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물론. 보육원장은 생각보다 남들한테 보이는 걸 중요시 여겼거든. 오늘은 외출을 자유롭게 해줄 거야.”
적어도 이런 날에는.
“정말?”
“응. 저녁에 불꽃놀이 보러 가자. 내가 사람도 별로 없는 명당 알아.”
“좋아.”
이제는 로헨이 떠난 것에 대한 충격이 많이 가신 듯, 라리는 어느 때보다 밝았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럼 저녁때까지 기다리자. 얼른 밤이 오면 좋겠다.”
“그러게. 옷도 도톰한 거 입고 나오자. 추울 수 있으니까.”
“응!”
해맑게 웃는 라리와 난 방으로 돌아갔다.
방 한편에는 로헨과 셋이 먹고 싶었던 고구마가 썩어 가고 있었지만, 차마 건들 수가 없었다. 시간 계산을 잘못한 나 때문에 추억 하나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또 로헨이 떠나자마자 저걸 버려 버리면, 로헨이 아주 늦게 온다는 걸 라리한테 알려 주는 것 같아서 일부러 그냥 둔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도 방구석으로 고구마 바구니를 밀어 버리고선, 저녁때까지 기다렸다.
해가 뉘엿뉘엿 져갈 때쯤, 라리와 난 도톰한 카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불꽃놀이 명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내가 이런 곳을 언제 왔지?’
불꽃놀이를 볼 수 있는 명소라며 라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기분이 묘했다.
보육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높지 않은 절벽. 걸으면 걸을수록 전에 한 번 와본 듯한 기분이다.
“왜 그래? 안 가?”
앞서 걷던 난 재촉하는 라리의 말에 급히 그곳을 올라섰다.
그러자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심지어 이곳엔 아무도 없다.
‘내가…… 어떻게 여길 알지?’
심지어 여기에 작은 벤치가 놓여 있는 것마저 알고 있었던 듯 돗자리조차 챙겨 오지 않았다.
어느새 내 뒤를 따라왔던 라리는 냉큼 의자에 앉았다.
심지어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어 보이는 절벽 끝에는 위험하지 말라고 난간까지 놓여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봐도 내가 이곳에 온 기억이 없단 거다.
하지만 마치 와본 듯 모든 게 낯익고 자연스럽다.
그때.
“와. 불꽃이다. 이제 시작되나 봐.”
먼저 자리에 앉아 마을을 바라보고 있던 라리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 내가 자신의 옆에 오지 않고 서 있자, 라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재촉했다.
“안 볼 거야?”
“어, 어?”
“왜 이렇게 놀라.”
“안 놀랐어. 그냥 예뻐서 그렇지.”
“여기서 보면 더 예뻐. 어서 와서 봐봐.”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던 난 라리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러는 사이 하나둘 올라오던 불꽃은 하늘을 수놓듯 수십 개가 연달아 쏘아졌다.
불꽃놀이는 보육원 내 방에서 보는 거나 밖에서 보는 거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심히 다르다. 난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봤다.
꿈속에 있는 것처럼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불꽃들은 찬란했으며 아름다웠다.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그런 착각마저 일게 했다.
“아름다워.”
“정말 아름답지.”
라리의 푸른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찬란하게 빛났다.
“응. 로헨도 같이 보면 좋았을 텐데.”
“언젠간 둘이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라리야.”
“둘 말고.”
“응?”
“셋”
“설마 나까지 말하는 거야?”
라리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동인데.”
하지만 아쉽게 그때의 나는 너희들과 같이 있지 않을 거라서.
‘소설 속 흑막들과 난 가야 하는 길이 다른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사라지게 한다 해도 결론적으로 로헨, 라리즈는 소설에 등장해야 하는 아이들이다. 그와 달리 나는 소설 속에 등장도 하지 않는 인물인걸.
그 때문에 난 말없이 입만 오물거렸다. 그걸 알아차린 건지 라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싫어? 아이샤도 우리를 버리고 갈 거야?”
“버리고 가긴 어딜 가. 그냥 난 이곳에 남아 있게 되지 않을까. 로헨이랑 라리는 대공가의 자식인 반면에 난 부모도 버리고 간…… 애인걸.”
심지어 탐욕스럽기까지 했다. 날 버리던 그 순간에도, 애를 팔아먹을 데를 찾다가 마땅치 않으니 날 버린 거였으니까.
엄마가 다른 남자와 바람피우다가 낳은 아이가 바로 나다. 그 때문에 난 라리의 말에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그런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라리의 동그란 머리통이 좌우로 흔들렸다.
“안 되는 거야? 부모가 버리고 간 애면 뭐가 달라? 아이샤는 아이샤인데?”
“응! 달라. 그래서 난 그냥 여기 남아서 보육원이나 할 거야.”
라리의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그러면…… 보육원 하고 싶은 이유는 뭐야?”
“보육원장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도 있고, 불쌍한 아이들이 제대로 컸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그냥 나같이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욕심낼 수 있는 건 이 정도라고 생각해서. 욕심내지 않으려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저번에…… 말했던 거…… 너무 과하게 먹으면 체한다는 그 말이랑 같은 거야?”
자신의 말을 따라 주지 않자 라리의 눈동자는 조금 굳었다.
차가운 눈동자.
마치 짐승의 것처럼 감정 따윈 담기지 않은 그 눈동자가 대공을 닮았다.
그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그를 보고 나니 확실히 느꼈다.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그런 눈빛은 대공과 꼭 닮았다고.
쌍둥이는 누가 봐도 대공의 자식이라고.
“그런 거냐고.”
“아. 어. 그런 거야. 사람은 자기 처지를 잘 알아야 해. 난 그 처지를 잘 알아서 지금 보육원에서 그럭저럭 먹고사는걸. 그러니 더한 걸 욕심내지 않을 거야.”
“……난 욕심낼 거야.”
“뭐?”
“셋이 함께…… 그 대공가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함께할 수 있게 욕심낼 거야.”
참 이상했다.
내 옆에 있는 건 로헨이 아닌 라리즈인데, 눈동자에서 강한 남자가 느껴졌다.
“꼬마 주제에.”
“……두고 봐. 그런 말 못 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기대할게.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는 그날을.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 라리. 나는 너희들의 어린 시절 기억 한편에 남은 것만 해도 행복하니까.”
그러니까 부디 행복하게 살아.
나는 생각지 말고. 대신 원작이랑 엮여서 나쁜 짓 하다 죽지만 마.
뱉을 수 없는 말을 입안에 가득 머금은 채 라리를 내 쪽으로 끌어안았다.
“우리 라리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언니야 걱정하는 거 아냐.”
“다시 언니야라고 불러 주네? 요새는 언니라고 안 불러서 좀 속상했는데.”
“……속상하기까지 했어?”
“어어. 하지만 이렇게 다시 부르니까 좋다.”
라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이리 쑥스러워할까. 귀엽게.
“……자주 불러 줄게. 언니야.”
“이제 라리 같다. 응. 자주 그렇게 불러 줘.”
“응.”
난 그렇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불꽃놀이를 봤다.
다시는 없을 찬란하고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그리고 마침내 그 불꽃놀이가 잦아들 때쯤, 라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다음번에 로헨을 만나기 전까지 라리도 노력해야지.”
“좋아!”
그렇게 우리의 하루가 또 져갔다.
***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로헨이 떠난 지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고작 보름이지만, 벌써 1년은 넘은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사이 라리는 평소보다 더 씩씩하게 잘 먹고, 잘 지내는 듯했다.
하지만 역시나 오늘도 보육원장이 말썽이다.
점심시간 즈음. 오늘도 방에서 식사를 하고 식판을 내려놓던 그때, 보육교사 중 하나가 난처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마치 내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아이샤. 원장님이 같이 있는 그 애보고 원장님 방에 오라는구나.”
“네?”
“아이샤는 오지 말고 걔만 오라고 하셔.”
퍽 난감한 표정을 한 보육교사만 보더라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유추가 된다.
그녀까지 난처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래. 선생님이 그 아이 데려다줄까?”
“아니에요. 저도 길 잘 아니까 제가 데려갈게요.”
드디어 대공비 측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먼저 로헨이 떠나고, 갑자기 사라졌던 원장이 대공비 측과 이야기하고선 일을 꾸밀 거라 생각했는데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이제는 이곳을 지키던 신전의 성기사들도 없다. 그러니 도와 달라할 사람도 없는 그 상황이다.
‘그러니 내가 지켜 줘야지.’
멀어져 가는 보육교사를 보던 난 방 안에 가만 앉아 있던 라리의 손을 꼭 잡았다.
“가자.”
“우리 어디 가?”
“원장에게 갈 거야.”
그 말에 잡고 있는 라리의 손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한 번은 부딪쳐야 해. 내가 함께 갈 거니 걱정하지 마. 잠깐만 갔다 오면 돼.”
불안해하는 라리의 손을 어느 때보다 굳건히 잡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겠어. 지금 와서 피해 버리면 지난번처럼 우릴 강제로 잡으려 할 거야. 그러니 오늘 한 번만 가보자.”
“그러다…….”
“절대 이 손 놓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대책을 세우려면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먼저 봐야만 했다. 소설 속에서 보육원장이 라리를 어떻게 잡으려 하는지 모르기에 어떤 느낌인지 알긴 알아야 했다.
과격하게 나오면 라리를 바로 도망치게 해야만 하니까.
고민하던 라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언니야가 그렇다면 별수 없지. 걱정 마. 난 언니야 믿어.”
“응! 내가 꼭 지켜 줄게.”
그 말과 함께 우리는 방을 나섰다. 유난히 원장의 방으로 가는 길은 먼 기분이었다.
가지 말까, 라는 생각도 중간에 들었지만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결국 우리는 그녀의 방에 노크를 하고선 안으로 들어갔다.
“저희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