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22)화 (22/99)

-22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왔고 모든 게 다 달라졌지만, 떠난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빠르게 걸으면서도 앞서가는 아이를 보며 난 자꾸만 기분이 축축 처졌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뒷길을 통해 보육원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역시나 대공가의 마차가 와서인지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 고요함 끝에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보육원 앞마당이었다. 다행히 난리가 나진 않은 듯 숙덕거리는 소리가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여나 추격자가 이곳까지 쫓아올까 봐 조심히 걸음을 옮긴 그곳엔, 한 달 사이 살이 조금 오른 아이와 대공이 서 있었다.

이전보다 훨씬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대공은 팔짱을 낀 채 말없이 마차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뭔가 매우 이상하다.

“이곳에 내 아들이 있다고.”

날 이끄는 아이를 따라 마차 가까이 다가갔을 때, 대공의 말이 들려왔다. 분명히 아들, 이라고.

‘정말…… 나와 함께 있던 게 라리가 아니라 로헨이라고?’

아까 나한테 누나라고 했을 때 설마 하긴 했지만, 아닐 거라고 믿었다. 보육원에 나와 함께 남은 라리에게서 짙은 로헨의 향기가 느껴졌을 때마다 내가 과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제야 난 현실을 파악하고 앞에 있는 아이를 향해 푸념을 내뱉었다.

“정말 네가 로헨이었구나…….”

우리를 보자마자 손을 마구 흔들고 있던 아이가 눈에 띈 건 그때였다.

심지어 먼저 입양을 갔던 아이. 이제껏 로헨이라 생각했던 아이는 라리였다. 귀해 보이는 드레스까지 입은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양 인형을 안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를 등지고 서 있던 보육원장이 과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네, 네? 아, 아들이라니요? 자, 잘못 아신 겁니다. 대공 전하의 아들이라니요. 이곳에 그런 분이 계실 리가…… 저번에 간 분이 다입니다.”

“그럴 리가. 정말인가?”

“그럼요. 그런 분은 없습니다.”

여기서 대공의 다른 자식이 있었음에도 숨겼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알기에 원장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지난번에 대공이 말없이 넘어간 것만 해도 그녀에게 있어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대공도 자식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고 왔다가 자식을 만났기에 당혹감에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갔던 것이었다. 소설에서랑 똑같이.

그런 상황에서 원장은 또 다른 아이가 있음을 숨겼다. 그때의 원장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숨긴 거지만, 어찌 되었든 나중이 되어서도 원장은 대공에게 다른 아이의 존재 자체를 알리지 않았다.

도리어 대공비와 접촉을 하여 남은 아이를 어떻게서든 없애려고 했으니, 이게 밝혀지는 순간 보육원장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어느 때보다 단호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자신을 변론했다.

“내 딸아이가 분명 있다 했는데.”

대공은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그녀를 바라봤다. 코웃음까지 쳐가면서.

그때. 잠시 고개를 들어 대공 옆 아이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그럴 리가요. 보육원의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보지 못했으니까.”

안쓰럽다 느껴질 정도로 홀로 난리를 치던 보육원장은 주변에 있던 아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쟤, 아니 저기 계신 아가씨와 같이 있던 다른 애 본 적 있어? 다른 선생들은 본 적 있나? 어! 누구든 말해 봐! 대공 각하께서 여쭤보시잖아!”

원장이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대답을 강요했다. 매서운 눈매에, 평소보다 더 굳은 목소리에 아이들도 몸을 움찔거렸다.

그런 이들을 찬찬히 살피던 대공은 피식 웃으며 아주 느릿느릿 목소리를 냈다.

“그대의 말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 것 같군.”

“아닙니다. 아이들이 워낙 낯을 가려서요. 지금 겁먹어서 말 못 하는 겁니다. 보육교사들이 말할 겁니다.”

그제야 겁을 먹은 듯 보육교사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대공에게 진실을 말하는 게 맞을 법하지만, 이미 그들은 박탈자였다.

정서적 박탈자. 아무리 본인들이 맞는 소리를 해봤자,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었기에 희망을 박탈당한 박탈자.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말을 무시하고 원장의 편을 들었으니까.

그걸 이미 많이 겪은 이들은 대공이라 할지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한번 관심 가져 주고 그 이후로 관심을 안 가질 거라는 거.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이들은 권력자의 말보다 이 보육원의 왕인 원장의 말에 호응했다.

대공의 얼굴이 굳는 건 당연했다.

“그럼 내 딸이 거짓말이라도 한단 건가.”

자신이 한 말이 혹여나 나쁘게 흘러가는 걸까 봐 원장은 틈틈이 눈치를 보기 급급했다. 평소와는 퍽 어울리지 않는 행동과 모습들을 해가면서.

“설마요! 거짓말이라기보단 착각하고 계신 게 아닐까요.”

그러는 사이 우리를 찾던 추격자들이 어느새 뒤편으로 다가온 듯 꽤나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원장은 저들이 라리, 아니 로헨을 찾은 줄 알았을 게 분명하다.

어차피 여기서 인정한다 해도 벌을 받을 테고,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벌을 받을 테니. 추격자들이 로헨을 잡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는 계속해서 부정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우스워 보인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대공의 눈치를 보는 꼴이라니.

“라리는! 거짓말 안 해!”

“거짓말하시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잘못하고 계신 거겠죠.”

라리는 양 인형을 품에 꼭 안고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높게 묶은 아이의 양 갈래 머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절대.”

끝까지 아이의 말을 부정하는 원장을 보며 씩씩거리던 라리는 씩 웃더니 대공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천천히 움직여졌다.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을 만큼 굳은 얼굴이었던 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그제야 모든 게 끝났다는 듯 그는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대는 내가 두렵지 않나 보군.”

“네?”

“눈에 뻔한 거짓말을 하길래 하는 말이야.”

그 순간,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대공이 칼을 뽑아 들었다.

“자, 잠시만요. 저, 저를 죽이려고…… 죽이시려는 겁니까.”

대답은 없었다. 대신 칼을 들고 있던 손의 방향을 바꿨다. 정말 원장을 공격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그가 가지고 있던 칼을 우리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오는 칼.

설마 이렇게 죽는 건가 싶어서 눈을 감으려던 그때, 로헨이 날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로헨은 칼이 무섭지도 않은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나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칼이 날아가는 방향을 정확히 바라봤다.

“아…….”

우리에게 날아올 거라는 생각과 달리 칼은 우리를 지나 뒤편으로 향했다.

“윽…….”

뒤에 있던 건 추격자였다. 언제 가까이 와 있었는지도 모를 추격자는 대공이 던진 칼에 제대로 가슴팍이 맞고 말았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대공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마치 축지법이라도 쓴 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와서는 우리를 빤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로헨을.

“너구나.”

“응. 내가 그쪽 아들이야.‘

날 안고 있던 로헨이 불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사이 대공의 옆에 있던 아이도 어느새 달려와서는 내 품에 꼭 안겼다.

“언니야!!”

이러고 나서야 확실히 실감이 났다. 나와 함께 있던 아이는 로헨이고, 지금 대공과 온 아이는 라리즈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언니야’라는 그 말에서 정신이 확 차려지는 기분이다.

황당함에 내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아이는 입술을 뽈록 내밀었다.

“왜 안 안아 줘?”

“응?”

“아! 설마! 언니 그사이 나 잊어버린 거야? 나눈 언니 만나는 날만 맨날맨날 기대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네가 라리즈였어? 그러면 나와 계속 같이 있던 건 로헨이고?”

“설마…… 아직도 몰랐던 거야, 언니야?”

라리즈는 퍽 놀란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방금 전까지 정말 나와 있던 게 로헨인지 라리인지 구분 못 했던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불타올랐다.

아무리 쌍둥이라고는 하나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지.

‘내가 정말 미친 게 확실해.’

아니고서야. 아무리 쌍둥이라 할지라도 모른다는 게 말도 안 된다. 물론 두 사람이 작정하고 속인 것 같은 데다가, 머리 길이도 목소리도 거의 비슷했으니 속은 게 이상한 게 아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냐.’

맘먹고 속이려는 자에게 어떻게 안 속을 수 있겠는가.

부끄러움에 혼자 결론을 내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라리와 눈을 맞췄다.

“아, 아니야. 알고 있었어.”

급히 부정해 봤지만, 로헨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콧방귀를 뀌며 피식 웃었다.

“알기는 뭘 알아. 아까도 내가 너인 줄 알고 라리야, 라리야 하면서 울며 나 찾아다니더라.”

“조…… 조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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