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갓본주의 조선 시대
오라는 녀석은 안 오고 며칠 전부터 밥은 먹지도 않으면서 주막을 기웃대는 중년의 한 아저씨가 나타났다.
내가 나가서 말을 걸자 주춤대는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저어기, 혹시, 저기 있는 거 파슈?”
“아뇨. 저거 제 수집품입니다.”
“산 값의 두 배를 쳐줄 테니 나한테 파는 게 어떠쇼?”
“안 팝니다. 제가 누굴 좀 유인해야 해서요. 혹시 그쪽이 읽고 싶으면 나중에 오세요. 그땐 뭐 그냥 빌려줄 수도 있으니까.”
“허이, 그게 아니고. 원래 우리 주인님이 이런 걸 찾으셨는데, 요즘은 통 구할 수가 없어서 알아보니, 댁이 아주 닥치는 대로 사 모은대서 수소문 끝에 찾아왔소.”
남자는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루를 빼곡하게 채운 책이며 그림들이 산더미처럼 차곡차곡 전시되어 있는데 갖지를 못하니 야속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죠. 저도 국밥 팔아서 지금 저거 사 모으느라 힘들긴 한데. 뭐 주인이라는 작자가 혹시 뭐 못 구해 오면 때려요?”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매 맞는 게 낫지. 것보다 훨씬 징글맞소. 밤새 아무것도 모르는 날 붙잡고 작품들에 대해 떠들어 대는데, 나를 붙잡고 종일! 일도 못 하게 방해하오.”
나는 싱긋 웃었다.
“좀 피곤한 주인이긴 하네요.”
남자는 눈을 글썽이며 내게 두 손을 합장한 채 말했다.
“사람 하나 살린다 치고, 어떠슈? 파는 것까지는 안 되더라도, 그러면 우리 주인님이 여기 와서 한번 보는 건?”
“뭐,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주인이라는 놈이 밤새 얼마나 괴롭힌 것인지 이해했다.
내가 아는 누구누구도 멤버들에게 강의를 펼쳐 댔기 때문이었다.
“형은 책이 재밌어?”
별호가 심심해서 던진 질문에 열하는 열과 성을 다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책이 좋은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간접 경험을 이 한 권으로 이뤄 낼 수…….”
별호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고 열하는 뿌듯해하며 별호에게 다 읽은 책을 선물해 주기까지 했다.
나머지 멤버들과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쿡쿡대며 웃었지.
이런 추억에 잠겨 있던 것도 잠깐, 남자가 다시 이 주막으로 나를 불러들였다.
“하, 그런데 그분이 이런 평상에서 뒹굴거리실 분은 아니올시다. 좀 남들에게 안 보이는 그런 곳 없소?”
나는 세모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주막집에 그런 게 있겠어요?”
“허허, 그분은 일개 주모나 보통 사람은 일평생 잘 뵙지도 못할 분이시거늘. 아주 청렴결백하시고 귀하신 분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놈의 신분, 벼슬 타령은 사라져야 마땅했다.
나는 부글대는 화를 누르고 말했다. 하루 베풀고 돈이나 받지 뭐.
“아, 하나 있긴 해요. 저기 저 녀석이 묵는 방이요.”
남자는 별호의 방을 열더니 성에 안 찬다는 듯 벽이며 구멍 뚫린 창호지를 만지작댔다.
“당연히 마음에 안 드시죠?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나중에 오세요.”
내가 나가라는 눈치를 주는데도 남자는 방 여기저기를 기웃댔다.
“여기 오시는 것이 참말로 마뜩잖단 말여.”
나는 결국 못 참고 남자의 등을 획 떠밀었다.
“아, 그럼 그렇게 고귀하신 분이면 오지 말든가. 난 아무 상관도 손해도 없네요!”
내가 큰소리를 치며 팔짱을 끼자 아저씨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것은 아니고. 우리 주인님이 여기 오면 좋아는 하실 것인디. 조금 수리했으면 했지. 오시기 전까지만. 그럼 일단, 오늘 밤에 좀 모시고 와도 되겄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뭐 조용히 와서 그냥 보고 가라고 전해요. 알겠죠?”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책이나 그림이 본다고 닳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거나 자신의 하인을 때리지 않는다는 점도 맘에 들었다.
이곳에서 그런 젠틀한 사람 하나 알고 지내는 것은 분명 큰 재산이 될 것이다.
“그럼 오늘 밤이오! 꼭이오!”
아저씨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귀찮아져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오라는 열하는 안 오고 참!
* * *
밤이 되자, 한 남자가 찾아왔다.
조용히 와서 보고 가랬더니, 검은 복색을 한 것도 모자라 얼굴 앞에 무슨 천까지 덧댄 채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도둑인 줄 알고 별호와 식겁했지만 사내 역시 흠칫 놀라며 우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네. 긴장 풀게들. 오늘, 내가 보낸 사람 하나가 오지 않았는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두리번댔다.
“물건들은 어디에 있지?”
나는 마루를 가리켰다.
“저쪽이고, 마루에 다 있으니 보시든지. 뭐, 나이 많을 줄 알았더니 아니네?”
“…….”
“어쨌거나, 저기 저 방에 들어가서 봐요. 훔쳐 가면 다 아니까 조심하시고요.”
남자는 인사도 없이 쌩하니 마루로 향하더니 앉아서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게 다 여기 있었구나! 그동안 너무 그리웠다!”
나와 별호는 평상에 앉아 그 광경을 보며 손가락을 머리 주변으로 빙빙 돌렸다.
“주모 누이, 아무래도 저치는 맛이 갔나 보오.”
“그런 것 같더라. 하인한테까지 공부를 시킨대.”
방문이 쾅 닫히는 것을 본 뒤, 나는 별호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달빛이 잔잔하게 흙바닥에 내리자 무대처럼 반짝이는 듯했다.
지금부터 별호를 훈련시킬 딱 좋은 시간이니까.
“뭐, 왜, 왜 쳐다봐요? 주모 누이 눈이 지금 그 이방 마님 같아요.”
나는 별호의 등짝을 내리쳤다.
“이 자식이 아무리 그래도 나를 어디에 갖다 대? 에휴, 속 터지니까 노래나 낭창낭창하게 한 곡 뽑아 봐! 아무거나 불러. 아무거나.”
별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일할 때 부르는 거요? 난 아무렇게나 지어 부르는데.”
“그래. 작곡 작사 된다는 건 아주 엄청난 재능이다. 지금부터 시, 시, 시! 작!”
“아, 그럼 일거리나 좀 줘요. 일하면서 부를 테니까.”
여기에 오더니 아주 이상한 버릇만 생겼다.
나는 볏단을 가져다 별호 앞에 놓았다. 그러자 녀석은 그걸 엮어 바구니를 만들며 노랫가락에 시동을 걸었다.
역시 곧잘 해냈다.
갈라지는 허스키한 보이스. 그래, 이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열하까지 온다면, 어쩌면 엔터테인먼트 대표였던 내 꿈을 다시 그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별호의 손에 쥐여 줬던 볏단을 뺏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춤도 춰 봐. 덩실덩실 추지 말고 좀 각을 딱딱 주고!”
덩어리가 크니 춤 선이 섬세하지는 않았다.
“절도 있게 딱딱 끊어!”
내 말에 별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이었다. 하면 할수록 춤은 느는 법이니까.
나는 박수를 치며 박자를 맞춰 주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없는 통에 깜장 복색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혹시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 우리가 동작을 멈추고 바라보니 그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크흠, 책을 읽으려는데, 시끄러워서 집중할 수가 없소.”
별호가 입을 삐쭉댔다.
“참 나. 귀 틀어막고 읽지. 읽게 해 주는 것도 감지덕지인 줄 모르고.”
계속 헛기침을 하던 깜장이는 조금 머뭇대며 말했다.
“그, 딱, 딱 끊기는 그거. 댁들이 지금 하는 거. 내가 좀 할 줄 아오.”
깜장이는 박자를 타더니 갑자기 흙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해냈다.
“오, 공부벌레인 줄 알았더니?”
별호가 낄낄대며 노래를 이어가자 음악에 맞춰서 깜장이가 선이 딱딱 살아 있게끔 절도 있게 춤을 췄다.
“별호야, 내가 말한 게 저거야! 저거!”
기뻤다. 별호가 저것을 보고 한층 더 성장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저 깜장이와 별호를 친하게 지내게 하고 싶었다.
달빛 아래, 아직 가다듬어지진 않았지만 별호의 허스키 보이스에 저 춤 실력이라니.
나는 원석들에게 둘러싸여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서아원, 드디어 다시 꿈을 보았다.
깜장이와 별호가 신이 난 모양인지 이제는 내가 시키지 않아도 둘이서 한껏 춤판을 벌였다.
나도 함께 서서 그들과 손뼉으로 박자를 맞춰 주며 즐기는 와중, 갑자기 깜장이의 얼굴에 드리웠던 천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쭉 째진 긴 눈에 오똑한 콧날, 그리고 팬들이 앵두 입술이라고 부르던 그 빨간 입술.
열하였다.
천이 떨어진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무아지경으로 놀고 있는 열하와 별호를 보며 나는 평상에 앉아 싱긋 웃었다.
그래. 올 줄 알았어.
두 시간 넘게 흔들어 대던 둘은 평상에 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바가지에 물을 떠 건넸다.
얼굴에 천을 달고 온 것도 까먹었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신 열하는 입가의 물을 자연스레 훔친 뒤 그제야 사색이 되었다.
“얼굴을, 어, 내 복면이 어, 어디 갔소? 가, 가려야 하는데.”
나는 고이 접은 까만 천을 내밀었다.
“이번에 장원 급제한 사람. 이름은 열하. 맞죠?”
내가 건넨 천을 받아 들며 열하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하, 어떻게 바로 알아봤소?”
“이제 다 봤구먼 뭘 가리쇼?”
별호가 끔뻑대며 열하를 바라보자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이 벌써 널리 알려진 겐가? 그렇소. 난 이번에 새로 부임하게 된 사또요.”
사또? 니가 사또라고? 그건 몰랐는데. 나는 이 놀라운 소식에 머리가 띵해졌다.
“사람들은 사또가 글이랑 그림 좋아하는 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내가 춤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오.”
그렇지. 아무래도 그건. 전에도 골치를 앓았던 문제다.
서울대를 다니던 열하가 아이돌 데뷔를 앞두자 그의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반대가 막심했더랬다.
“그런데 글과 그림이 잔뜩 있대서 왔는데 이렇게 춤도 추고 노래도 한껏 부르니 오랜만에 좀 살아 있는 것 같소.”
그렇다. 사또가 되어 버린 열하. 저 녀석도 영원의 다른 조각이 분명했다.
나는 열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뭐,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뭐요?”
일이 끝나자마자 여기로 와서 연습생 시절처럼 연습하면 된다는 것을 매우 돌려 말했다.
“밤에 와서 맘껏 책이나 그림도 보고 또 별호랑 나랑 춤이나 노래 연습도 하면 어때요?”
내 제안에 열하는 곧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그래도 되오?”
“당연하죠.”
나는 너그러이 웃어 보였다.
“아침에만 관아에 잘 들어가 일하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 이게 바로 숙소 생활이지.
뭐, 사또를 하면서 준비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세상에 투잡러들이 얼마나 많은데.
열하는 이미 마음이 다 넘어온 것 같았다. 내 제안에 그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근데, 하나 약속할 게 있어요.”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는 열하에게 나는 말했다.
“장소 제공, 춤과 노래 연습 도움, 숙식 제공 가능. 이게 뭔 줄 알죠?”
“…….”
“앞으로 나를 대표 누이라고 부르세요. 이건 약속이야. 내가 이제 대장이라는 말이거든.”
별호와 달리 사또까지 단 열하는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인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싫음 말고. 나를 대장으로 대할 게 아니면 다 무르시든지.”
내가 등을 휙 돌리자마자 열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성질도 급하여라. 대, 대표 누이!”
그래. 이 맛에 대표 하지.
영원의 다른 멤버들까지 있길 바라면 욕심일까?
나는 둘이서 투닥대며 노는 두 녀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훤, 로버트, 그리고 현명.
셋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각에 잠겨 슬픈 표정을 지었는지 별호와 열하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 일단은 지금 내 눈앞에 저 둘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뭘 봐?”
나는 양쪽 팔에 각각 두 녀석을 끼워 넣고 헤드록을 걸었다.
커다란 녀석들이 일어서니 내가 오히려 버둥대는 꼴이었다. 다리를 파닥거리며 외쳤다.
“아이 씨, 너네 대표한테 이러는 거 아냐.”
그렇게, 또 하나의 영원을 찾은 밤이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