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남사당패와의 조우
“다들 몸 조심히 건강히 다녀오시지요. 현명아, 잘 다녀오너라.”
현명의 어머니가 문 앞까지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어머니, 저 없다고 끼니 거르지 마시고 밥 꼭 잘 챙겨 드세요!”
눈가에 물기 어린 기색이 완연한 어머니와는 달리 현명이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현명이는 그녀가 점처럼 작아져 이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오랫동안 뒤를 돌아보았다.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설 때면 언제나 복잡한 감정이 든다.
나뿐 아니라, 다른 녀석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겠지.
나는 장옷을 다시 단단히 잘 여몄다.
각오를 갖고 길을 떠나는 만큼, 본격적으로 시장 조사가 필요했다.
최근, 나라 전체에 궁에서 내린 방이 내려왔다.
내용인즉, ‘조선 최고의’ 재주꾼을 뽑겠다는 이야기였다.
‘궁궐에서 여는 큰 연회에서 공연할 재주꾼들을 모집해 그중 한 무리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특전으로는, 궁중 소속이 되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고 신분 상승까지도 가능하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이번 궁궐의 아이돌이 된다면, 조선 백성에게 국민 아이돌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였다.
공개적으로 이런 방이 내려오자, 남사당패나 기생집들이 시끌시끌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멤버들을 쭉 훑어보았다.
내 눈에는 잘나 보이지만, 대중적으로 사랑받을 만한 재주는 아직 발현하지 못했다.
신조선의 시장에서 영원이 톱 아이돌이 되는 것이 목표니까.
아직은 다이아몬드가 아닌 원석이고 저 원석들을 어떻게 갈고닦을지는 전적으로 이제 내 매니지먼트 능력에 달려 있었다.
서울과는 달리, 제대로 된 스튜디오나 트레이너를 원활하게 고용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다.
직접 내 발로 사람들을 찾아내야 했다.
내가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별호의 배에서 크게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열하가 조금 짜증을 내며 물었다.
“아까 밥을 두 대접이나 먹어 놓고는 지금 소리가 대체 왜 나느냐?”
별호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내 몸을 봐라. 이렇게 큰데!”
로버트가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었어. 도시락!”
훤이 그 옆에서 로버트의 어순을 바로잡아 주었다.
“내가 도시락을 만들었소이다. 자, 따라 해 보거라.”
“그래, 내가 도시락 만들었어. 됐냐? 이 짜식아.”
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고로, 말은 자신의 거울인 것. 저 두 놈과 어울리는 바람에 노란머리마저…….”
“모라고? 훤, 크게 말해!”
로버트는 구시렁대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역시, 타국에서 제일 빨리 배우고 느는 것은 욕이구나.
살짝 미소 지으며 입을 다무는 어른스러운 녀석은 현명이뿐이었다.
저런 어른스러움 밑에는 아직 크지 못한 자아가 갇혀 있기 마련이지.
“엥? 없다? 어디로 밥이 갔다?”
두리번대는 로버트의 말에 별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아까 내가 걷다가 입이 심심해서 먹었소.”
로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오 마이 갓, 그거 우리 런치인데.”
“먹는 걸로 뭐라고 하면 안 되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별호가 많이 먹는 것은 알았지만, 요 근래는 조금씩 근육의 선이 희미해질 정도였다.
먹는 것은 아끼지 않고 내주었으나, 전처럼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니니 점점 더 벌크 업이 되는 것이 분명했다.
“별호야, 너 식단을 좀 조절해야 해. 아니면 먹는 만큼 운동을 더 하든지!”
“아니, 대표 누이, 사람이 어찌 매일 완벽한 몸뚱이겠소?”
하긴, 내로라하는 톱스타들에게도 분명 시즌과 비시즌이 분명히 존재하긴 했지.
“그래도 지금은 데뷔 전이니까 관리를 해야 해.”
단호한 내 말에 옆에서 열하가 별호의 배를 쿡 찔렀다.
“다행히 아직 딱딱하긴 하지만, 이제는 식어 빠진 백설기 같구나.”
별호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근처에 주막이 보였지만, 나는 안을 힐끗 들여다보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오늘 밥은 주막에서 안 먹을 거야.”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럼 대체 어디서 먹을까요? 도시락도 없는데…….”
현명이의 말에 나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원래, 다이어트할 때는 풀을 먹는 거거든.”
지나가는 마을 주민에게 물어, 우리는 들판을 찾았다.
“자, 여기 있는 것은 뭐든 먹어도 좋아.”
선심 쓰듯 말하는 내 말에 다들 기운 빠진 한숨을 내쉬었지만, 별호만은 예외였다.
“풀은 잔뜩 먹어도 된단 말이지요?”
들판에 널린 것은 쑥이었다. 서울에서는 잘 보지 못했던, 그런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호박잎도 잔뜩 달려 있었고.
주막에서 다들 잘 먹고 지내서 겉으로 보기에도 처음보다는 조금씩 살이 오른 느낌이 있었다.
열하와 로버트가 들판 옆에 있는 집에 가서 과일을 얻어 오겠다고 나섰다.
“조금만 얻어 와! 아무리 많이 준대도. 알겠지?”
내 말에 열하가 눈웃음을 치고 로버트와 함께 사라졌고.
남은 우리는 쭈그려 앉아 쑥과 호박잎을 뜯었다.
아궁이 앞에 서서 일하는 것보다 쑥을 캐는 것이 훨씬 어려웠지만, 나물 자급자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대표 누이, 앞으로 내가 주막에 가서도 조절해서 먹겠소. 응? 이건 그만하죠?”
별호가 투덜대자 현명이 웃었다.
“저는 즐겁습니다. 놀이라고 생각하면 즐겁지 않습니까?”
절대 쭈그려 앉지 않고 그늘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훤이 다가와 한숨을 내쉬고는 칼을 빼어 들었다.
“나와.”
“그 칼은 길어서 쑥을 못 캐!”
내 만류에 훤은 귀찮다는 듯이 우리를 힐끔 바라보고는 칼날을 세운 뒤 땅을 일정하게 쓱 그었다.
바람에 베인 쑥 향이 우리에게 훅 밀려왔다.
땅에 칼을 대어 쑥을 베어 내는 모습은 부드럽고 유려했다.
손목 스냅을 이용해 베어 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우리가 박수를 치자 훤이 우리 쪽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뭘 보고 있나? 이제 좀 줍지?”
신이 나서 쑥을 줍는데, 로버트와 열하가 돌아왔다.
그렇게 뭐든지 조금만 얻어 오라고 신신당부했건만, 녀석들은 사과와 배를 큰 바구니에 한가득 얻어 왔다.
“내가 조금만! 응? 받아 오랬지!”
내가 주먹을 쥐고 으름장을 놓자 로버트와 열하가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대답했다.
“우리의 미모에 반해 주겠다는데 그럼 받은 것을 버리고 오오?”
쑥과 사과, 배를 이고 우리는 식사를 할 곳을 찾았다.
저 멀리에 튼튼하게 지어진 정자가 하나 보였다.
그곳에는 상모와 탈을 머리에 인 여러 남자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끓여 먹고 있었다.
분명 남사당패다.
나는 조심스레 말에서 내렸다.
남사당패라면 조선 재주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실히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식사 중이신가 봅니다?”
내 말에 그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그렇소.”
“저희도 함께 식사를 해도 될까요?”
“그러슈.”
내 물음에 그들이 벌여 놓았던 물건들을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영원과 함께 그 정자로 들어섰다.
과일을 좀 건네고 그들이 피운 화로를 하나 빌려, 쑥국을 끓여 내었다.
멀건 흰죽이 바닥이 난 모습을 보아하니, 양이 부족한 것 같았다.
내가 호박잎과 호박전을 건네니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식사가 마무리 되었다.
잔뜩 경계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먼저 우리에게 호기심을 내비쳤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우리는 저, 안성 땅에서 올라온 자들이오.”
아, 그 안성맞춤…….
내가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 하나가 물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뭘 하는 사람들이오?”
“저희는 노래와 춤을 합니다. 우리의 이름은 영원이라 하지요.”
그들이 시선을 교환하다가 크게 웃었다.
“여자 하나에 남정네 다섯으로? 애들 장난을 치는가. 남자로만 이뤄진 무리도 아니고. 수가 너무 적군.”
수염이 난 사내가 호탕하게 웃자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웃었다.
저자가 꼭두쇠(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인원이 많다고 꼭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양보다 질이라는 말 모르십니까?”
남사당패 인원은 대충 헤아려 보아도 열댓 명이 넘어 보였다.
몇몇은 매우 앳된 얼굴이었다. 아직 부모 품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가 직접 당신들에게서 한 수 배워 보고 싶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남사당패의 비웃는 웃음소리가 오두막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정색했다.
“전혀 우스운 대화가 아니었는데, 왜 웃는 겁니까?”
꼭두쇠가 상 위에 얹혀 있던 접시를 하나 들어 천장으로 던지더니 떨어지는 접시를 검지손가락 위에 얹어 빙글빙글 돌렸다.
저건 흡사, 서울의 피자 가게에서 보던 원판 돌리기와 흡사했다.
“이런 것을 할 수 있소?”
꼭두쇠가 옆에 있던 몸이 가볍고 날랜 남자에게 눈짓하자, 그가 가운데에 놓여 있던 화로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뎁니다!”
우리의 만류에 그가 코웃음 쳤다.
“잠자코 보시게.”
국을 끓여 먹던 뜨거운 숯불이 담긴 화로를 안고 남자는 연거푸 공중제비를 돌았다.
보는 사람이 아찔한 그 퍼포먼스는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바로 큰 화상과 부상을 입을 터였지만 남자는 가뿐하게 착지하여, 숯불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재주를 부리지. 그런데 댁들은 반반한 신분들 같은데 무엇을 걸었지?”
무엇?
내가 건 것이라…….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로군요. 대단하십니다.”
내 말을 들은 꼭두쇠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니까 웬만한 각오가 아니라면 귀찮게 하지 말고 떠나시오. 내 식사를 얻어먹었기에 이런 충고라도 해 주는 것이니.”
나는 영원의 아이들을 빙 둘러보고 그들의 아이들까지 보았다.
“제가 건 것을 말씀드릴까요? 아직 제 대답을 듣지 않았잖습니까.”
“어디 한번 지껄여 보쇼.”
“우리는 목숨이 아닌 삶을 걸었습니다.”
훤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게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입을 떼려는 찰나,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삶을 구성하는 것은 의식주뿐만이 아니오. 예술은 무용한 힘이 있소.”
“무용이라면 춤?”
별호의 물음에 서둘러 현명이가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삶에 스며들어서 알게 모르게 그 힘을 발현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나는 그 힘을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도록 힘쓸 작정이오.”
엔터 사업의 본질은 가수들과 엔터 사장인 나만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닌 대중의 즐거움과 니즈를 파악해서 인간의 희로애락에 대해 고민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우선이다.
내 말을 들은 꼭두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 어쨌거나 너희도 이번 방을 보고 궁궐에 입성해 팔자를 바꾸겠다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심보 아닌가?”
“우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해, 백성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알아보는 길목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내 말에 꼭두쇠가 호탕하게 웃었다.
“한낱 계집이기에 얕잡아 보았더니 말이 청산유수라 내 도통 당해 낼 수가 없구나. 그러나 우리 패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기술은 절대 알려 줄 수 없다.”
퍼포먼스 측면에서, 사실 우리보다 장점이 더 많긴 했다.
저 사람들은 마치 원래 저랬던 사람들처럼 곡예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