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들을 너무 잘 키워버렸다 (21)화 (21/99)

-21화- 

다행히 개구멍으로 나오면서 뒤를 따라오던 추격자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라리즈와 헤어진 이후 내내 오지 못했던 숲 곳곳에는 라리가 표시해 놓은 작은 표식들이 있었다.

“리본…….”

내가 물건을 싸준 두꺼운 옷을 잘라 만든 듯, 똑같은 색의 리본이 숲 여기저기 나무에 묶여 있었다. 어설펐지만, 그 리본들을 라리가 매달아 놓은 거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순간 눈물이 났다. 날 그리워하고, 로헨을 그리워하던 라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것들을 달아 놓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라리야…….”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리본 하나를 풀어 손에 꼭 쥐었다.

‘내가 꼭…… 널 찾아내서, 그래서 다신 외롭게 하지 않을게.’

그런 다짐을 한 나는 다시금 뛰었다. 혹시나 다른 이들이 라리즈를 먼저 찾을까 봐,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그렇게 뛰고 뛰던 난 결국 돌고 돌아 창고에 도착했다.

멀리 가면 갈수록 리본의 양은 점점 더 많아졌다. 마치 그 밖으로 나갔다는 느낌을 주는 것처럼. 그렇기에 아마도 라리즈는 창고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하아. 하아…….”

하지만 언제나 굳게 닫혀 있던 문은 누가 드나든 듯 활짝 열려 있었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걸 보여 주듯 제멋대로 자라 있던 잡초들은 이미 짓밟혀 버린 후였다.

내 뒤에 추격자가 붙었다는 건, 결국 라리즈를 찾지 못했다는 거라고…… 그래서 안심했었다.

‘내가 바보 같았어.’

아무 일 없을 거라는 그 빌어먹을 생각으로 라리즈를 내버려 뒀다. 이미 소설 속에서도 잘 이겨냈으니까, 이번에도 이겨 낼 거라고. 그저 밤에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신에게 기댈 뿐이었다.

“예상했으면서, 이제 와 내가 상처받으면 어쩌라는 거야.”

스스로 비웃으며, 흔들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여 가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창고 안의 모습은 처참했다. 이미 다 뒤진 듯 그나마 가지런하게 쌓여 있던 상자들과 쓰레기들은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다.

“제발…… 제발. 라리. 라리. 라리……!!”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모진 길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라리를 보내는 거였다. 선택은 아이들의 몫이지만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이곳에 있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로헨은 대공가에 가고, 라리가 이곳에 남는 일.

소설 속 흑막들이었기에, 죽임은 당하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소설을 너무 많이 비틀어 버리면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 당장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들.

그렇게만 생각했다. 단순하게 대공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생각이 많았다.

‘차라리 다른 수를 생각했어야 했어.’

난 그 쓰레기들을 손으로 헤쳐 가며 계속 부르고 또 불렀다.

“라리…… 라리. 어디 간 거야.”

죽지 않더라도 아이가 아무 상처를 입지 않는 건 아니다.

‘트라우마를 없애 준다 해놓고 내가 너무 바보 같다.’

“라리…… 라리.”

제발 무사만 해라. 제발 무사해야 해.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온전치는 않으나 한 번의 생을 살았고, 그렇기에 강하다 생각했는데, 난 나약하디 나약한 인간이었다.

고작 어린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믿을 수 없는 미래를 조금 알고 있을 뿐인 인간.

“소설을…… 바꾸는 일이 쉬울 리가 없잖아. 별것도 아닌 내가, 내가…… 흡.”

콧물과 눈물이 모두 뒤엉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라리를 찾아야 하기에 난 더러워진 손으로 눈을 닦았다. 그때,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아아아!”

너무 아파서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심정이다. 급히 소매로 닦아 봤지만, 그런다 한들 통증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더러운 게 잔뜩 묻은 손으로 눈을 닦으니 죽을 것 같다.

라리도 못 찾은 이 와중에 눈까지 안 보이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때, 갑작스레 누군가의 손이 나를 잡았다. 앞이 안 보이니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 때문에 급히 뒷걸음치려 했지만, 내 몸을 강하게 잡은 팔은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시원한 물이 내 얼굴에 쏟아졌다.

“꺄악. 뭐, 뭐야! 당신 누구야!”

“꺄악은 무슨 꺄악이야. 가만히 있어. 눈도 못 뜨고 있잖아.”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그리워했던, 그 목소리였다.

“라리. 라리야?”

“……어.”

“다행이다…… 정말.”

그러는 사이 깨끗한 물이 흐른 덕에 눈은 떠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인 건 피식 웃으며 물통을 들고 있는 라리였다.

“멍청이. 뭐 해.”

여유롭게 웃고 있는 라리. 난 급히 라리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라리는 한발 물러서더니 폴짝폴짝 뛰어 천장에 가까울 만큼 높이 쌓여 있는 짐 위로 올라가 버렸다.

늑대라도 된 듯 여유롭게 웃던 라리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턱을 괴었다.

난 불안한 표정으로 라리를 바라봤다. 위태위태한 짐 위로 올라가서 앉다니.

“왜 거기로 올라갔어. 내려와, 라리.”

“오지 말라 했잖아.”

“그건…… 우선 내려와. 위험하잖아.”

“위험하지 않아. 이곳에 온 네가 더 위험하지.”

원래도 이렇게 말을 듣지 않았던가. 라리는 말을 잘 들었던 거 같은데.

난 오늘따라 유난스러울 정도로 말대답을 하는 라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저을 때마다 따라 하듯, 장난치듯 라리 또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위험해. 어서 내려와. 어서!”

라리를 향해 팔을 벌렸다. 아무래도 로헨한테 배우지 말아야 할 것만 배운 게 확실하다. 저런 곳에 올라간 것도 모자라 여유롭게 저러다니.

“내가 여기서 떨어지면 못 받잖아.”

“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어서 내려와. 위험한걸.”

못 본 사이 장난기만 잔뜩 늘어난 건지, 라리는 피식 웃었다.

“그 말, 후회하지 마.”

“어?”

그 말을 끝으로 라리는 순간 그곳에서 뛰어내렸다.

“어, 어, 어!”

놀란 마음에 팔을 벌린 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아이를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순식간에 아이는 내 바로 앞쪽에 떨어졌다.

“라리!”

엎어진 건지, 털썩 주저앉은 건지 모를 자세로.

혹여나 떨어지면서 다친 건가 싶어 급히 라리 따라 자리에 주저앉자,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내 머리를 손으로 툭 쳤다.

“안전한 착지.”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라리가 날 바라봤다.

“……라, 라리!”

“나보다 약하면서. 맨날 강한 척하기는.”

“무슨……!”

“거기에 왜 울어. 울기는.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안 울었다 하지 마.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울고 있던 거 알고 있으니까.”

순간 말을 잃은 나는 입만 어물어물했다. 어디서부터 본 걸까. 혹시 내가 혼자 중얼거리는 거까지 들은 걸까. 의문을 담아 라리를 바라봤지만, 라리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모자라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아이는 나를 지나쳤다.

“역시 누나는 멍청이야.”

“멍청이 아니거든……. 그런데 누나?”

“그럼 가자. 동생이 온 거 같아. 느낌이 왔어.”

“자, 잠깐. 방금 뭐라 했어! 라, 라리야!”

놀란 마음에 급히 아이를 따라 나갔지만, 라리는 어느 때보다 여유롭게 앞장서 걸었다.

“너…… 너. 라리즈가 아냐?”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라리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흥얼거렸다.

“그거 대답 안 해줄 거면…… 그러면…… 넌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거야?”

“어.”

그 말에 난 입만 어물거렸다.

“그…… 그럼 왜…….”

“쌍둥이니까. 서로가 가까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아. 그래서…… 누나도 오지 않을까 했지. 그런데 정말 왔네. 바보 같은 모습으로.”

잠시 뒤를 살피며 나를 보던 라리는 피식피식 웃을 뿐이었다. 며칠 만에 만난 아이는 예상보다 꽤 잘 지낸 듯 이전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낸 거야? 추격자가 붙었길래…….”

“어. 나야 잘 지냈지. 너 하나도 안 보고 싶어하면서 엄청 잘 지냈어. 추격자야, 너무 바보 같아서 잘 피해 다녔지.”

걱정하는 나와 달리 아이는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숲길을 빙빙 돌아서. 왜 이렇게 돌아가냐고 묻으려던 그때, 우리가 지나온 길과 꽤 거리가 있는 곳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봐도 우리를 찾는 이의 수상쩍은 목소리가.

“어떻게 도망……다닌 거야?”

“몰라. 그냥 저것들은 기분 나쁜 냄새가 나서 확실히 느껴지거든.”

“냄새?”

정말 동물이라도 된 듯, 아이는 코를 찡긋거렸다.

“그에 반해 누나는 되게 좋은 향기가 나.”

“좋은 향기?”

“……어쨌든. 몰라. 자꾸 묻지 마.”

묘한 표정을 하던 라리는 그렇게 앞장서 가버렸다. 분명 내가 데리러 온 건데, 내가 딸려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아까보다 편안해졌다.

왜 라리가 내게 누나라고 부르는지, 왜 자꾸만 뭔가를 감추는 듯이 이야기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 알았다.

‘이제…… 이별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공가의 마차가 왔다는 건 결국 모두가 떠날 시기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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