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예상치 못했던 갈등
열하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관아의 문지기는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떠났다고요?”
“그렇다고 하지 않았소. 아침 일찍 떠났소.”
“있는데 없다고 하는 건 아니고요?”
“내가 왜 거짓을 말하겠소? 바쁘니 썩 물러나시오.”
문지기는 문을 막아서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제 그냥 쫓아갈걸.’
내가 입술을 깨물자 옆에 서 있던 훤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떠났대도 다시 마을에 갔을 거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내 잘못 같아. 내가 좀 더 잘 챙겼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소리.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걜 찾겠다고 다시 돌아갈 건가?”
훤의 차가운 목소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해안가 마을까지 왔다. 이제 코앞에 로버트가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서 물러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훤아, 왜 그러냐? 어제는 그렇게 걱정하더니. 네 잘못이라고 그랬잖아.”
“…….”
“대표 누이, 너무 걱정하지 마요. 훤이 이놈이 책임감이 아주 깊고 사려도 깊더라고요. 마을에 가면 책임지고 열하를 데려올 겁니다.”
“진짜?”
나는 기대감이 어린 얼굴로 훤을 힐끔 보았다. 훤은 말없이 마른 땅을 차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둘은 꽤 친해졌나 보네?’
별호가 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예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피하더니, 지금은 아주 살갑게 굴었다.
심지어 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별호가 먼저 주먹밥을 건네기까지 했다.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호도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헤실헤실 웃었다.
“부둣가가 곧 나올 것이다.”
우리는 훤을 따라 부둣가로 향했다. 가까이 가자, 다양한 어종의 생선과 수입품들이 보였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값비싼 장신구들이었다.
‘부자가 많나?’
매번 장터에서 기름진 전 냄새만 맡다가 신기하고 화려한 물건을 보니 눈요기가 되었다. 별호도 훤도 흥미로운지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진짜 오반인가 오버튼가 뭔가를 찾으러 온 것이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막에서 내게 서쪽 마을에 대한 정보를 주었던 자였다.
그는 가판대를 세워 놓고 요상하게 생긴 거울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지 않았소? 내, 튼실하고 일 잘하는 녀석들이 매우 필요하오.”
“허허. 주막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된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오?”
“내 어머니 따라 응애 할 때부터 주막 일을 했소. 이제는 쉬엄쉬엄 살면서 편히 살고 싶소.”
“좋소. 내가 정보를 자세히 알려 주리다. 그런데 이런 거 하나 필요하지 않겠소?”
남자는 씩 웃으며 자신이 파는 거울을 가리켰다.
‘이런…….’
정보를 얻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거울 중에서도 제일 작고 소박하게 생긴 것을 하나 골랐다.
그때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훤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안목이 좋으시구먼? 이건 건너 나라에서 왕족이 쓰던 거울이오.”
“……왕, 왕족?”
“대표, 그렇게 안 보였는데 고르는 솜씨가 있군. 혹시 문양을 알아본 것인가?”
“……이 문양이 뭔데?”
“조선 땅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문양이야. 그래서 남들이 보았을 때 한눈에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고.”
“오오! 훤의 말이 맞소! 이런 무늬는 나도 생전 처음 보오! 여억시! 우리 대표 누이는 참으로 안목이 좋소! 나를 딱 고를 때부터 내가 알아봤소!”
별호와 훤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자는 이때다 싶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딱, 한 냥만 주시오!”
“무, 뭐요? 한, 한 냥?”
“우리가 안면을 튼 사이니까 내가 싸게 쳐주는 것이오.”
“아니, 이 손바닥보다 작은 거울이, 그리고 뿌예서 얼굴도 잘 안 보이는 거울이 그렇게 비싸단 말이오?”
“뿌옇긴! 이 정도면 눈썹 털이 몇 가닥인지도 보일 정도구먼!”
한국에서 먼지 한 톨 없는 거울만 보다가 엉성한 거울을 거금을 들여 사야 한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남자에게 값을 치렀다.
그러나 그것으로 장사는 끝나지 않았다. 남자는 내게 옷을 한 벌 구매하라고 조언했다. 아니, 사실 조언이 아니라 강요였다.
“그 꼴을 하고서 경매장에 출입할 수는 없소.”
“내 꼴이 어디가 어때서?”
“어느 가문의 가노라고 패를 들이밀어도 거긴 못 들어가오.”
“그렇다면?”
“거긴 양반들만 직접 들어갈 수 있소. 그러니 양반처럼 보여야 하지 않겠소?”
“……하. 날 대체 얼마나 뜯어먹을 작정인 거요!”
“헤헤. 내게 딱 반 시진만 주시오. 내가 모두들 우러러보는 양반으로 만들어 줄 터이니.”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 * *
복부에 찬 복대가 가벼워졌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별호는 흡족한 얼굴로 내가 아닌 자신을 훑어보았다.
“이야. 비단이 좋긴 좋소! 마치 애기 궁둥이 같아요! 대표 누이! 어때요? 나랑 잘 어울립니까?”
별호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가 입고 있는 비단옷이 나풀거렸다.
남자는 별호와 훤을 데리고 가려면 그들이 호위 무사 정도처럼은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호위 무사 중에서도 가장 비싼 옷을 입어야 복도에 서 있을 수 있다나 뭐라나.
이곳의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나는 알겠다고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훤과 별호의 옷도 한 벌 사 주면 좋겠다 싶었고.
이렇게까지 값이 많이 나가는 옷을 해 줄 생각은 없었으나…… 역시 입혀 놓으니 다르긴 했다.
몸통이 큰 별호는 호위 무사 차림을 하니 늠름 그 자체였다. 듬직한 어깨와 가슴팍이 강조되어 월등한 몸이 도드라져 보였다.
훤 또한 귀티가 흘렀다. 얼굴이야 원체 튀는 스타일이었지만 옷까지 입으니 금상첨화였다.
또한 왕세자답게 진중하게 뒷짐을 진 태도는 여심을 공략하는 포즈였다.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각자 알아서 빛이 나는 둘이 서 있으니 잡지 화보 때가 생각이 났다.
별호와 훤을 듀오로 찍는 포토그래퍼들이 그렇게 칭찬했는데…….
팬들은 또 어떤가? 별훤이라고 별명을 붙여 주며 둘을 얼마나 엮었는지. 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대표 누이도 오늘 정말 멋집니다! 내가 모셨던 마님보다 훨씬요!”
“그래? 훤이야, 너는 어떠냐? 나도 좀 괜찮으냐? 멋이 좀 나?”
“봐 줄 만은 하다.”
훤이 봐 줄 만하다고 할 정도면 나도 꽤 괜찮은 모양이다.
‘그럼 돈을 얼마를 썼는데!’
내가 입은 비단 한복은 시중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버건디 색깔의 저고리에, 치마는 하얀색과 녹색이 섞인 오묘한 색깔이었다. 게다가 옥으로 만든 비녀까지 꽂았다.
“그럼 값을 치를까요?”
남자는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우리를 위아래로 훑기 시작하더니 가는 붓을 들고 손바닥에 숫자를 썼다.
나는 숫자를 보고 입을 벌렸다. 내가 벌리려고 한 게 아니라, 저절로 벌어진 것이다.
“정말 이것을 내란 말이오? 안 되겠소. 벗어야겠어!”
“뒷자리는 빼고 그러면 앞에 큰 수만 주시오! 그리고 이건 내 선물이오!”
남자는 내 표정이 썩어 문드러지자 다급히 가는 가락지 두 개를 챙겨 주었다.
“진짜 옥이오?”
“당연하지! 내가 주모가 있는 마을을 수시로 들락날락하는데, 설마 거짓을 고하겠소?”
“거짓이면 앞으로 삼대, 아니 30대가 멸할 것이고! 너를 조상으로 둔 네 가문의 인간들은 주식을 살 때마다 족족 떨어질 것이다!”
“……뭐요? 아, 아무튼 진짜요! 나를 믿으시오! 난 청렴한 편에 속하오!”
남자는 결백을 주장하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쉰 채 반지를 각각 가운뎃손가락에 꽂고 펼쳐 보였다.
“오오! 잘 맞소!”
“이건 욕이오.”
“그래! 옥이라오!”
“그래. 잘 보시오.”
나는 가운뎃손가락을 한껏 치켜올린 채 씩 웃었다.
“손가락, 가락지 자랑 그만 끝내고 빨리 가지?”
훤은 나를 재촉하며 말했다.
나는 남자에게 길을 물었다. 남자는 건너편의 불이 켜진 기와집을 가리켰다.
“저, 저쪽으로 가면 되오.”
“고맙소. 정말 저기 푸른 눈의 금색 머리 청년이 있는 게 맞소?”
“맞소. 내가 똑똑히 보았으니까. 큼큼. 그리고 나는 오늘 떠날 예정이니까 잘 사서 가시오!”
남자는 황급히 점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뭔가 찝찝한 뒷모습이었다.
나는 훤과 별호를 데리고 잰걸음을 했다. 별호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기분 좋은 얼굴로 폴짝폴짝 뛰었다.
“옷이 어찌 이렇게 가볍고 좋은지!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겠어!”
“너 아까 국밥 세 그릇을 해치웠다. 안 먹어서 배부른 게 아니라 많이 먹어서 배부른 거야!”
“다섯 그릇 먹을 걸 세 그릇밖에 안 먹은 건데…….”
별호는 입술을 비죽였다.
우리는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며 기와집 앞까지 당도했다.
남자의 말대로 기와집 앞에는 줄을 잔뜩 서 있었다. 모두들 한 가문 하는 집안의 양반들 같았다.
우리는 그들 뒤쪽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정말 그리 잘생겼소?”
“내 똑똑히 보았다니까! 눈은 사슴같이 촉촉하고, 몸은 또 어찌나 성이 났는지…….”
“오늘 난리 나겠구먼?”
“흥. 넘보지 마시오. 내가 벌써 침 발라 놓았으니까.”
“산 사람이 임자지,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얼씨구? 그대가 감당할 수 있겠소? 바깥양반 감시가 심하다며?”
“아랫것들 관리는 내가 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오?”
“아무튼 그 아이는 내 것이오!”
앞에 줄을 서 있던 마님들은 서로 먼저 사겠다고 다투어 댔다. 로버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경매 시장에 나올 노비가 유명하긴 한 것 같았다.
‘로버트! 제발 로버트여라!’
어느덧 우리 차례까지 다가왔다. 나는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문지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문지기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지?’
나는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문지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이십니까?”
“……내 소문을 듣고 처음 찾아온 것이라네.”
“패를 주셔야 합니다. 가문을 인증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증?”
주먹을 쥐었다. 아무래도 남자가 우리에게 사기를 친 듯했다. 훤과 별호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물러나야 한다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지기는 의심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인증할 수 없으면 오늘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가시죠. 뒤에 줄이 깁니다.”
“우리의 차림새를 보면 모르겠는가? 내 다음에 꼭 챙겨 올 터이니, 오늘은 들여보내……”
“안 됩니다.”
“이봐, 혹시 여윳돈 안 필요한가?”
“자꾸 이러시면 사람을 더 불러오겠습니다.”
문지기는 단호했다. 훤은 조용히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엎자. 엎으면 뭐라도 튀어나오겠지.”
“수를 봐. 수를! 우린 겨우 셋이라고! 어떻게 이겨?”
“저놈은 100대를 맞아도 일어날 놈이다.”
“별호도 검으로 맞으면 한 방에 가거든! 몸이 생명인 애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크흠! 가시오!”
문지기는 우리를 내쫓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때였다.
“내 일행이오.”
“……누구시오?”
“난 이런 사람이오.”
열하였다. 그는 비단옷 차림으로 패를 내밀었다. 패를 확인한 문지기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이고, 나리의 친구분이셨군요? 이제 알아뵈어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열하는 우리를 보며 씩 웃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열하의 어깨를 반갑게 잡았다.
“어떻게 된 거야?”
“관아에 가서 내 조사를 먼저 했지. 큼큼. 알고 보니 이 경매장이 관아에서도 눈감아 주는 곳이더군.”
“그래?”
“응! 내가 이렇게 쓸모 있고, 이 일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한단 말이다! 이제 알겠느냐?”
열하는 훤을 힐끔 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훤은 피식 웃었다.
“도망간 줄 알았는데, 그 정도의 멍청이나 속 좁은 놈은 아니었군.”
“무, 뭐? 당연하지! 내가 왜 도망가? 내가 없으면 큼큼, 너희가 잘할 수 있겠어?”
나는 열하의 볼때기를 꼬집으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