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
“이번 뮤비 촬영 다들 고생했어요!”
3집 정규 앨범 타이틀곡인 ‘몽상’의 뮤비 촬영일이었다.
박수갈채 소리와 저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그 마지막에서,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웃고 있던 현명이를 보았다.
“야,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대표님. 제가 요즘 좀 무리했나 봐요.”
평소에도 퇴폐적인 이미지이기는 했지만 그날따라 현명이의 눈이 조금 멍해 보였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짜식, 무리하지 말고. 요즘 바빠서 집에도 잘 못 갔지?”
현명이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얼빠진 녀석처럼.
“네? 아, 엄마 잘 계세요. 네. 맞아요.”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현명이를 바라보았지만, 프로듀서가 급히 나를 찾는 탓에 곧 자리를 떠야 했다.
그때 현명이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봤더라면.
사실 이 조선 땅에 와서 다시 녀석들과 함께 무대를 꾸리는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이게 나만의 욕심, 나만의 꿈으로 다시 우리 아이들이 다치는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나는 그때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정신이 더욱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내 앞에 있던 두 형상이 무언가 웅얼대는 것이 느껴졌다.
기를 쓰고 정신을 잡으니 그제야 조금씩 상황이 파악되는 것 같았다.
“괜찮소?”
이야기를 나누던 두 남자 중 한 사내가 내게 손을 뻗어 일으켜 주려 했다.
나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아서며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슬 퍼런 목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당장 이 여자에게서 손을 떼라.”
그리고 이어, 다정한 손이 내 손을 잡아 들었다.
“누이, 아까 밥을 깨작이더니, 더 먹으래도! 왜 이러고 있어요?”
훤과 별호였다.
다행히 녀석들을 보니 불규칙했던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훤과 별호가 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안정이 되다니.
생각보다 내가 녀석들을 꽤 많이 의지하는 모양이었다.
내 상태가 괜찮아지자마자 나는 두 남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대화를 나누다가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하게 되셨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는데도 별호가 딴청을 부리기에 나는 녀석의 고개도 함께 찍어 눌렀다. 훤은 고개만 까딱해 보일 뿐이었고.
남자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자 나는 녀석들에게 눈을 흘겼다.
“왜 따라왔어? 로버트는 어쩌고!”
내가 책망하자 훤은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 아주 잔소리가 심하오.”
별호는 귀를 싸쥐었다.
“대표 누이가 오면 좀 기가 꺾일 텐데.”
나는 한 손으로는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누이, 어디 아프오?”
“대표, 혹시 지병이 있나?”
둘이 동시에 물어 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았는데, 좀 힘든 일이 떠올라 일시적으로 잠깐 정신을 잃은 모양이야.”
나는 입술을 꾹 물고 발밑에 구겨 버렸던 종이를 집어 들고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너희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활짝 편 종이를 바라보는 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빌어먹을 해륜국의 문양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잠깐 떠나 있던 사이, 이 방이 시장 곳곳에 붙었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방을 봤고.”
“…….”
“훤아, 혹시 너 이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니?”
“그걸 왜 나에게…….”
“이거, 마약 맞아?”
“마약?”
“사람이 환각과 환청을 보고, 사람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거. 그리고 그 약을 끊지 못하는 거 말이야.”
훤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답이 되었다.
그는 이미 이 문양을 아는 듯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침착한 모습이었으니까.
“이렇게 백성이 사는 곳까지 공공연하게 퍼져 있을 줄은 전혀 몰랐군.”
“이게 무슨 문양이오? 식물인가?”
별호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붉은손버섯.”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으로 붉은 손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약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은 것이 되고 한낱 인간의 삶을 넘어 세상을 무너트릴 것이지. 그게 마약을 뜻하는 거라면 마약이 맞아.”
훤의 냉철한 말에 고개를 들어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일렁이는 깊은 수심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럼 마약이 맞아. 약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잘 쓴다면 유용하지만, 마약이라는 이름을 단 이상, 그건 약이 아니지.”
별호는 놀랍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대표 누이는 어찌 그런 것까지 다 아오?”
“전에, 이것 때문에 진짜 죽을 정도로 고생을 했거든.”
* * *
셋은 시장에 붙은 전단지를 얼추 다 뜯어냈지만, 이미 버섯의 정보를 들은 사람들의 입과 귀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종이 뭉치를 들고 들어오자 주막에는 로버트와 열하가 만든 의자를 나란히 진열해 놓고 있었다.
“어디들 다녀오시나들? 우리 둘만 쏙 빼고?”
열하가 장난을 치며 다가왔지만 훤은 휑하니 종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아원은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저녁이 되어 모인 아이들에게 조심스레 제가 알고 있는 마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열하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훤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지금 이 문제가 어쩌면, 현재 떠도는 소문의 작은 실마리일지도 모르겠군.”
아원과 영원의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이라는 것에 중독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원의 설명을 듣던 훤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정의 상황들이 어지러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나아가야 했다. 영원으로.
아원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활기차게 외쳤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해 보자.”
* * *
해가 저문 주막에서 평상을 밀어 놓고 춤과 노래를 연습한 지도 여러 날이 흘렀다.
훤이 공중제비를 돌다가 넘어져서 나는 그가 다치지 않게 하려 볏짚을 깔아 놓는 중이었다.
“아니, 거기서는 소리를 좀 더 꺾어야지.”
평상에 앉아 부채를 탁탁 치며 박자를 맞춰 주는 열하의 말에 별호가 음을 조금 더 높여 보았다.
아이들의 노래가 아직 없으니 아리랑으로 연습 중이었다.
“아리라앙 고오개로오 넘어간다.”
별호가 흥얼대며 노래를 한 번 불렀을 뿐인데 그 뒤를 이어 바로 로버트가 낭창낭창하게 곡조를 뽑아 들었다.
순간, 모두들 쥐 죽은 듯이 조용히 눈을 감고 그 목소리를 감상했다.
가사의 발음은 조금 부족했지만 그 음색은 분명 깊이를 담고 있었다.
나는 아까 아궁이 앞에서 들었던 터라 그 신비로운 음색의 충격이 덜했지만.
“너 뭐야?”
어리둥절한 녀석들 사이에서 로버트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나 노래, 원래 좋아했어. 조선 노래에는 마음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민족의 한이 서린 노랫가락들을 중고등학교 수행 평가 때마다 한을 담아 그 얼마나 불렀던가.
아리랑이 실제로 슬픈 노래이기도 했고.
다들 로버트의 주위에 몰려들어 저마다 노래를 평가해 달라고 왁자지껄한 때였다.
쾅-!
큰 소음과 함께 여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세워 뒀던 돌담이 우르르 무너진 것이었다.
쓰러진 낮은 돌담 위로는 마을의 아낙네들부터 소녀들까지 여럿이 넘어져 있었다.
“아, 아이고 내 허리야.”
“무거우니 좀 빨리 비키쇼!”
“누가 밀었어? 누구야!”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나와 멤버들이 사람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영원의 손을 잡는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수줍었다.
“아, 이런 꼴을 보여 어쩌나.”
“어제 빨래를 해, 손이 거친데 아이고…….”
나는 터져 나오는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조선에서의 영원의 첫 팬덤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소?”
“대표 누이, 이 누이 무릎이 좀 까졌네요. 말려 놓은 약초 없어요?”
“오케이? 괜찮아?”
“내 이 돌담이 원망스럽구려.”
저마다, 말만 들어도 성격이 보이는 말들로 돌담 위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팬에 대한 사랑까지. 그래. 내가 역시 너희를 제대로 봤지.
나는 팬들을 평상에 앉힌 뒤 이야기했다.
“매일 밤 이렇게 춤과 노래 연습을 할 겁니다. 원한다면 구경하러 들어오셔도 좋아요. 돌담 너머로 불편하게 보지 않아도 됩니다.”
내 말에 여자들은 입이 귀에 걸리게 웃었다.
머리에 흰 두건을 쓴 아낙이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와도 될까?”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그랬는데.
여느 날처럼 장사를 마치고 평상을 정리하고 흙바닥에서 아이들과 동선을 정리하고 있는 중에 열하가 놀란 눈으로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 장사에도 이 정도로는 몰린 적이 없었던, 엄청난 인파였다.
처음, 아이들이 무명일 때 홍대 의 길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했던 적이 있었다.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멈춰서 우리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춤을 보며 환호하던 그날의 함성이 겹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조선에 텔레비전이나 즐길 거리가 물론 서울처럼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해가 떨어진 이 저녁에 나와 공연을 봐 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서둘러 밀어 두었던 평상을 마루 앞에 나란히 늘어놓고, 산에서 베어 온 나무로 만든 의자들을 배치했지만 그 그걸로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다시 나지막하게 세운 담장 너머로도 이미 아버지가 아이를 무등까지 태워 구경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늦은 저녁에 찾아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환경이 조금 불편한 점 사과드리며 좋은 공연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내 인사말이 끝나자 영원의 아이들도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전보다 확실히 고조된 분위기에 아이들의 동작도 전에 없이 더욱 활기차졌다.
별호의 눈웃음과 관객의 호응 유도를 아래와 신호 삼아 본격적인 무대의 막이 올랐다.
열하의 덤블링 시도를 시작으로 로버트의 구성진 목소리로 아리랑이 울려 퍼지자 훤의 날렵한 동작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차디찬 흙바닥에서 열리는 공연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함께하는 시너지 효과를 냈다.
아직은 미숙한 점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무대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자신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저마다의 매력을 보이면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피날레인 공중제비를 별호와 훤이 함께 돌면서 그 사이로 열하의 간드러지는 스텝이 어우러지자 객석에서는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민요 가락의 소리와 아이들의 목소리는 전율을 일게 했다.
나는 그 모습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어두울까 싶어 놓아두었던 화롯불을 확인하러 객석으로 들어갔다.
무대에서 상황을 확인했을 때 보이지 않던 사각지대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놓아둔 화롯불에서 연기가 나는 것인가 싶어 나는 서둘러 인파를 헤치고 조심스레 뛰어갔다.
혹시나 내가 허둥대면 이 많은 인파에 사고가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사람들을 헤치고 도착한 곳에는 다행히 불은 아니었지만, 입에 돌돌만 담배 같은 것을 문 남자 여럿을 보았다.
고약한 냄새까지 났지만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바닥에 앉아 그것을 피우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내가 날카롭게 묻자 남자들은 멍하니 대답했다.
“허허, 참, 노래를 들으며 술 한잔 살짝 걸치는데 누군가 주고 갔소. 이걸 하니 지금 기분이 전에 없이 좋소.”
“댁도 하나 드릴까? 저기 저 양반이 주고 갔소.”
다른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것도 공짜로.”
공짜. 세상에 이유 없는 공짜는 없었다. 나는 남자들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를 모조리 빼앗아 밟은 후 남자들이 가리키는 사람의 뒤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조금만 더 뻗는다면 닿을 것도 같은 거리였지만, 뒤를 힐끔 돌아본 얼굴에 나는 순간 얼어 버렸다.
현명이였다.
당장이라도 툭 치면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순한 동그란 눈과 거칠어져 버짐이 군데군데 핀 하얗디하얀 피부까지.
내가 처음 그 애를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의 그 앙상하고 거친 모습 그대로였다.
내 걸음이 멈추자 무언가를 눈치챈 듯 현명이는 인파를 헤치고 달려 나갔다.
나는 서둘러 소리쳤다.
“거기, 그 녹색 저고리 입으신 남성분! 흰 보따리를 멘 사람 좀 잡아 주세요!”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꼭, 누군가를 지명하는 것이 좋았다.
녹색 저고리를 입은 산적 느낌이 나는 남자는 금방 호리호리한 현명이의 보따리를 잡아채 들었다.
그 보따리에서는 흰 종이에 싼 물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조심스레 종이를 열어 보니 고약한 냄새와 함께 까만 덩어리들이 쌓여 있었다.
마약이다.
내 모든 것을 앗아 갔던 그 시초.
그리고 또다시 그 시작을 열었던 아이.
현명이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