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급히 로헨을 막았지만, 로헨은 날 안고 있던 팔의 힘을 풀며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귀엽더라고.”
“아! 정말? 아아아아, 아쉬워. 언니야 우는 거 나도 보고 싶었는데.”
라리는 매우 아쉬워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런 걸로 아쉬워하지 마.”
“언니야. 언니야. 내 앞에서도 울면 안 돼?”
언제나 잘 웃고 사랑스러웠지만, 가끔 라리에게선 어두움이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공 옆이라서일까, 아니면 이제 자신을 지켜 줄 믿음직스러운 어른이 있어서였을까 라리는 이전보다 훨씬 밝았다.
날 보는 시선도. 건강해 보이는 얼굴도.
물론 울어 달라고 징징거리는 모습은 전혀 아이답지 않았고, 약간 집착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울어 줘.”
“안 돼.”
“라리가 이렇게 원하는데에두?”
“어. 안 돼.”
순간 라리의 눈동자가 묘하게 변했다. 뒷골이 서늘하다 느껴질 정도로 묘한 기분이 든다. 솜털이 쭈뼛쭈뼛 선다.
‘뭐지, 뭔가 기분이 이상해.’
무언가 잘못된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금세 라리의 얼굴은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라또…… 언니야가 그렇게 말하면 별뚜없지!”
해맑게 웃은 라리는 내 가슴팍에 제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그사이 대공의 기사들이 우리 뒤편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붙잡아 갔다. 하나, 많아야 둘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뒤에서는 줄줄이 사탕처럼 인간들이 끌려 나왔다.
처음에는 감정 없이 그 뒤를 바라보던 대공은 피식 웃으며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은 지겹도록 겪은 것처럼, 그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그런데 말이야. 이 아이가 내 아들인지 몰랐다는 것치곤 저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아…… 그게…….”
“상황이 재밌게 흘러가는군. 이렇게 자객이 잔뜩인 거 보면 뻔한데. 나를 상대로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나.”
“그, 그건…… 그러니까…….”
이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원장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자신의 앞으로 질질 끌려오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볼 때마다 그녀는 말도 못 하고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 뿐이었다.
‘꽤 볼만하네.’
그 모습에 어쩐지 가슴 한편이 후련해진 기분이다. 고구마를 먹지 않았는데도 퍽퍽한 밤 고구마 같던 내 상황이 단번에 바뀐 기분이랄까. 이것이 바로 사이단가 보다.
크, 세상에 사이다가 최고야.
이걸 위해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었나 보다. 그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지금도 몰랐다고 할 건가?”
“그게…… 네. 저, 저는 정말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곳에서 참 별짓을 다 한 것 같더군.”
대공이 삐딱하게 서서는 보육원장을 바라봤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인형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던 보육원장의 모습이 마치 건드릴 때마다 펄떡펄떡 움직이는 생선 같다.
“네, 네?? 별짓이라니요? ”
이 말 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대공은 아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뱉어 냈다. 그 어조에는 강인함이 실려 있었다.
“학대를 했다더군.”
스스로 찔리는 게 있는 터라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보육원장은 그 말에 고개를 바짝 들었다. 절대 아니라며 손까지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학대라니요. 그, 그럴 리가요! 저는 절대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습니다. 절대요!”
“내 아이의 말이 틀렸다고 하는 건가?”
“……아니, 그, 그것이 저도 몰랐습니다. 창고에 사람이 있는지…… 누, 누군가 가둬 놓은 게 확실합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신전에서 조사해 갔으니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신전이라는 말을 언급하던 보육원장은 어느 때보다 당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그딴 걸 나한테 믿으라는 건가?”
“하, 하지만 신전에서 조사한 겁니다. 조작이 가능할 리가요!”
지난번 쌍둥이들이 했던 말 때문에 보육원장은 꽤나 당당한 듯싶었다.
‘아무것도 몰라요. 기억나지 않아요. 왜 거기 갇혀 있었는지도.’
뭘 먹고 살았냐는 말에 창고 안에 있던 음식들을 대충 먹었다는 말을 했던 아이들이었다. 누가 여기로 너희를 데려왔냐는 말에 쌍둥이들은 내가 미리 이야기해 놓은 각본대로 움직였다.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겁에 질린 것처럼, 모든 걸 다 말하겠다고 이야기했던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모르겠단 말만 했었다.
‘멍청하게도. 그게 진짜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때는 무서워서 제대로 말 못 했는데 저 여자가 우릴 때렸어요.”
라리는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내게 딱 달라붙은 채 대공을 바라봤다.
“저 여자였나.”
“응!”
어느 때보다 해맑은 얼굴로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높게 올려묶은 머리가 팔락팔락 흔들렸다.
“아무 이유 없이 아이를 가둬 놓은 건, 분명 이유가 있어서였겠지.”
“아, 아닙니다. 그건!”
언제나 여유로웠던 원장과 불안에 떨어야 했던 우리.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그럼 저 자객들도 모르는 자들이지?”
“저, 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든 도움을 받고 싶었던 건지 원장은 주변을 살피기 급급했다. 그 잠깐의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대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내 따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말하려는 건가?”
“그, 그렇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
“처음부터 그 말에 속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말했으면 정상참작까진 해 보려 했는데, 안 되겠군.”
피식 입꼬리를 틀어 올리는 대공의 표정은 전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런 걸 구분하지 못하는 듯 원장은 어색하게 우릴 보며 웃었다.
정말 어색하게. 갑자기 착한 사람이라도 된 듯, 입꼬리를 내리고 눈꼬리를 내리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진실을 말하면 정상참작 해준다는 그 말 같지 않은 말을 믿는 것처럼.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그게…… 저, 저도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이용당했다? 누구한테?”
“그, 그건……!”
팽팽 돌아가는 팽이처럼 머리를 굴리며 원장이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는 게 보일 정도다.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하며, 덜덜 떨리는 손하며.
‘왜 이렇게 재미있지.’
가슴이 두근두근할 정도다. 원장의 몰락을 이렇게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강인한 탑이 내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으니.
“너 좀 이상해.”
옆에 바짝 붙어 있던 로헨이 팔뚝을 쿡쿡 찔렀다.
“어, 어?”
“표정 말이야. 즐거운 건지, 슬픈 건지 모를 표정 하고 있길래. 약간 뭐라 하지. 미친 사람 같아.”
“미, 미친 사람 같다니! 그냥…… 이건…….”
내 팔뚝에 얼굴을 파묻고선 가까이 다가오는 로헨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라리가 한발 늦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진짜 언니 얼굴 이상해!”
“……아, 안 이상해!”
“맘에 드는 얼굴을 하고 있어!”
“어?”
“언니의 이런 표정도 좋아. 그냥 다 좋아. 언니의 모든 게. 언니를 가지고 싶어.”
순간 등 뒤로 털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날 좋아하는 사람의 말인데, 위험하다 해야 할지. 내 본능이 소리치는 게 들려오는 기분이다. 조심해, 라고.
‘자신의 것을 가져 본 적 없는 아이의 그런 투정이겠지.’
유난히도 반짝반짝 빛나는 라리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런 내가 싫어?”
“아니야. 라리가 싫을 리가. 라리 좋아. 라리도 좋고 로헨도 좋아.”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일 아이들이다. 이후에 만날 일 없는 아이들이니 난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언니 좋아. 너무 좋아! 그치, 오빠야. 언니야 너무 좋지!”
“어어.”
대충 고개를 끄덕인 로헨은 팔짱을 낀 채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느라 멈춘 건지, 아니면 다른 연유로 멈췄던 건지 대공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꽤 기다려 준 거 같은데 여전히 답이 없군. 그렇다면 할 말이 없는 거라 생각해도 되는 건가?”
“저도…… 저도 협박당하고 있으니까요! 저를 지켜 주신다 장담해 주신다면 분명 이야기를…….”
“그사이 핑곗거리를 만들려는 건가? 재미있군. 비겁한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해. 이제 와 목숨이라도 구걸하고 싶은 건가.”
“살려만 주세요. 저는, 저는 정말…… 이용당한 겁니다. 저를 보호해 주신다 말씀해 주시면 다, 다 말하겠습니다.”
“글쎄. 전혀 그러고 싶지 않군. 마지막까지 아이에게 사람을 붙인 인간을 살려 달라? 거기에 설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왔을 거라 생각하나?”
피식 웃은 그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혀를 끌 찼다.
순간 대공이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나?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