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신조선 최신 트렌드 분석
땀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천천히 부드러운 곡선의 동작을 만들어 내려는 녀석들을 보니, 만족스러웠다.
“남사당패에서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강인하고 날렵한 동작들을 배우다가, 이곳에 와서 깃털처럼 되는 연습을 하니 녀석들에게 없었던 부분이 많이 채워질 듯 보입니다.”
“남사당패의 공연이라면, 저도 저잣거리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녀석들이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장미가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사흘간의 맹훈련 끝에 기본기가 어느 정도 잡혔다는 판단이 들어 멤버들에게 칼을 한 자루씩 건네었다.
나는 칼을 든 멤버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검무를 춰야 한다.”
풍월각의 다른 기생들이 나와 은장도로 춤을 추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뿐하고도 날렵한 춤사위들이었다. 어제 보았던 부채와는 달리 약간의 절도가 서려 있는 그런 춤.
칼을 든 훤과 열하는 곧잘 춤을 따라 하였다.
현명이와 로버트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알려 주는 사람에게 맞춰 천천히 동작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남사당패에서 훌륭하게 동작을 해내던 별호가 의외로 부진했다.
“관절을 자꾸 꺾지 마십시오!”
장미의 호령에 별호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익숙해서 그러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았다.
저녁이 되자 별호도 꽤 검을 유려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사내들이 검을 들어 추는 것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합니다.”
장미의 감탄에 나도 씩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내 말 한마디에 녀석들은 세상을 가진 듯 기뻐했다.
풍월각에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멤버들이 열성적으로 연습을 했다.
밤에도 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저마다 마당에 나와 서로의 동작을 잡아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검을 다루는 것을 배웠던 훤과 열하가 열성적으로 멤버들을 가르쳤다.
마당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일을 하는 줄로만 알았던 장미가 얼굴이 붉게 상기해 우리가 있는 별채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소문이 이상하게 난 것 같습니다. 저희 풍월각에 머무시다가요!”
녀석들의 동작을 예리하게 지켜보던 나는 장미에게 어이없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남정네들이 단체로 풍월각을 전세 내어 문란하게 논다는 이야기가 돈다고 합니다.”
문란하게 논다니.
매일 밤 연습하고 지쳐 자는 애들이?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요.”
내 반응이 덤덤하자 장미가 되레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서 손님들이 자꾸 줄을 서서 자신들은 왜 안 받아 주느냐고 성화입니다. 그것이 아닌데, 누군가 헛소문을 뿌리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아는 이는 안성패뿐이오. 마지막으로 그자들과 함께 있다가 헤어졌거든.”
나의 말에 장미가 인상을 썼다.
“아니, 같은 예인들끼리 돕지는 못할망정.”
“어쨌거나, 풍월각의 장사를 방해하게 되어 미안하오.”
“헛소문인걸요. 그리고 오히려 그 소문으로 이곳에 오려는 손님들의 발길은 더 늘었고요.”
인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사뿐히 다가와 있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동작이나 하나 더 봐주쇼, 대표 누이.”
쿵쿵 걷던 별호가, 이렇게 사뿐한 걸음으로 오다니……!
“장하다! 응? 이제 사뿐히도 걷고!”
내 칭찬에 별호가 헤헤 웃고는 곧 진지하게 칼을 들고 부드럽게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 광경을 본 장미도 감탄했다.
“어쩜, 체력이 있으니 저렇게 동작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넘치는군요!”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그것은 영원이었다.
모두들 소문이 어떻게 들려오는지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밤이 깊도록 영원은 그 자리에서 묵묵히 동작을 이어 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별호의 작사 능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음에 맞춰 적재적소에 단어들을 배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사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경험이 있었다.
“별호야, 너 혹시 사랑을 해 봤어?”
내 물음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저는 순정남이라니까요!”
“제 입으로 순정남이라고 하는 놈 치고 순정남은 없다고 했거늘.”
“나는 내 임을 기다릴 거라니까!”
열하의 놀림에 별호가 발끈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별호가 이렇게 사랑 노래를 썼다니.
나는 웃음기 뺀 얼굴로 진지하게 궁금해져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사랑을 잘 알아?”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해 가는 사랑의 모습을 담은 노래였다.
밝은 분위기의 노래였지만, 가사가 매우 서정적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을 해 봐야 아는 것이라면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자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소.”
먹보에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별호가 진중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 나갔고, 저마다 장난을 치던 멤버들도 숙연해져 별호를 바라보았다.
“사랑의 형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생각한 사랑은 이런 것이오.”
지키는 사랑.
자신의 앞에 세월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지만, 그 시간을 견뎌서 결국 그대에게 닿는다는 메시지.
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저 밥을 많이 먹는 자로 알았는데 의외로 이런 재주가 있구나. 글은 어디서 배웠지?”
별호가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종살이할 때 어깨너머로 귀를 열고 눈을 열어 배웠소. 누이를 만난 후로는 모르는 글자가 생길 때마다 물어보았고.”
별호가 물어보는 것에 대해 그냥 별생각 없이 알려 주었던 터였는데, 그가 나를 바라보며 고마움의 눈빛을 보냈다.
“곧잘 따라온 것도 네 능력이다.”
나는 말을 마치고 괜히 민망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월의 서’라는 제목과 음악의 멜로디만 있었을 뿐인데 그것으로 세월을 넘는다는 서사를 담아내다니.
별호가 머슴 생활을 하며 머릿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고민과 성찰들을 해 왔는지 헤아려져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도 같았다.
완벽한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미와 함께 공연하는 여성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별호는 로버트와 함께 노래를 조금 더 손보도록 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오너라.”
훤과 열하, 현명이가 내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연습실로 사용하는 후원으로 넘어갈 참이었다.
노래를 완벽히 수정한 뒤 후원으로 오라고 별호와 로버트에게도 일러두었다.
“너희들 중, 악기를 다뤄 봤던 사람이 있어?”
내 물음에 셋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취미로 배웠어?”
훤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하루 중, 악기를 배울 시간이 따로 있어 대금을 배웠지.”
열하는 눈을 감으며 추억을 되짚었다.
“나는 몰래 배웠소. 책방에 갈 때마다 그 집의 거문고 소리가 아주 낭창했거든.”
현명이가 개구진 얼굴로 물었다.
“책방에서 거문고를 알려 주신 분과 정분이 나셨던 것은 아닙니까?”
열하가 부채를 탁 펴 들고 현명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남자였다.”
현명이가 시시하다는 듯 입을 내밀었다.
“저는 어머니가 알려 주어 배웠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진 후에는 아쟁을 팔아야 했지만요.”
악기를 다뤄 본 적이 있구나.
나는 수첩을 꺼내 다시 한번 아이들의 능력을 정리했다.
첫 무대가 곧 데뷔 무대였다. 데뷔 무대에서 아무런 임팩트를 주지 못한다면, 소리 소문 없이 묻히는 것은 서울의 엔터테인먼트 시장과 크게 다를 리 없다.
이곳 역시 쟁쟁한 재주꾼들이 넘쳐 나는 시장이었다.
멀티가 된다고 해야 할까.
장미를 비롯한 풍월각 소속 기생들은 삼패 기생이었지만, 이번 나라에서 내려온 공고를 기회로 일패 기생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시를 외우고 연주나, 노래, 춤, 외모 관리 모두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다.
신분을 바꾸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것과 서울에서 연예인으로 뜨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
그 둘의 모습은 똑같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로, 풍월각의 기생들 중에서는 서울에서 내가 매니지먼트를 했다면 캐스팅했을 인물들이 몇 명 있었다.
이번 경연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했다.
남사당패는 거칠고 준비되지 않은 모습들이었지만, 그대로 ‘짐승돌’ 같은 매력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날것의 느낌보다는 정갈한 꽃도령의 느낌을 좀 더 선호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분석이긴 했지만.
남사당패 역시 조선이라는 시장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은 자들인 것은 분명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대중의 반응이었다.
생각보다 풍월각의 기생들에게 반응이 더 좋은 것은 여성들이었다.
장미가 하고 다니는 장신구나 저고리와 치마의 색을 따라 입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남사당패의 기술들을 동네 골목에서 꼬마부터 어른까지 따라 하며 노는 남성들의 모습도 많이 봤던 터였다.
그 둘은,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아이돌은 우상이라는 뜻이다.
누군가를 동경하며 그 모습을 닮아 가고 싶게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매력을 겸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맞는 인성, 덕망을 지녀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은 서울에서 매니지먼트할 때에도 내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었고.
우리는 기생들과 남사당패의 장점을 다 합쳐 놓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야 했다.
“처음, 반주 부분에 너희가 악기를 들어야 한다.”
내 말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한 곡을 하는 내내 악기를 하면 악기를 하는 것이지 중간에는 그럼 무얼 하오?”
“처음 반주 부분에만 너희가 직접 연주를 할 것이고 그 뒤부터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거야.”
훤이 팔짱을 끼고 나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니, 누이의 말은 실험을 하겠다는 거요?”
“악기를 들었다가 놓고 갑자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것은 뭐랄까, 방정맞아 보일 것 같기도 한데.”
이들의 걱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저마다의 역할이 딱딱 정해져 있었다.
춤을 추는 자는 노래를 시작하면 춤만 추었고, 남사당패에서도 상모를 돌리는 사람이 바람잡이를 하다가 상모를 돌렸다.
한마디로 각자 자신의 역할이 딱딱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 할 거야. 한 사람이 춤만 추고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그런 분류를 따로 하지 않을 거야.”
내 말에 현명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여태 훈련한 모든 것을 한 무대에 다 쏟으면 되겠네요.”
“그래, 쏟다 못해 폭발시켜야 해. 이곳의 시장도 이미 포화 상태 같으니, 너희는 기존과는 달리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에게 나아가야 해. 기존에 있던 것들을 넘어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려면 다 하는 수밖에 없어.”
내 말을 들은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아이돌이 되어 이루고 싶은 저마다의 꿈이 영원에게는 제각각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럼 이제 하는 거야.”
내 말에 그들의 눈이 의지로 불타는 것이 보였다.
검에 가장 익숙한 것은 역시나 훤이었다.
훤이 노래에 맞춰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나는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방금, 그거 똑같이 다시 할 수 있어?”
“물론.”
훤은 아까 했던 동작들을 연결해 보였다.
확실히 풍월각에 온 뒤로, 멤버들의 동작들이 전과 달리 부드러운 물결을 싣고 움직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