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가슴이 마구 떨린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라리는 제 팔뚝만 한 나무를 양손에 잡고선 나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언니. 얼굴이 하얘!”
“진짜 중요한 이야기야.”
“언니야 오늘 이상하다.”
고개를 아기처럼 갸웃거리는 라리즈와 로헨의 손을 잡고 방으로 뛰었다. 자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방으로 가자 몇몇 애들이 신기한 듯 바라봤지만, 워낙 내가 별별 행동들을 다 했기에 그 시선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난 문을 걸어 잠그고 두 아이들을 바라봤다.
바로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가슴이 저미는 기분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꼭 닮은 얼굴, 다른 표정을 짓는 두 아이에게 어떻게 이걸 말할까.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이별을 알고 대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난 둘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제나처럼 손을 바로 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로헨은 뭔가 이상한걸 느낀 건지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라리즈는 불안한 듯 인형을 꼭 껴안았다.
“둘 다. 내 말 잘 들어.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건 이전에도 말했지.”
“응! 언니야는 특별해!”
“뭐가 그리 특별한 건지…….”
“잘 들어. 난 너희의 미래를 알고 있어. 내일 한 남자가 찾아올 거야. 그 남자는 키시미르 블레어 대공이야.”
“그게 누군데.”
별 감정 없이 이야기하는 로헨을 보며 난 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너희들의 부친이야.”
“…….”
“부친?”
“아빠.”
혹시나 모를까 싶어 아빠라는 단어를 말하자, 로헨은 이전보다 더 날 선 얼굴과 표정을 했다.
“……우리한테 가족 따윈 없어.”
“나쁘게 생각하지 마. 그 사람은 너희들이 이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것뿐이야.”
여전히 내 말에 로헨은 맘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굳혔지만, 라리의 얼굴은 밝아졌다.
“언니야. 언니야. 그러면 아빠는 나쁜 사람 아니야?”
“응. 절대 나쁜 사람 아니야. 도리어 너희들을 데려가서 최선을 다해 보살펴 줄 사람이야.”
“좋은 사람……!”
“그걸 어떻게 믿어.”
“그 사람을 못 믿더라도 날 믿어.”
“너도 못 믿어.”
역시나 로헨은 불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로헨에게 살짝 미소 지었다.
“못 믿어도 믿어야 해.”
“……네가 정말 미래를 알고 있다고?”
“응. 만약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너희들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 짐승에 가까운 너희들을 보고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뭘 믿고 너희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걸까.”
난 두 아이들을 창가로 데려갔다.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두 아이들은 어버버 하며 나를 따랐다.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은 이런 작은 세상이 아냐. 아주 넓고 찬란한 세상이지. 너희들은 아주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그런 사람들이야. 그리고 그곳으로 가려면 그 사람을 따라가야 해.”
“……하지만 언니야.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면.”
“누구보다 너흴 사랑해 줄 사람이야. 날 믿어. 이제껏 날 믿은 것처럼.”
라리는 여전히 걱정이 많은 듯 인형을 안은 채 나를 바라봤다.
“우움…… 언니야가 그 못된 사람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긴 했지만…… 하지만…….”
“그 사람이 내일 찾아온다면…… 조금은 믿을 만하겠지만.”
“맞아. 그러니 내 말 잘 들어.”
“하지만 라리는 가기 싫어. 언니야가 좋아. 그럼 언니야도 함께 가자. 응?”
라리는 내 손을 꼭 잡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갈래. 그럼 되게따!”
처음부터 그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서도 눈칫밥 신세인데, 거기서도 그렇게 지내고 싶진 않다.
거기에 대공은 갑작스레 나타난 자신의 아이들의 지지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해 정신없이 바쁠 테고, 그런 상황에서 나까지 데려가면 부담만 늘어날 게 뻔하다.
‘또한 난 이 아이들의 약점이 되어 버리겠지.’
난 가만히 라리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거긴 내가 갈 곳이 아냐. 너희들은 아주 귀한 핏줄이야. 나랑은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 다 똑같은 인간인걸.”
오히려 내 말에 짜증 난 듯한 목소리를 낸 건 로헨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로헨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잔뜩 성이 나 있다.
“다 똑같지 않아. 그리고 나중에 이해가 되겠지만…… 너희들이 갇혀 지내야 했던 건, 그런 취급을 당한 건 누군가가 너희의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아서야.”
“그게 누군데. 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건데?”
난 궁금해하는 로헨의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여기서 말하지 않는 게…….”
소설적인 면의 재미를 더 증폭시키는 거겠지만, 그런 고구마는 원치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대공비야.”
“그럼 가는 게 위험한 거 아냐?”
“아니. 말했지만 대공은 누구보다 너희들을 지켜 줄 거야. 그리고 그곳으로 가야 해. 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 게 더 위험할 거니까.”
대공비는 실제로 아이들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대공가에 가 있는 게 낫다. 정식으로 대공의 자식임이 밝혀지면 함부로 하지 못할 테니까.
거기에 지금은 보육원장이 잠잠하지만 언제 쌍둥이들을 데리고 난리 칠지 모르는 일이다.
“상황이 달라질지 몰라. 그러니 떠나야 해. 두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언니야……!”
“어쨌든 너희와 꼭 닮은 그 남자가 만약 내일 온다면 그때 결정해. 대신에 가게 된다면 한 명이 먼저 가야 해. 로헨. 네가.”
“왜 내가 가야 하지?”
“어? 그래야 해.”
“둘이 함께 가면 안 되는 거야? 가게 되면?”
진지하게 눈썹을 구겼다.
저 말이 맞는 거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다.
‘쌍둥이가 대공가를 먹기 위해서는, 적어도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현 대공비를 무너뜨려야 했으니까.’
그건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대공은 쌍둥이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
이곳에 자신의 자식이 있다는 것도 확실치 않은 정보였으니까. 대공에게 정보를 알려 준 이는 굉장히 제한적인 정보를 줬다. 소설 속에서도 그 인물이 누군지는 끝까지 밝혀지진 않았다.
흑막과 악녀의 어린 시절은 그리 길게 묘사되지 않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대공이 쌍둥이 하나를 대공가에 데려오자 대공비는 미쳐 날뛴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그가 데려오지 않은 나머지 쌍둥이 하나를 얼른 자신이 데려와야겠단 생각뿐이다.
하지만 데려오려는 계획은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그녀는 직접 나서게 된다.
과거에 쌍둥이들은 대공을 믿을 수 없단 이유로 따로 움직였다. 나중에 꼭 찾으러 온단 말과 함께.
오히려 그건 후에 대공비를 무너뜨리는 큰 열쇠가 된다.
‘그렇게 직접 나섰다가, 대공비는 대공에게 덜미를 잡힌다.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은 물론, 쌍둥이들의 모친을 납치한 것도 아이들을 학대하며 키우게 한 것도 모두 그녀임이 밝혀져 대공비는 무너진다.’
그러니 그 모든 미래를 위해서라도 소설과 똑같이 가야 해.
그래야 완벽하게 대공가를 잠식하고 있는 대공비를 무너뜨릴 수 있을 테니까.
그 미래를 위해서라도 소설을 어느 정도 따르는 게 맞다.
‘소설 속에서 홀로 대공가로 갔던 로헨이 어떤 삶을 보냈는지 모르니…… 라리즈를 보낼 순 없는 노릇이다.’
도리어 소설 속에서 대공가에 완벽하게 적응했던 로헨이, 이번에도 완벽하게 적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보내야만 하는 게 맞다.
대공이 있기에 위험할 건 없지만, 그래도 괜히 라리즈를 보냈다가 변할까 봐 그게 두려웠다.
쌍둥이들 중에 대공의 힘을 더 강하게 타고 태어난 건 동생인 라리즈 쪽이었다.
그렇기에 가도 괜찮지만…….
‘후에 대공비를 더 철저하게 무너뜨리려면…… 대공가를 이을, 아들인 로헨이 가야 해. 그래야 더 날뛸 테니. 라리즈를 붙잡아서 로헨의 약점을 만들려고 할 거다.’
또한 이곳에 혼자 남는 라리 또한 소설 속에서도 견뎠고 내가 있으니까. 라리 쪽은 문제가 없을 거다.
그때. 생각하는 내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라리즈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언니야……?”
“안 돼. 꼭 헤어져야 해. 로헨. 내 말이 믿음도 가지 않고 두렵겠지만, 진짜야. 그 남자는 너희들의 아빠고 너희를 무슨 수가 있어도 보호해 줄 거야. 따로 가는 것에 대해서도 찜찜하지만 한 번만 날 믿어.”
모든 이야기를 다 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많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야기는 본래 이야기와 틀어질 게 분명하니까.
“…….”
“한 번만 날 믿어.”
도리어 이제 와 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것만큼 난처한 건 없을 거다.
다행히 내 그런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된건지 로헨이 깊은 한숨을 쉬며 날 바라봤다.
“하아…… 그 남자가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이야?”
“응. 날 믿는다면 그 남자도 믿어도 돼. 그러니 로헨, 네가 가. 라리는 내가 이곳에서 보호해 줄 테니까.”
“……우선 생각해 볼래.”
내 말에 로헨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말없이 몸을 돌려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평소라면 내 말에 무슨 말이라도 덧붙였을 라리도 어쩐지 시무룩한 얼굴로 로헨의 옆에 앉았다.
난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나빠 보이지? 몇 번 친한 척하고 잘해 주는 척하더니 떠나라 해서.”
“…….”
“날 미워해도 괜찮아. 하지만 정말 꼭 가야 해.”
너희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로 살아. 나쁜 생각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