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 말에 큰 위안을 얻은 것처럼 라리가 커다란 눈을 반짝였다.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머쪄!”
“그러니까 어서 씻자.”
“웅!”
그리고 막 라리를 데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로헨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왜.”
“나도 갈 거야.”
“어?”
“……넌 들어오지 마. 내가 라리랑 안에서 씻을 테니까.”
얼씨구.
내내 잘해 주고 여기까지 끌고 들어왔더니 로헨은 여전히 내게 날 선 반응을 해 보였다.
“둘이서 씻을 수 있어?”
“우리 바보 아니거든.”
“알겠어. 그러면 이리 와. 뭐 써야 하는지 설명해 줄게.”
굳이 씻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한방에서 지내려면 조금 씻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단 한 번도 씻지 못한 아이들처럼 쌍둥이들은 매우 더러웠으니까.
그러는 사이 라리즈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푸다닥 움직여 가며 옆으로 달라붙었다.
“언니야. 언니야. 뭐 써야 해?”
“응응. 이거랑 이거랑 쓰면 돼. 이걸로 머리 감아. 이건 몸 닦으면 되고.”
“응!”
“이건 피부 촉촉하게 해주는 거니까 다 씻고 몸이랑 얼굴에 꼭꼭 발라?”
로션까지 설명했으나, 로헨은 문밖에서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미운 일곱 살인가.’
어차피 저렇게 내게 날 선 반응을 할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난 그런 날 선 반응들에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럼 씻고 나와. 난 옷 받아 가지고 올게.”
“응! 아! 언니야. 이거 꼭 안고 있어?”
“이게 뭐야?”
“라리 보물! 헤헤…….”
애착 이불 같은 건가. 담요라고 하기엔 컸고, 이불이라 하기에는 작은. 여름용 홑이불에 가까운 천은 얼마나 오래 껴안고 있던 건지 꼬질꼬질했다.
하지만 태어나 제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라리즈에게 이건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걸 내게 맡겼다는 게, 라리즈가 얼마나 내게 맘을 열었는지 보여 주는 거 같아서 살짝 눈물이 찡 났다.
“언니야니까 맡기는 거야.”
“응. 언니가 이거 가지고 있을게, 걱정 말구 씻구 와.”
“웅!”
해맑게 웃던 라리는 로헨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는 물 트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그때였다.
“아이샤. 옷 가지고 왔어.”
엘의 목소리에 문을 활짝 열려던 나는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들어 쥐똥만큼만 열고 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제일 선두에 서서 옷을 안고 있는 엘과 그 뒤로 즐비하게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이 엄청난 인파는.”
스물에 가까운 애들이 방 앞에 서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보육원에서도 문제 일으키기로 유명한 애들이다.
“어, 그게…… 다 궁금해해서. 원래 새 친구는 소개하는데 소개도 안 해주고.”
“……신경 쓰지 마.”
“응! 난 신경 안 쓸래!”
엘은 혹여라도 내가 성질을 낼까 봐 두려웠던 건지 품에 안고 있던 옷을 급히 내게 넘겼다.
“그럼 난 갈게!”
“응. 엘, 고마워.”
하지만 몰려든 아이들은 문 너머를 훔쳐보기 바빴다.
“너네 안 가?”
“아이샤는 너무 나빴어. 맨날 자기 혼자 다 차지하려 해.”
“맞아, 맞아. 그러지 말고 구경시켜 줘.”
“……너네 내가 요새 친절하게 대해 주니까 정신 못 차리지?”
“으아! 마녀 아이샤가 나타났다. 다들 도망가!”
입술을 들썩이며 아이들을 노려봤다. 아주 조금 겁먹은 건지 살짝 뒤로 물러섰던 애들은, 금세 내 앞으로 다가왔다. 금붕어도 아니고 그새 까먹었나 보다.
그 때문에 성질이 와락 날 수밖에 없었다.
“야. 너네 안 가?”
“아, 구경시켜 줘. 어?”
정도를 점점 지나치던 애들은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슬쩍 문을 밀었다.
이것들이.
“애들이 무슨 물건이야? 구경시켜 주게?”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호오. 잘됐다. 너네 내가 요새 아주 착해 보이지? 그래서 내 말에 물러나지도 않고 이딴 짓을 하는 거지? 이참에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지. 다 덤벼.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
“으아! 도망쳐!”
그동안 내 평판이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보여 주기라도 하듯, 애들은 앞다투어 도망갔다. 방금 전과 달리 아주 멀리멀리. 물론 꽤 거리를 둔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방금 전처럼 방 안으로 들어오겠다 하는 애들은 없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고 있어.”
대부분의 보육원 아이들은 매우 착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언제나 물고기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 것처럼, 보육원 아이들 중에서도 급이 나뉘었다.
보육원이라고는 하나 가끔 제 자식을 찾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특수한 경우인데 얼마의 돈을 주고 아이들을 이곳에 맡기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은 대놓고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듯 나머지 아들을 깔보기 일쑤였다.
게다가 비슷비슷한 나이 또래였으나 유난히 덩치가 큰 아이들은 다른 애들을 때려서 자신이 특별하단 걸 표출하곤 했다.
“아주 요새 내가 쌍둥이 살피느라 못 봤더니 난리네, 난리.”
절로 혀가 끌끌 차진다.
약한 것들을 괴롭혀서 자기의 강함을 내비치는 인간들이 제일 싫다.
‘나중에 내가 보육원장이 되면 퇴소 1순위야.’
멀어져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난 문을 걸어 잠그고선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씻는 중인지 욕실 안은 시끌벅적했다. 침대로 다가간 나는 한가득 쌓인 옷들을 골라 냈다. 두 아이들이 입을 만한 옷으로.
마침 새건 아니나, 함께 사서 같은 디자인의 옷들이 몇 개 보였다.
“쌍둥이니까 똑같이 입히면 얼마나 귀여울까.”
생각만 해도 귀여울 것 같은 기분에 난 골라 놓은 옷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래서 엄마들이 쌍둥이들 옷을 똑같이 입히나 보다. 얼마나 귀여울까. 특히 우리 라리가.
헤벌쭉.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때.
“언니야아아아!”
무슨 일이라도 난 듯 욕실 안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놀란 마음에 급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인 건, 샤워 후 촉촉해지라고 놓은 로션을 온몸에 바르고선 거품 내는 타월을 열심히 문지르는 로헨이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급히 제 몸을 가린 로헨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왜, 왜 들어왔어!”
“라리가 불러서 들어왔잖아. 그보다 로헨 너, 너 뭐 하는 거야.”
“……뭐 하기는! 여기 있는 걸로 씻으면 된다며!”
“그렇긴 한데…….”
“거품도 안 나고. 속였지!”
“아니야. 그거 말고 저 옆에 걸 써야 해. 헷갈리지 말라 했잖아. 새하얀 게 로션이라고.”
버럭 소리를 내지르던 로헨은 투명한 용기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러더니 황당한 표정으로 병들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내가 설명할 때 잘 봤어야지. 안 보더니, 그게 뭐야. 로션을 온몸에 바르다니.”
내가 허탈하게 웃으며 로헨을 바라보자, 라리가 쪼르르 달려와 이르듯이 제 오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언니야! 오빠가 계속해서 저거라 그래따니까! 근데 거품도 퐁퐁 안 나구…… 계속 우기기만 해따니까!”
아이처럼 내게 쨍알쨍알 이르던 라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난, 턱을 쭉 빼고선 로헨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로헨. 어때. 누나가 있어야겠지?”
“누나는 무슨. 아씨, 몰라. 난 대충 씻고 나갈래.”
그러더니 물로 몸을 대충 헹구고선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아직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채로.
“히잉…… 언니. 오빠가 내 몸에도 저거 발랐어.”
“괜찮아. 괜찮아.”
난 시무룩한 라리를 보며 손수 몸을 닦아 주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던 라리는 어느새 내 손에 몸을 맡겼다.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가득 차 있던 바디샤워를 반이나 비우고 나서야 라리의 몸은 깨끗해졌다.
머리카락은 또 얼마나 떡이 져 있었는지.
결국 나까지 홀딱 젖고 말았다.
“나가서 옷 갈아입어야겠다.”
“응! 헤헤. 언니야. 나 깨끗해져따?”
수건으로 머리랑 몸을 닦아 내주자 라리는 기쁜 듯 배시시 웃었다.
“그러네. 원래도 이뻤는데 더 이쁘네?”
“정말? 헤헤.”
“어서 나가자. 옷도 마침 왔어.”
“좋아!”
어느 때보다 환히 웃던 라리는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어. 더러운 오빠다.”
“……안 더럽거든.”
“더러워. 에이, 냄새나.”
씩씩거리며 옷도 입지 않고 한쪽에 있던 로헨은 제 동생을 노려보다가 욕실로 후다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오빠는 이러케 해야 말을 들어.”
“그래?”
“응! 말 이쁘게 하면 안 돼. 이렇게 말해야 알아듣는다니까. 헤헤. 그런데 언니야. 나 옷 어떤 거 입어?”
“이거! 어때. 로헨이랑 똑같이 입으면 예쁘겠지?”
“……언니야랑 똑같이 입으면 안 돼?”
방금 전까지 신난 듯 이야기하던 라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빠랑 같이 입는 거 싫어?”
“……아니. 하디만…… 라리는 언니야가 더 좋아.”
“고맙기도 해라. 아! 라리한테 따로 줄 거 있어.”
“나한테 줄 거?”
갑작스런 말에 라리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지난번 시장에 갔다 온 엘에게 사다 달라 했던 인형을 내 침대에서 꺼내었다.
“이거.”
“와…… 이게 뭐야?”
“인형! 항상 라리는 품에 뭔가 안고 다니는 거 같아서. 혹시 애착 이불 같은 거면…….”
그 말에 난 아까 욕실로 뛰어가면서 침대에 내려 두었던 담요를 바라봤다. 라리 또한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짜나 언니야. 이거…… 이거, 오빠가 만들어 준 거야.”
“그래?”
“내가 인형 가지고 싶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