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폭포 너머에는
좁은 정자의 난간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성큼 걷는 이, 딱 보기에도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 매우 묵직해 보이는 탈을 쓰고 객석의 호응까지 유도하는 자들이었다.
꼭두쇠가 선심을 쓴다는 듯 말했다.
“너희들은 우리처럼 곡예보다는 노래나 낭창낭창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거든, 내 생각엔. 원래 알려 주지 않는 정보인데, 하나 일러 주지.”
그가 손끝으로 산을 가리켰다.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는 장엄한 산이었다.
“저 폭포 기슭에는 소리의 신이 살아. 노래가 있어야 춤이든 기술이든 알려 줄 것이 아닌가?”
히죽 웃고는 꼭두쇠가 다시 한번 말했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득음 전문 소리꾼 양반이야. 저기 먼저 가서 노래를 배워 와. 그러면 우리 기술을 알려 주겠네.”
* * *
대체 이 조선에 와서 등산만 몇 번인지.
은둔 고수들이라 함은 왜 다 산에 숨어 있는지 원망스러웠다.
나는 고개를 돌려 훤에게 물었다.
“너는 대체 왜 산에 숨었니? 평지 아무 데나 오두막에 숨지.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운 법인데.”
훤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과 떨어져 나 자신을 들여다봐야 했다. 너희들도 종종 그런 시간을……”
훤의 말이 길어지는 느낌이 들자 별호가 말을 끊으려 일부러 하품을 길게 했다.
“하암, 그때는 호랑이 때문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지 뭐요.”
현명이가 눈을 반짝였다.
“진짜 호랑이랑 맞닥트린 겁니까?”
저들끼리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녀석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체력이 다들 좋긴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가파른 산을 오르는데 떠들 힘도 있다니.
로버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원 대표, 플리즈 기브 미 썸 워터.”
“물 마시고 싶다고? 조금만 참아.”
내가 로버트의 말을 듣자마자 해석해 내자 열하가 의외라는 듯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대표 누이는 주막을 하며 어찌 그렇게 잉글리쉬라는 것을 배웠소?”
“원래 대표는 다 잘하는 법이다.”
그러나 곧 이런 재잘댐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눈앞에 발 하나만 간신히 디딜 수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절벽 너머에는 우리가 밑에서부터 보고 올라온 그림처럼 흐르는 폭포가 있었고.
“얘들아, 아무리 고수가 자신을 들여다본대도 저런 절벽 너머에 살아야겠니?”
내 말에 녀석들은 기가 찬 듯 웃었다.
다리가 길쭉한 녀석들이라 그런지 다들 균형을 잘 잡으면서 성큼성큼 좁다란 길을 잘도 건넜다.
훤, 별호, 로버트, 현명, 열하. 그리고 맨 뒤를 내가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따 내려갈 길이 아득했다.
서울에서 이 산들은 다 정갈한 산책로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리 공부 좀 열심히 할걸.
마지막 돌을 디딘 후, 열하의 손을 잡고 무사히 건너편에 가자마자 괜찮은 척했지만, 실은 돌아갈 길이 까마득했다.
서울에서는 아주 일상적으로 보컬 트레이너를 만날 수 있었는데.
보컬 트레이너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스태프들을 어떻게 발굴해 내야 할지 골머리가 아팠다.
인터넷이 없으니 정보도 부족했으니까. 발로 뛰는 조선 매니지먼트의 일환이구나.
건너편의 폭포는 생각보다 더 신비로웠다.
돌이끼들 사이로 가재가 다니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재잖아? 이건 1급수야. 로버트, 마셔도 돼!”
내 말에 다 같이 물을 두 손에 담아 들이켜는데, 어디선가 크고 맑은 사람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나만 들은 것 아니지?”
별호가 두 눈을 굴리며 물었다.
사람의 성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고 큰, 그러나 아름다운 신비로운 동굴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게 저 동굴 안쪽인 것 같은데.”
혼자 왔다면, 정말 뒤돌아 갔을지도 몰랐다. 폭포가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저 너머의 동굴에 무언가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초록 이끼들 틈 사이로 조심조심 발을 디뎠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니 백발의 산신령 같은 남자가 웃옷을 벗고 폭포수를 맞으며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열하야, 저 고수님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까 털보는 그저, 은둔 고수가 있다고만 했지, 이름을 알려 주지는 않았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들에게 멀리 떨어지라고 손짓해 보였다.
“너희는 여기 있어. 내가 가서 말을 걸어 볼게.”
남자는 뭔가 영적인 존재인 것만 같아 보였다. 귀신이라면 나만 잡아가라는 심정으로 나는 녀석들에게 겁먹은 표정을 숨기며 덤덤한 척했다.
그런데 녀석들은 입을 가리며 쿡쿡 웃는 것이 아닌가?
“누이, 안 죽소. 왜 그리 무서워하오?”
“우리가 가도 된다니까. 참.”
“겁쟁이 아원, 스케리하면 돌아와.”
현명이만 걱정스러운 표정이었고 훤은 팔짱을 끼고 웃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물어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 상, 하, 면, 도! 망! 가!”
뭔가 조선에 오니 내 위치가 전 같지만은 않았다.
서울에서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주로 보여 줬던 나인데, 이곳에 오니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아주, 대표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보여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안녕하십니까!”
내가 소리쳤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여전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그가 입술을 닫고 있는 것 같음에도 그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폭포 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악을 써서 다시 크게 외쳤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곧 소리가 멎고는 동굴 안쪽에서 한 사내가 나왔다.
“스승님,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산신령을 흔들어 깨우자 그가 그제야 감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인가?”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소리의 신이시라고 하여, 저희 아이들에게도 그 능력을 훈련 시켜 주실 수 있을까 싶어서요.”
산신령의 거처는 동굴 안이었다.
그곳은 꽤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폭포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산신령은 우리와 함께 동굴에 들어간 뒤에도 말없이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내의 목소리는 작고 부드러웠지만 직선으로 귀에 잘 꽂히는 목소리였다.
“저희 스승님께서는 득음하는 것을 아무에게나 전수해 주시지 않습니다.”
나는 끄덕이면서 선한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체구가 몹시 작고 통통했지만 분명 엄청난 소리통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선생님은 스승님의 수제자십니까?”
그가 부끄럽다는 듯 눈을 떨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산신령 같은 자가 눈을 떠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쭉 훑어보았다.
“고수라서 그런지 우리 관상만 봐도 노래를 잘할지 아닐지 아십니까?”
별호의 물음에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 있겠느냐! 불러 봐야 알지!”
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부탁했다.
“저희에게는 노래가 필요합니다. 노래 기술 역시 이곳에 상주하면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값은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난 아무에게나 노래를 주지 않는데?”
산신령이 감은 눈 한쪽을 뜨고는 허밍으로 음을 불러 주었다.
“음음으으음. 이 음을 찾을 수 있겠느냐?”
“음음으으음.”
“호오, 그걸 그리 바로 따라 하는가?”
“그것보다는 흐음음음흠. 이게 더 낫지 않아?”
“!”
다들 놀랐지만 난 내심 쾌재를 불렀다.
로버트에게는 음에 대한 절대적 감각이 있었다.
산신령의 허밍보다 훌륭하게 로버트는 지지 않고 음을 따 냈다.
제자가 옆에서 미소 지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넌지시 물어 왔다.
“어디서 저런 아이를 찾으셨습니까? 안목이 대단하신데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찾게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산신령은 기특하다는 표정이었다.
로버트가 허밍으로 따 준 음을 받아 풍부한 애드리브를 선보이자 산신령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방금 부른 노래 하나를 너희에게 주도록 하겠다. 다만, 훈련을 받아야 해. 아직은 사람의 마음에 닿지 않으니 말이다.”
로버트와 고수가 맞춰 본 멜로디는 단순했지만, 분명히 적당한 중독성과 애절함이 서려 있는 노래였다.
이제 이 노래에 맞춰 춤만 짠다면 영원의 대표곡이 하나 생기는 것이었다.
훈련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연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 *
그러나 훈련은 생각보다 종잡을 수 없었다.
서울과 달리 체계적인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자연과 맞서는 훈련 같기에 나는 보면서 미심쩍은 눈을 거둘 수가 없었다.
영원은 아까 그 산신령처럼 폭포에 앉아 한 명씩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것도, 아주 청아하고 곧은 소리가 나올 때까지.
게다가 다 함께 폭포에 들어가 순서대로 ‘아!’ 하는 소리를 내는데, 산신령이 아닌 그 제자가 직접 나서서 가르쳤다.
“조금 더 열린 음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배에 힘을 좀 더 주고 호흡을 모아 뱉어 보십시오.”
산신령은 내 옆에서 그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당신이 직접 지도하지 않는 거냐고 목까지 물음이 차올랐지만. 노래를 생각해 꾹 참았다.
잠시 후, 나는 산신령이 아이들에게 가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다가갔다.
제자는 손에 한지들을 쥐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악보인 듯 보였다.
“직접 기록하신 겁니까?”
“머릿속에 잘 있다가도 어느 날엔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만 알아볼 수 있도록 적었지요.”
하지만 내 눈에는 어딘가 엉성해 보였다.
체계가 좀 더 있으면 좋을 텐데.
문제점을 발견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산신령이 훈련을 시킬 동안, 나는 제자에게 직접 종이에 붓으로 악보를 그리는 법을 가르쳐 보기로 했다.
“음을 모두 머리에 넣고 다니다가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 기록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 드리지요.”
놀랍게도 그는 내가 알려주는 개념을 금방 습득했다.
“우와. 정말 신기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제 머릿속 모든 음들을 다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누구나 당신의 음악에 대해 이해하고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보름이 흘렀다.
영원을 가르칠 때 말고는 꿈쩍도 않고 동굴 안에 들어가 있던 제자가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많이 완성되었습니다. 목 상태가 각자 성격처럼 제각각이나 분명 어우러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칭찬인 겁니까?”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기본기가 있어 발성이 금방 잡혔습니다. 보십시오. 폭포를 뚫고서도 들리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들리지 않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이제는 폭포를 뚫고 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전보다 맑고 투명하게. 산소를 머금은 목소리였다.
각자 개성은 유지한 채로, 더 아름다워진 하모니를 보니 감개무량할 지경이었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니……!
좁은 동굴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낸 시간에 대한 보상이 밀려오는 듯했다.
녀석들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열하가 뿌듯한 듯 내게 말했다.
“이것 보오. 폭포 정도야 금방 뚫는다고 하지 않았소?”
그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산신령의 호령에 풀피리를 불기도 하고 배에 돌을 올린 후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다들 주먹구구식 훈련도 따라 주었다.
제자의 트레이닝은 정말 눈여겨볼 만했다.
폭포 앞에서 소리의 공명에 대한 이해와 훈련을 시켰고,
본질적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보컬 트레이닝을 진행하는 내가 찾던 그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산신령과 제자, 그리고 내 앞에서 영원은 박자를 맞추며 폭포를 배경 음악으로 노래를 불렀다. 제자가 직접 그린 5선보를 기반으로 다들 피나는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처음, 그 산신령이 줬던 그 음을 기반으로 저마다 하모니를 빚어내 더 완벽함에 가깝게 노래를 편곡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