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역시나 원장은 날 보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아이샤. 네가 오다니. 그 아이를 불렀는데.”
“아아. 라리요. 아무래도 제가 돌보기로 한 아이니까 같이 왔어요.”
“그래?”
“제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인가요?”
“……굳이 있지 않아도 되는 일이긴 하지.”
지난번 일 때문인지 보육원장은 나를 참 적대시했다. 그게 느껴지기에 난 더 당당히 굴었다.
“하지만 없어야 하는 일은 아니니까 옆에 있을게요.”
“…….”
“아이샤. 네게 주어진 일은 다 했니?”
“네. 일주일 치 일은 어제 다 끝냈어요.”
“하루 만에 끝냈다고?”
“네! 라리랑 놀아야 하니까요. 아참, 라리 일도 다 끝내 놨어요. 지난번에 라리도 하라고 하셔서 끝냈답니다.”
할 말은 다 하면서 라리를 내 뒤로 숨겼다.
“……대단하구나. 아이샤. 다음부터는 네 일을 좀 늘리라고 해야겠어.”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저만 특별 취급 한다고 싫어할 텐데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보육원에서 공평하지 않게 하신다면 반발은 정말 커질 거예요.”
“너는 정말 한마디 지는 일이 없구나.”
“그럴 리가요! 혹시 제가 하는 말들이 기분 나쁘신 걸까요?”
아이들이 떠나면, 난 여전히 이곳에 남아야 하기에 적당한 선을 유지하려 했다.
물론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비꼼은 어쩔 수 없었지만.
“원장님……?”
말끝을 흐려 가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나를 불편하게 내려다보던 보육원장의 얼굴이 풀렸다.
‘어린애가 하는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지. 고작 해야 버러지 같은 애새끼일 뿐이야.’라는 그녀의 부정적인 감정이 여과 없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다.
“기분 나쁠 리가. 짜증은 나지만 괜찮단다. 도리어 나는 똑똑한 아이가 좋아. 똑똑한 아이들은 여러모로 쓸모가 좋지.”
“네! 저는 똑똑해요!”
“그렇지. 그리고 너는 누구 말을 들어야 하지?”
“원장님이요!”
“그래. 내 말을 잘 들으면?”
“칭찬해 주실 거예요! 칭찬해 주시면 원하는 거 하나를 이뤄 주세요!”
그제야 원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와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내 말에 토 달지 말거라.”
“네!”
“어찌 되었든 오늘 오라 한 건, 그동안 라리즌지 뭔지 하는 아이에게 신경 쓰지 못했기에 맛있는 음식이나 줄까 해서 부른 거란다.”
“때리시는 줄 알고 걱정했어요!”
조금의 주저 없이 진심을 내비쳤다. 예상치 못한 내 말에 원장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때리다니. 내가 그럴 리가 있니?”
“가끔 말 안 듣는 애들한테 나쁜 짓 하는 건 봤어요. 그래서 걱정이 많았는걸요. 하지만 원장님은 라리즈 안 때릴 거죠? 저도요?”
“……절대 때리지 않으마. 그런데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했다가는 큰일 날 줄 알아.”
난 기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하죠.”
“그래.”
“아! 그런데 가서 애들한테 말해야겠네요.”
“뭘.”
내 한마디 한마디가 퍽 신경 쓰이는지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고선 날 흘겨봤다.
“아. 별건 아니구요. 원장님이 때린다고는 이야기 안 했는데, 혹시 몰라서 제가 갑자기 라리즈랑 사라지면 보육원장님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라고 말하긴 했거든요. 그렇게 되면 꼭 소문내라고 했거든요. 아이들한테.”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혹여나 내가 사라지면 원장이 그런 것이니 마을에 소문을 내달라고 한 건 사실이지만, 보육원장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라고 한 건 거짓이었다.
아이들이 과하게 이야기하면 할수록 어른들은 그 말을 믿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보다 원장의 반응은 과했다.
“무, 무슨! 헛소리를.”
원장은 모르지만 난 언제나 이런 식의 임시방편을 세워 두긴 했다. 이렇게 써먹은 건 처음이지만, 욕심 많고 능글맞은 그녀는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게 맞다.
“헛소리 아니라 진짜예요.”
그리고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당장 나가서 취소하도록 해!”
“원장님이 라리와 하실 말씀 있다 하셨잖아요. 그 이야기 다 하고 나서요.”
“뭐?”
“어차피 오늘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이따 취소하면 되잖아요. 아, 설마 오늘 무슨 일 있을 예정이라 나가서 취소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만 갸웃갸웃 움직였다.
“너 정말…….”
“토 달지 말라 해서 토는 안 달았는데…… 이런 이야기도 싫어하시는 걸까요?”
결국 참으려는 듯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바르르 떨다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샤. 내가 다정한 것도 언제나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조심하거라. 똑똑한 아이가 입을 잘못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줄 테니.”
웃기는 소리 하네.
다정하기는. 전혀 다정하지 않건만, 그녀는 자기 스스로 굉장히 다정하고 자애로운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사는 듯했다.
그래서 난 어린아이 앞에서 감정도 추스르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해맑게 웃었다.
“헤헤. 장난이에요. 설마 제가 그랬겠어요?”
“…….”
“진짜 했던 거 같기도 하고.”
“네가 날 가지고 놀려고 하는구나.”
“보육원장님이 저나 라리 볼 때마다 너무 무섭게 보셔서, 장난삼아 한 말이죠. 시장에 가서도 한 말이고. 여기저기 하긴 했지만요.”
혀를 삐죽 내밀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참으로 웃기지 않은가.
뻔히 지난번 쌍둥이였던 로헨이 대공의 자식으로 간 거 보면 라리즈도 대공의 자식인 걸 알 텐데, 원장은 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대공비가 이곳에 남은 라리즈를 처리하라 한 거겠지.’
지금 이곳에 라리즈만을 부른 의도가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에는 쌍둥이들이 대공가의 자식인지 몰랐을 테지만, 지금은 알았을 것이다.
대공비와 연락을 했을 테니까.
그러니 다음 명을 받은 거겠지.
‘원래 원장의 스타일은 대공 쪽과 거래를 하는 게 맞을 테지만, 이미 아이들을 학대한 입장이어서 대공비와 다시 손을 잡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도리어 왜 그때 로헨만 데리고 나타난 건지, 너도 뭘 알고 있는 거냐고 물을 줄 알았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신이 학대하던, 그 창고에 가둬 두었던 아이가 대공의 아이인 걸 언급하기조차 싫은 것처럼.
여전히 얼굴이 굳은 그녀를 난 라리와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아! 그런데 부른 이유가 맛있는 거 주시려고 부르신 거였어요? 와! 라리즈. 맛있는 거래.”
내 말에 라리즈는 평소와 달리 분위기를 파악한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거! 좋아!”
“……다행이구나.”
무언가 찝찝한 표정을 짓던 보육원장은 음식이라는 말에 뒤늦게 반응하는 우리를 보다가 책상 위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더니 엄청난 음식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언제 준비한 건지 예쁜 그릇에 온갖 종류의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어느새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울 만큼 그릇 숫자는 엄청났다.
보육원 교사들이 만든 건지, 조금은 어설픈 것들도 있었지만 보기에는 꽤 훌륭했다.
“이리 와서 앉거라.”
“네!”
그사이 보육원장은 우리를 소파에 앉혔다.
엄청 큰 케이크부터 안에 햄과 계란이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 거기에 우유까지.
“어서 먹거라.”
하지만 눈에 휘둥그레 변할 만큼 엄청난 음식들을 보며 나와 라리즈 둘 다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원장이 먹으라는 소리를 했음에도 한참 동안이나 우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 먹지 않는 거니?”
“나는 이런 거 먹어 보지 않아서 맛있는지 몰라.”
“어……?”
그러는 사이 라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라리의 말에 내 의견을 덧붙였다.
“맞아요. 우린 이런 거 먹어 보지 않아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몰라요.”
“그, 그래, 모를 수 있지. 암. 귀한 걸 먹어 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다 설명해 주마. 그러니 먹도록 해.”
정말 의외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고압적이기만 했던 그녀는 꽤 다정하게 포크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아. 그렇게 자르는 거구나.”
“그래. 이렇게 잘라서 먹으면 된단다. 자 이제 알았으니 어서 먹으렴.”
“네! 라고 하고 싶지만 게다가 점심을 많이 먹었더니 딱히 배 안 고파요. 지금 더 먹었다가는 배가 빵 하고 터질 기분이에요.”
그 말에 우리 옆에 앉아 있던 보육원장이 콧등을 씰룩거렸다.
“그, 그래. 하지만 오늘은 이걸 다 먹고 가야 한단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는 건데, 후회하지 않겠어?”
“가요? 어디 가는데요?”
“신전에서 마차가 왔단다. 아무래도 라리즈라는 그 아이가 특별한 듯하여…… 멜로디아 신녀님께서 데리고 오라 했단다.”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보육원장을 바라봤다.
저게 거짓말인 건 안다. 알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여기서 만에 하나 내가 라리즈를 놓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랬어도 상관없었으려나. 강한 아이들이니까.’
아이들을 처음 봤을 때에도, 소설 속에서도 딱히 언급되지 않아 몰랐는데, 아이들은 창고의 개구멍으로 나와 숲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핏줄의 힘 때문인지 아이들은 튼튼했고 두려움 따윈 없었다.
도리어 약한 건 아무 힘이 없는 나란 인간이다. 생존에 관한 거라면 나보다 쌍둥이가 더 뛰어나다.
‘아마도 책 속의 라리즈는 위험한 상황을 미리 알아차려 도망쳤겠지.’
분명 책에서도 로헨이 떠난 후, 혼자 남은 라리즈는 창고에서 5년을 버텼을 것이다. 로헨이 올 때까지. 보육원장이 그런 라리즈를 잡기 위해 몇 번이나 노력했겠지만, 아이는 도망을 치고 또 친 덕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5년 후, 로헨과 만난 라리즈는 만나게 된다. 고생은 했지만 생각보다 건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