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24)화 (24/99)

-24화-

‘알 리 없는데?’

소설 속에서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온다. 소설 속에서 원장을 죽인 건 그녀가 한 짓들이 어떤 이의 사주를 받았다는 게 밝혀지거나 다른 연유가 있어서는 절대 아녔다. 그저 자신의 자식들이 이곳에서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분노한 대공이 조사도 하지 않고 다 엎어 버렸다.

‘아니면 라리가 무언갈 말했나. 그래서 대공이 알고 있는 건가?’

내가 애들에게 대공비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사이에 라리가 대공을 믿고 말을 했을까? 설마 대공이 엄청난 능력으로 알아차린 건가 했지만, 전혀 그런 거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막 들려던 그때,

“아, 알고 계셨군요!”

원장은 그의 말에 보기 좋게 넘어갔다. 평소라면 절대 넘어가지 않았을 거 같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생쥐가 제 앞에 있는 쥐덫도 구분치 못하는 것처럼 원장은 그의 미끼를 덥석 물었다.

“…….”

“그러니까…… 조사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러니까……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권력자들 아래에는 언제나 힘없고 휘둘리는 사람이 있고. 모든 증거가 저를 나쁜 사람으로 몰겠지만, 저는 사실 그리 큰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즈, 증거는 모두 조작된 거예요.”

호오, 하는 소리를 내던 대공은 꽤 흥미로운 얼굴로 바닥에 엎어져 있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사이 우리를 찾아왔던 자객들은 그의 기사단에 의해 하나둘 묶여서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다.

“조작된 거라?”

“네, 보,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아, 그러니까 이건 꼬, 꼬리를 자르기 위한 겁니다. 저는 희생양일 뿐이라구요. 살려만 주신다면 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요.”

“그걸 어떻게 믿지? 그 잠깐 사이에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한다면?”

“증거는 다 있습니다. 그, 그렇고 말구요.”

소설 속에 명시된 대공은 이렇게 차분히 이야기할 사람이 전혀 아녔다. 이 장면은 짧게 서술되어 있긴 했으나 그는 분명 분노에 휩싸여 제정신은 아녔으니까. 그래서 이상한 것투성이다.

‘소설이 정말 바뀌긴 하는 걸까.’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대공의 이런 모습까지 서술되지 않았던 것뿐일까. 그런 생각들만 머릿속에 가득하다.

“증거가 있다는 말은 어찌 믿지?”

“그건…… 그건.”

우물쭈물하던 원장은 자신의 마지막 패를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소리를 빽 질렀다.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정말인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잘되었군.”

간결한 말을 한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자신이 살 길이 생긴 거라 생각한 듯, 원장은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네, 네?”

“그리고 저 쓰레기는 조용히 처리하도록 해.”

“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에 원장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게 무슨…….”

“아. 말하는 상대가 잘못되었군. 이걸 처리하도록 해.”

원장을 쳐다보며 이야기하던 대공은 제 옆에 있는 기사들에게 다시금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그들은 하나둘 원장이 주변을 에워쌌다.

“저, 저를 처리하시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모든 걸 밝힌다 했는데……! 이러실 순 없습니다.”

“앞에 있는 내가 누군지 자꾸 잊나보군. 내게 이럴 순 없다니. 명령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저를…… 죽이기라도 하신다면 증거도 못 얻으실 테고…… 그, 그런 것들이 걱정되어…….”

“증거가 있는 건 맞나 보군.”

“네! 그럼요! 진심입니다. 원래 쥐도 도망칠 구멍은 만들어 놓으니까요!”

허허 웃으며 이야기하는 꼴이 꼭 귀족들에게 손을 비벼 가며 아부를 떨던 그 모습과 꼭 닮았다. 어쩐지 가슴속에 불편한 기분이 가득 들었다. 내 감정보다는 더 깊고 어두운 곳에서부터 응축되어 나오는 불안하고 완전하지 않은…… 이상한 감정이랄까.

그래서 원장의 저런 모습이 통쾌하면서도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잘되었군. 그 쥐구멍을 찾기만 하면 되니까.”

“네……?”

“처리하도록.”

아까보다 더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인 대공은 대공은 몸을 휙 돌렸다가, 어색하게 로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치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그런 행동들이 어색한 듯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역시나 로헨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도리어 피식 웃더니 그를 쓱 지나치고 말았다. 그 덕분에 대공의 손은 공중에서 한참이나 멈춰 있었다.

도리어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를 아는 사람처럼, 로헨은 마차 쪽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거 타고 가면 돼?”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일인 듯, 대공은 허탈한 웃음을 뱉어 내다가 자신의 손을 거뒀다.

“너는 라리즈와 매우 다르구나. 쌍둥이라 비슷할 줄 알았더니.”

“그래서 저거 타면 되냐고.”

“그걸 타고 가면 된다.”

당혹감을 비추지 않으려는 듯 흠흠 목을 가다듬은 그는 뚜벅뚜벅 로헨을 따라 걸었다.

“이제 가지.”

조금의 어색함 없이 뻔뻔스럽게도 걸어가는 로헨을 가만히 바라봤다. 뭐가 그리도 못마땅한 듯 손깍지를 낀 채 여유롭게 걸어가는 로헨과 그런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남자.

아직 비쩍 마르긴 했지만, 로헨은 대공의 아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와 꼭 닮았다.

‘이제야 가족이 만난 거구나.’

가슴 한편이 아리면서도 떨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앞으로의 일이 소설과는 달라질 테지만, 그 소설 원작대로 흘러가게 하려 했던 나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조금의 후회도 없다.

원작과 달라질지라도 쌍둥이들은 잘 이겨 낼 테니까. 아픈 과거 따윈 가지고 있지 않을 테니까.

“헤헤. 좋아.”

아직도 내 옆에 꼭 달라붙어 있는 라리는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내 팔에 고개를 부비적거렸다. 난 살짝 팔짱을 풀며 마차쪽을 향해 손짓했다.

“라리야. 어서 가.”

“응?”

“네 아빠와 오빠가 저기 가잖아.”

“맞아!”

라리는 두 사람을 보며 동글동글한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이렇게 보면 꼭 닮아찌? 헤헤. 둘 다 막 이런 이런 표정이 닮아따니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라리는 마치 두 사람의 모습을 따라 하려는 것처럼 한참 동안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순간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막 세상에 나와 제일 먼저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처럼 라리는 그런 날 따라 배시시 웃었다.

뒤늦게 정신이 차려진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라리도 저기 가야지.”

“응! 갈 거야.”

그러면서 아이는 내 팔을 꽉 잡았다.

“같이!”

“아냐. 난 같이 가는 거 아냐.”

난 팔을 억세게 잡은 라리의 손을 풀어 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섭섭한 표정을 짓던 라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찼다.

“왜…… 왜 내 팔 놓는 거야, 언니야. 나 언니야 보려고 엄청…… 엄청 노력했는데…….”

“그건…….”

“그사이…… 내가 시러진 거야……? 나눈…… 하루하루 언니 볼 생각에 얼마나 행복했눈데…… 언니야는…….”

“아냐. 싫어진 거 아냐. 나도 라리 볼 생각에 행복했어. 하지만 나는…….”

그때였다. 우리의 실랑이를 본 건지 마차까지 갔던 로헨이 뚜벅거리며 걸어와서는 내게 팔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어느 때보다 여유롭고 편안한 얼굴과 미소로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내 것도 데려가야지.”

“내 거라니?”

생각지도 못한 로헨의 말에 난 한참 동안 입만 어물거렸다.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 거라니. 하지만 당황한 건 나 혼자뿐인 듯하다.

“이제부터 내 시간 안에는 누나가 항상 있어야 해.”

“……뭐?”

“이제부터 누나는 내 거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지켜 줄게.”

황당하고 어이없음에 우물거리고 있자, 로헨은 피식 웃더니 내 손을 꽉 잡았다.

“어?”

그런 로헨과 나를 번갈아 보던 라리도 반대 손을 냉큼 잡았다.

“아니거든. 언니야는 내 거야. 절대 안 놓을 거야. 나 언니야랑 결혼할래.”

직전까지만 해도 울 것처럼 굴던 라리는 다시금 기쁜 듯 목소리를 높혔다.

“자, 잠깐…… 아니, 나는 여기에…….”

전혀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저 쌍둥이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안겨 주고 싶었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이런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원작과 달라졌다 한들 이건 너무 아닌 것 같아서 손을 마구 저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로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또 그 소리 하려고.”

“어?”

“각자 있어야 하는 자리가 있다는 둥, 욕심내면 안 되는 거라는 둥. 우리랑 가는 길이 다르다고 하려고?”

“그게…….”

“우리 옆이 네가 있을 자리야. 거부는 없어. 억지로라도 데리고 갈 거야. 이곳에……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우리 없으면 울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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