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픈 손가락
방문이 열리며 현명이 들어왔다.
“식사를 하시지 않아 걱정되어서 들어와 보았습니다.”
훤의 말이 곱게 나갈 리 없었다.
“내 네놈과 겸상하고 싶지 않다. 나가라. 나가서 네 어머니와 저 사람들 속에서 천하태평 있으란 말이다.”
현명은 거친 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형은 딱 보아도 부잣집 도련님인 듯한데, 이런 미천한 사람한테 가련한 마음도 없소?”
훤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명의 멱살을 쥐어 들었다.
“네놈은 동정으로 먹고사는 놈인가?”
현명의 눈에 순간 불길이 일었다. 훤의 어깨를 밀쳐 내며 현명이 외쳤다.
“그렇소. 나는 거렁뱅이라 돈이라면 다 하는 놈이오. 좋겠소. 댁은 처음부터 돈과 쌀이 썩어 나는 곳에서 태어나서.”
훤의 눈에도 불길이 일며 현명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잡은 옷깃이 거칠게 당겨지며 현명의 저고리가 찢어졌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나는 것을 확인한 현명도 질세라 훤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던 중, 안채의 문이 뜯어지며 씩씩대는 현명과 훤이 주먹다짐을 하며 마루 위를 굴렀다.
아원과 영원의 멤버들이 모두 몰려들어 말리는 데 애를 먹었다.
씩씩대던 둘을 떼어 놓자마자 아원이 크게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새끼들아!”
평소에는 아무리 화가 나도 상스러운 소리를 내뱉지 않던 그녀였기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잠잠히 바라보았다.
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저 돈에 미친 약쟁이와는 절대 아무것도 함께할 수 없소.”
현명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로버트를 밀친 뒤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내뱉었다.
“어머니, 가요. 우리 집으로.”
현명이네 모자가 떠난 후, 아원은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별호와 열하, 로버트는 항상 생글생글 웃던 아원의 화난 모습에 좌불안석이었다.
아원이 차가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너, 손가락이 곪고 아프면 자를 거야?”
훤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저자가 벌써 대표의 손가락이 되었나?”
“입 다물어.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손가락 자를 거냐고.”
훤은 아무 말 없이 아원을 노려보다가 입을 떼었다.
“돈에 미쳐서 똥인지 된장인지도 분간 못 하는 놈과는 절대 함께할 수 없다.”
아원은 말을 이어 갔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연이 있는 거야.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내 직감과 나를 믿는다면 이번 한 번만 더 내게 기회를 줘. 난 너희를 위해 있는 사람이야.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말을 마치며 아원은 무릎을 꿇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정과 이유가 있어. 그게 무엇이든지. 그리고 나는 현명이를 잘 아는 편이야. 우리의 아픈 손가락이 된대도, 잘 치료해서 함께하는 것이 맞지 않니? 날 좀 믿어 줘.”
아원의 말에 별호와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성이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니던데…… 어머니도 인자하시고.”
“맞아. 나도 현명 좋아.”
열하가 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막 치료 시작했잖아. 치료하면 나을 거고 그때 그 사람의 진가가 보일 거니 좀 기다려 주오.”
훤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토록 화낸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자신의 상처가 떠올라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
훤은 아원의 팔을 잡아 가뿐히 일으켜 세웠다.
“상황이 어렵고 아픈 탓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말은, 지켜보면 알겠지.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아원은 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보여 줄게. 현명이가 어떤 사람인지.”
* * *
어느 정도 상황이 소강되고 안뜰에 들어간 로버트가 수심 깊은 얼굴로 밖에 나왔다.
“현명이 엄마, 약 놓고 갔다.”
아까의 상황에 마음이 불편했을 것 같아 약재를 가만히 보는데 로버트가 뒤를 보며 씩 웃었다.
“약 놓고 갔다, 현명!”
입술이 부어오른 현명이가 문간을 서성이고 있다가 로버트의 말에 몸을 숨겼으나 소용없었다.
나는 버선발로 내려가 현명이를 반겼다.
“아까 그러고 그냥 가 버리면 어쩌니? 다들 걱정했어. 어머니도 많이 놀라셨지?”
현명이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까 훤 사형의 말을 안 듣고 괜히 객기를 부렸어요. 사죄드리러 왔습니다.”
현명이가 마루에 앉아 있던 훤에게 다가갔다.
“미안합니다. 사형, 제가 아까는 괜한 객기를 부렸습니다.”
훤도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됐다. 나 역시 지나치게 감정적이었을 뿐.”
나는 다가가 두 녀석을 한 번에 포옹했다.
“그래! 영원히 사이좋게 지내라. 영원은 영원히!”
뒤에서 삐죽대는 별호와 열하의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공연할 준비나 합시다, 좀!”
“그래! 치고받고 그만 좀 해!”
어쩐지 두 녀석이 아웅다웅하는 게 줄었다 싶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법이었다.
나는 웃다가 간만에 느껴진 안도감에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시간이 무르익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시 관객석이 가득 찼고 영원의 아이들은 어제보다 더 나은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현명이는 공연하는 녀석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건 아닐 거 아냐?”
“그쵸. 근데 그때는 약을 뿌리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사람들 틈에서…….”
내가 표정이 안 좋아지자 현명이는 말을 서서히 멈추다가 말했다.
“약에 손댄 것 죄송해요. 정말 몰랐어요. 그리고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아까 얘기들 들었어요. 어머니 약 두고 온 거 알자마자 다시 돌아왔거든요. 분위기가 저 때문에 안 좋았으니 계속 담장 너머에 있었어요.”
당황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했지? 주제넘게 현명이를 잘 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그, 그건! 내가 어! 그래 내가 꼭 너 같은 동생이 있었거든. 집안 상황도 비슷했고.”
내 말을 듣자 현명이는 쓸쓸히 웃었다.
“저도 누이같이 밝은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병으로 죽었지만요.”
현명이는 손과 발이 다 부르트게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왔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얻고 나서야 한 숨 돌렸다고 했다.
“어머니 모시고 동생과 함께 이사를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이 죽고 그다음부터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으셔서 뭐든지 했어요. 천애고아가 되기 싫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시대가 바뀌었는데 현명이의 가정사는 소름 끼치게 똑같은 걸까?
돈을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던 현명이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었다.
“이젠 우리와 같이 돈을 벌자. 돈 벌어서 어머니 호강시켜 드리게 내가 도와줄게.”
현명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요? 저는 가진 능력도 별로 없는데요.”
왜 없니, 현명아? 너의 눈망울은 세상을 감복시킨단다. 그리고 네 눈웃음과 아름다운 가성은 어떻고?
나는 그냥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영원을 가리켰다.
“너도 할 수 있어. 우리와 함께.”
현명이와 눈이 마주치며 우리는 다시 웃었다.
나는 두 번 다시 너를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야.
성황리에 마친 공연을 뒤로하고 뒷정리를 하는데 현명이가 자꾸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현명이를 내쫓았다.
“어머니께 빨리 가 보래도?”
열하도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현명이가 들고 있는 의자를 빼앗았다.
“약도 시간 맞춰 제때 드셔야 효과가 있을 게다.”
배웅을 받으며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현명이가 문간을 나섰다.
영원 멤버들 모두 현명이를 조금씩 천천히 받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녀석들을 기특해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별호가 나를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누이, 그런 눈은 사절이오. 마님 같거든.”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살짝 내리쳤다.
“네가 아주 그냥 내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열하와 로버트가 낄낄대며 웃고 훤이 역시 풋, 하고 작은 실소를 머금었다.
현명이를 찾아, 다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완전한 평화는 아직 아니었지만. 나는 안채의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아편 보따리를 떠올렸다.
아직 우리가 갈 길이 멀었다.
그때, 누군가 우리 주막에 들어왔다.
“거 뭐 하나 좀 물읍시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와 그 뒤로 복면을 쓴 무리가 보였다.
“뭐요? 무슨 일이오?”
“네가 이곳 주모인가? 여기 그 호리호리하니 곱상한 놈이 왔다 갔나?”
나는 칼자국에게 쏘아붙였다.
“이곳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이 드나드오. 내가 어찌 그 얼굴들을 다 기억하겠소?”
놈들은 히죽대며 웃었다.
“그래. 그럼 질문을 바꾸지. 까만 덩어리가 가득 담긴 보따리가 이곳에 있다던데?”
“나는 모르오.”
“그런 식으로 잡아뗀다면 내 직접 다 뒤져서 찾아내 주지.”
칼자국의 뒤에 있던 복면 두 놈이 칼을 빼어 들었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려 영원의 아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제발 알아듣길 바라면서.
‘아직은 아냐. 참아라, 얘들아.’
“기다리시오. 이게 찾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서둘러 안채에 들어가 현명이의 보따리를 집어 들고 나왔다. 보따리를 열어 물건들을 보이자 칼자국이 껄껄대며 웃었다.
“맞네 맞아! 주모는 지금 주모가 들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아오?”
내가 고개를 들어 가만히 바라보자 칼자국은 칼을 빼어 들고 내게 다가왔다.
“장차, 이 나라를 송두리째 집어삼킬 힘! 그 자체지. 이쪽으로 순순히 내놓아라.”
“여기 있소.”
보따리를 내미는 내 팔을 잡아당긴 칼자국이 내 목에 칼을 댄 채, 영원에게 외쳤다.
“내 직접 이 주막을 뒤져 봐야겠다. 이 주모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다들 뒤로 물러나라.”
칼자국의 말에 복면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 * *
집에 돌아가는 길에 현명은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 북받쳤다.
안정감과 믿음을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자기에게 보여 준 사람이 있었던가?
함께 있으면 가장 현명 자신다워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은혜를 갚고 싶었다. 현명은 손에 든 약을 보며 달음박질쳤다.
빨리 어머니께 달인 약을 먹여 드리고 싶었다.
또 하나 더, 소원은 내일부터 함께 그 공연의 일원이 되어 작은 것부터 배워 나가고 싶었다.
이렇게 꿈을 꾸는 것이 얼마 만인지.
현명의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마당에 발을 들이자 어수선한 집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흙탕물이 된 작은 텃밭에 심어 두었던 감자며 고구마 순이 다 쓰러져 있었고 대신 그곳에 말린 붉은손버섯 한 단이 놓여 있었다.
저 버섯이라면.
현명의 머릿속에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약을 건네준 사내와 만났던 곳에 가득했던 저 손이 그려진 종이들.
현명은 짚신을 벗을 새도 없이 마루에 올라가 문을 열었다.
현명의 어머니는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과 발이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얼굴을 맞은 것인지 입술에 엉겨 붙은 피와 눈 주변으로는 멍 자국이 확연했다. 서둘러 입에 물린 것을 빼내고 현명이 어머니를 품에 안았다.
“어머니!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현명의 어머니가 감았던 눈을 힘겹게 떴다.
“지, 지금, 네 친구들에게 가 봐야 해. 지금, 그쪽으로 갔어.”
말을 마치자마자 어머니는 다시 눈을 감고 쓰러져 버렸다.
현명은 어머니를 둘러업은 채로 다시 주막으로 향했다.
그는 역시 자신은 불행을 끌어들이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자책의 눈물을 흘리며 현명은 다시 왔던 길을 서둘러 내달렸다. 조금 전에 왔던 것과 달리, 가장 무거운 걸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