 그의 팔짱이 풀어졌다. 적어도 이야기조차 듣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방어 태세가 풀린 거다.

‘여기까지만 해도 반은 한 거야.’

등 뒤로 땀이 주르륵 흐른다. 대공이라는 사람은 소설 속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서술된다. 자신의 사람들에게조차 가차 없었고, 그 때문에 온갖 좋지 못한 수식어는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미친개. 제국의 유일한 문제점. 신이 사랑하면서도 저주를 내린 자. 괴물.

누구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잃었다며 그를 대공의 자리에조차 어울리지 않는 자라 했다. 또 한편에서는 몸이 약해 먼저 세상을 떠난 선대 대공을, 제형을 현 대공이 죽인 게 아니냐는 소문조차 돌았다.

카시미르 블레어. 쌍둥이들의 부친은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듣는 사람이었다.

그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과분한 소문일 뿐이라고, 소설 속에서도 과장된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 본 그는 더하면 더했지 덜한 사람이 아녔다.

‘아 손 떨려.’

그의 시선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마치 불로 지진 듯 뜨겁고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러는 사이 날 살피는 게 끝난 듯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무섭지 않나? 보통은 말도 잘 걸지 못하던데? 아니면 멍청해서 이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나?”

“멍청하진 않아요. 주제 파악은 잘하거든요.”

“재밌군.”

완벽하진 않지만 그의 감정이 아까보다 옅어졌다. 무조건 듣지 않으려는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주제 파악을 잘하는 아이가 내게 조건을 내건다?”

“충분히 그럴 입장은 되는 거 같아서요. 아이들이 누구보다 나를 따르잖아요.”

“내 아이들을 두고 거래를 하겠다는 건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온몸에 가시 돋친 것처럼 그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두고 거래할 거였으면 엄청 큰 걸 바랐겠죠. 아이들이 나를 따르니까.”

“그래서 바라는 게 뭐지? 너는 그저 내 아이들의 장난감일 뿐이다. 언제든 질릴 장난감. 그런 장난감이 바라는 게 뭔지, 문득 궁금해지긴 하는군.”

와, 진짜 딱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설사 그런 의도로 나를 데려가는 거라 할지라도 저 인간은 인간이 덜되었다.

갱생조차 불가한 쓰레기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를 설득하는 게 조금은 필요했다.

“왜 말을 못하지? 말하기 어려운 건가?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이라든가, 좋은 집으로 입양 가는 거라든가, 뭐 그런 것들인가. 원한다면 해주지.”

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가며 이야기를 듣던 라리가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글쎄요. 어린아이가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이 있어 봐야 이용당할 뿐이고, 좋은 집으로 입양 가봤자 정말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없겠죠.”

“호오. 그러면?”

“아이들에 대한 걸 저한테 모두 일임해 주세요.”

전혀 예상에서 벗어난 말이어서였을까, 그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일임? 네가 뭐라도 되겠단 건가.”

“그래도 보육원에서는 내가 쌍둥이들의 보호자였으니까요.”

말하는 목소리가 덜덜 떨려 오고, 눈앞이 검게 변해 버리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도 의문이다. 그냥 쌍둥이들과 함께 대공가에서 살다가, 아이들이 나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쯤 적당한 돈을 받고 나오는 게 어쩌면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 대공이란 인간에게 아이들을 온전히 맡기고 나오면 내가 그동안 내내 해온 일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았다.

‘저 인간 때문이라도 아이들의 교육은 다 맡길 수가 없어.’

다시금 마음을 다잡은 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일임이라는 범주는 어떻게 되지?”

“뭐 내가 대단한 걸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저 아이들에게 무언갈 하려고 할 때, 내가 옆에서 다 하나하나 참견하게 해줘요.”

“……그게 전부인가?”

“네!”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정말인가.”

“네.”

“……혹시나 대공가로 입양을 원한다든가, 혹은…… 보통 아이들처럼…….”

“절대 싫어요. 대공가로 입양은. 보통 아이들 같은 게 뭔지 모르겠지만, 난 그냥 얘들하고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에요.”

잠시 눈알을 굴려 마차 안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가 다시금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정말인가.”

“네.”

“나중에 말을 바꾸거나 해도.”

“절대 그럴 일 없어요.”

“…….”

“이 정도도 힘든가요?”

그러는 사이 정신을 똑바로 차린 두 쌍둥이들이 앞쪽으로 몸을 쭈욱 뺐다. 대공을 상대로 무언의 압박을 하려는 것처럼.

“힘들건 없지만…….”

“물론 내가 별 볼 일 없는 거 알아요. 고아 출신인 데다가, 대공가의 자제분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애이긴 하죠. 도리어 데리고 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해야 하죠.”

“…….”

“그런데도 부탁할게요. 난 로헨, 라리와 함께 지내고 싶어요. 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신…… 두 아이들이 나에게 질릴 때까지만이라도요.”

몇 주, 혹은 몇 달. 길어 봤자 몇 년. 원작 속 아이들은 원래도 무언가에 금방금방 흥미를 잃었으니까. 지금은 그저 내가 신기해서 이런다는 걸 내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난 더욱더 애달프게 대공을 바라봤다.

“……원하는 게 그게 다인가?”

“네.”

“……그게 더 의심스럽군.”

때마침 로헨이 굳어 있던 입을 풀어 내고 겨우 입을 열었다.

“얘가 원하는 건 우리도 원하는 거야. 그러니까 들어줘.”

“응! 드러줘. 언니야가 원하는 거! 어, 구니까…… 옴총 어려운 거 같은데! 그래도 들어줘, 아빠!”

로헨이 이야기했을 때 이미 표정이 풀어져 있던 대공은, 라리의 아빠 소리에 사르르 녹는 아이스크림처럼 굳은 얼굴이 아주 잠시 풀어졌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다시금 다잡은 듯 얼굴을 굳혔다.

“좋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정말요?”

“대신. 그럼 나도 조건을 걸지.”

“조건이요?”

“치사하게. 그냥 들어 달라는데, 어려운 것도 아닌데 조건을 걸어?”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로헨이 짜증을 팍 냈다.

“그래.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려운 거고 쉽다고 생각하면 쉬운 거지.”

어떤 걸까. 약간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세상에서 제일 얻기 어려운 게 뭐라 생각하지. 고아 소녀.”

장난감으로 부르지 않아서 고마웠지만, 고아 소녀라는 말이 퍽 좋진 않았다. 불쑥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도 장난감보단 낫지 않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음…… 글쎄요.”

“돈, 명예, 뭐 그런 것들이 있지만 사람 마음 얻는 게 제일 힘들다고 본다. 아직도 난 그게 제일 어려우니까.”

“아아.”

“그래서 네가 할 건, 네 옆에 있는 내 아들이 날 아빠라고 부르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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