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지켜 낼 것들
내가 칼자국에게 잡혀 있는 동안, 멤버들은 모두 두 손을 든 채 긴밀히 눈을 마주쳤다.
“들어가. 찾아. 돈 될 만한 것 보이면 그것도 다 갖고 나오고.”
복면을 쓴 자객들이 모두 방에 들어가자, 칼자국은 나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주막집 여편네가 주제에 꽤나 곱상하게 생겼단 말이야.”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런 천박한 놈에게 얼굴 평가를 듣는 처지가 되다니. 나는 대충 대꾸했다.
“쇤네 미모가 좀 알아줍죠.”
칼자국은 너털웃음을 짓더니 덧붙였다.
“그래도 너보다 저쪽의 저 남정네 넷이 더 미색이 짙단 말이지. 정신 차려. 쟤네랑 다니면 주모는 오징어야.”
하,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영원이 아름답고 잘난 건 맞지만.
내 얼굴이 새빨개지자 별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풉. 대표 누이, 지금 저자에게 농락당하는 거요?”
나는 별호를 노려보았다. 칼자국은 칼로 나를 겨눈 칼을 거두지 않으며 소리쳤다.
“다시 제대로 손을 올리지 못할까?”
별호는 다시 헛기침하며 손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곧, 복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며 외쳤다.
“수색을 완료했습니다!”
가지고 나온 것은 내가 대강 숨겨 두었던 엽전 꾸러미들이었다. 근래 들어 녀석들을 보러 온 손님들로 점심까지 장사가 더 잘되던 터였다. 제대로 찾는다면 저것보다는 더 있을 터인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명약은 모두 저 보따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집 전체를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대장.”
그때, 문간에 집에 잘 간 줄 알았던 현명이가 나타났다. 축 늘어진 어머니를 업은 채로. 그녀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뭐야? 어머니 왜 그러셔?”
순간 훤의 앞 머리칼이 살짝 흔들리며 눈앞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은 그의 머리칼보다 더욱 빠르게 복면 하나의 목에 검을 겨눈 상태였다.
“자네들이 저 모자를 저렇게 만들었는가?”
훤의 말은 이미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사실상 묻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시에 열하 역시 유려한 동작으로 옆에 놓인 그릇을 들어 복면 하나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폭력을 먼저 쓴 것은 당신네 쪽인 듯하군.”
열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칼자국이 내 목에 칼을 더 가까이 갖다 대었다. 서늘한 칼날이 목의 살갗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감히 지금 어디서 칼을 빼어 들지? 당장 집어넣어. 아니면 이 여자는 죽는 거야.”
칼자국의 말에 훤과 열하가 다시 검을 거두었다. 복면들이 다가가 훤과 열하의 검을 빼앗고 손을 결박했다.
칼자국은 현명이를 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이 새끼가 쥐새끼같이 조용히 시키는 것 따박따박 잘하더니, 요새는 도무지 연락을 받지 않더군.”
현명이의 눈이 흔들렸다.
“매가 요 며칠 사이에는 오지 않았습니다.”
칼자국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대답도 없이, 이렇게 물건을 뺏기고 다니면 쓰나. 내가 이 약을 널리 이롭게 떨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응?”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칼자국은 이제 현명이의 앞으로 칼을 겨눈 채 다가서고 있었다.
현명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칼자국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 분풀이한 것도 모자라 이분들에게까지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저한테 하십쇼.”
칼자국은 어깨를 풀며 두둑 소리를 내었다.
“걱정 마라. 소원대로 너도 개박살 내고 오늘 저치들은 노비로 다 팔아넘길 작정이니.”
현명이는 업힌 어머니를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 청입니다. 당장 제 목을 쳐 죽이셔도 좋습니다. 저분들은 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모르고 저 보따리를 두고 갔기에 맡아 주셨던 것뿐입니다.”
무릎을 꿇은 녀석을 향해 칼자국이 다리를 뻗어 걷어찼다.
“현명아!”
내가 소리쳤지만 힘없이 쓰러진 현명이는 더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현명의 배에 발을 얹은 칼자국이 말했다.
“그러니까 요즘 안 그래도 자꾸 누가 우리 찾는다고 들쑤시고 해서 분노가 치솟던 차였는데, 네놈이 뭔가 수상쩍었단 말이지.”
열하가 물었다.
“자네가 그 붉은손버섯의 관리인을 뽑는다던 자인가?”
칼자국은 의외의 소득이라는 듯, 열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네놈들이 날 찾았나?”
열하의 곁에서 함께 결박을 당했던 훤이 나지막이 실소를 터트렸다.
“역시 꼬리가 길면 쉽게 밟히는 법이지.”
훤은 결박을 손쉽게 풀어냈다. 팔목에 숨긴 채 갖고 다니는 작은 은장도로 손의 결박을 푸는 동시에 옆의 복면의 다리에 내리꽂았다.
“아악!”
소리를 내지르며 뒹구는 놈을 보며 훤은 열하에게 말했다.
“너도 그만하고 이제 일어나지?”
민망한 듯, 열하 역시 가뿐히 일어나 옆의 복면을 금세 제압했다.
아, 이 녀석들 지금 뭔가 드라마를 찍는 것인가!
이 멋진 그림에 감동하고 있는 중에 별호가 평상에 있던 쟁반으로 냅다 다른 복면의 머리를 내리쳤다.
끄떡도 않는 복면이 기분 나쁜 듯 별호 쪽으로 다가가자 울상을 지었다.
“사형들! 훤 사형! 열하 사형! 사형들이라고 부를 테니, 살려 줘요!”
옆의 로버트가 빈 뚝배기를 복면의 머리에 바로 내리쳤다. 복면은 자리로 스르륵 누워 기절해 버렸다.
“괜찮아? 별호?”
너희들은 개그 듀오냐?
고개를 살짝 저으니, 칼자국이 당황했는지 이제는 칼을 현명이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아저씨.”
내가 나지막이 부르자 칼자국이 칼을 조금 더 가까이 들이댔다.
“나보다 예쁜 우리 애들을 지키려면, 내가 얼마나 강해져야 했을까요?”
그제야 현명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황한 칼자국은 현명이를 더욱 세게 짓밟았다.
“그 발 치워. 좋은 말로 할 때.”
“이년이 뭐라는 거야?”
나는 현명이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현명이는 칼자국의 발을 위쪽으로 밀어내며 뒤로 굴렀다.
균형을 잃고 허둥대던 칼자국은 두리번대다가 땅에 누워 있는 현명의 엄마를 다시 인질로 삼으려 칼날을 세운 채로 다가갔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난 현명이 칼자국의 팔을 강하게 뒤로 잡아 틀었고 나는 가볍게 뛰어 칼자국의 얼굴에 날아차기를 했다.
“아악!”
소리를 내지르며 칼자국이 칼을 놓치고 바닥에 뒹굴었다.
경호 기술은 내가 직접 녀석들의 현장을 따라다니며 습득했던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경호를 붙일 사정이 아직 되지 않았던 무명 시절에는 내가 직접 가드를 했던 적도 있었다.
한때, 현장에서 아이들을 챙기며 뛰는 내 모습이 이색 사장으로 다뤄진 적도 있었는데.
어쨌거나, 영원의 일에 필요하다면 배워야 했고 할 수 없는 것은 없어야 했다.
나는 땅에 대자로 드러누운 칼자국의 팔을 밟고 다른 쪽 발로는 그의 목을 밟았다.
캑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때문에 내가 지금 목에 상처가 났잖아. 애들이 안 다친 게 천만다행이지만, 어?”
나는 고개를 들어 현명이의 얼굴을 살폈다.
칼자국이 바닥에 찬 탓에 현명이의 얼굴이 흙에 쓸려 상처가 나 있었다.
“똑같이 해 줄 테니까, 기다려.”
내가 흙을 한 줌 쥐어 칼자국의 얼굴에 가져다 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그의 목에 겨누었다.
칼을 좀 더 가까이 가져다 대니 칼자국이 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것이 느껴지더니 곧 바지 밑의 흙이 축축하게 젖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됐어. 얘들아 그 줄 좀 가져와. 얘도 좀 묶자.”
칼자국을 심문했지만 나오는 증거는 몇 없었다.
훤의 예상대로 녀석은 몸통 근처에도 아직 가지 못한 놈이었다.
“근데 왜 칼을 휘두르고 난리야? 양아치야?”
내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주먹을 들고 다가가니 칼자국이 몸을 움츠렸다.
따라왔던 부하들의 복면을 벗기니 모두 현명이 또래거나 그 아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었다.
모두 엽전 몇 푼에 이 일을 시작하게 되고, 시키는 대로 했던 녀석들뿐이었다.
모두 관아에 끌려가 신문을 받기로 했고 열하가 직접 그들을 관아에 잡아넣었다.
칼자국을 통해 얻은 단서는 단 하나였다.
붉은손버섯의 재배지가 정말 몇만 평이며, 그곳을 관리할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 중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이 소식을 맡은 한낱 마을의 시정잡배라고 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습죠. 나쁜 일 위주로 하긴 하지만……. 이 일은 그냥 명약을 퍼트리고, 사람 좀 구해 달라는 것이니, 나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훤이 물었다.
“네놈은 이게 정녕 명약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습죠. 하면 고통이 싹 가시니까.”
코웃음을 친 훤이 이어 말했다.
“삶이 본디 고통인 것을, 네놈은 그 고통을 외면하려 더 큰 고통을 선택한 자로구나.”
말을 들은 별호는 훤의 등을 장난스레 두드렸다.
“멋있다, 사형. 그런 말은 언제 생각하는 거야?”
사형이라니.
아, 살려 주면 사형이라고 부르겠다고 큰소리로 말했지.
나는 그런 별호를 보며 웃어 버렸다. 현명이는 아직도 멍한 상태였는데 그 옆에서 로버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했다.
“쓰라리?(쓰라려?)”
로버트의 물음에 현명이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현명이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 *
며칠 뒤, 현명의 어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마약을 하지 않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니 눈에 보게 혈색이 좋아진 그녀였다.
“잔기침도 많이 줄었고, 몸이 전처럼 회복된 것만 같아.”
현명에게 밝게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아원 역시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한 가지 남은 숙제가 있었다.
아원은 조심스레 현명의 어머니께 어제 저녁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꺼내었다.
“그러면 우리가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하며 이 일의 대가리를 찾아내자는 말이오?”
별호의 언성이 높아지자 로버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쉬이잇, 별호. 시끄러.”
열하 역시 시름이 깊은 표정이었다.
“내 이번 신문을 하면서 느낀바, 심각한 상황이긴 하오. 이렇게 마을에서 공공연히 약을 퍼트리는데 꼬리 중의 꼬리를 잡은 정도니. 관아에 들어앉았지만 정의와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만 드오.”
열하의 한숨에 훤 역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현명은 입술을 꾹 깨물다가 말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이 일에 끼어들게 한 것이 바로 저 아니겠습니까.”
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겐 어머니가 계시지 않니. 네게는 이 일을 권하기가 어려워.”
현명 역시 완강했다.
“제가 태어나 처음 가져 본 꿈이기도 합니다. 함께 공연을 하며 저도 제가 저지른 짓의 대가를 꼭 치르고 싶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열하를 바라보았다.
“너는? 그 관직을 내려놓아도 괜찮겠어?”
열하는 아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 누이와 함께하기로 할 때부터 관직을 유지하는 건 힘들 거라고 예상했소. 사실, 이미 재가를 받은 상태고.”
아원은 예상치 못한 말에 작게 입을 벌렸다.
“나도 이렇게 쉽게 재가가 날 줄은 몰랐지. 요새 궁에서 처리하는 일이 다 이런 식인가 보오.”
“…….”
“내 직접, 이 일을 알아보고 해결하고 싶기도 하고. 내 마을에서도 이 정도로 일이 번졌다면. 다른 곳에는…….”
훤과 별호, 로버트 역시 큰 이견이 없는 듯했다.
아원은 어제의 일을 간략히 이야기했다.
“아이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하면서 이 마약의 뿌리를 찾으려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부탁 하나를 덧붙였다.
“저는 이 주막 장사를 접을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직접 이 주막을 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제가 어찌, 계속 그리 도움만 받겠습니까?”
극구 사양하는 그녀에게 아원이 말했다.
“아닙니다. 직접 맡아 주신다면 저 역시 다행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주막을 아주 좋아했거든요.”
아원이 말을 마치자 현명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어머니,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에 현명의 눈에 잠깐 눈물이 고였다.
아원은 따뜻한 눈으로 현명을 계속 바라보았다.
“저도 같이 떠나고 싶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갖게 된 꿈이었습니다. 사형들과 이 대표 누이와 공연을 만들며 세상을 바꿔 보고 싶습니다.”
현명의 어머니 역시 그 아들을 닮은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지만 이내 곧 훔쳐 냈다.
“그래, 진작 네 길을 가게 어미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함께 가거라.”
아원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들을 맡겨 주었던 모든 부모들에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