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아이돌-4화 (4/27)

4. 이름을 찾아서

“오늘 본 내용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나?”

“…….”

“내 지금 당장 보고 들은 셋 모두를 처단할 수도 있으나, 뭐 매번 죽일 수는 없으니…… 100냥이다.”

“…….”

“내 귀에 오늘 이야기가 들리지 않도록 처신 똑바로 하거라.”

나는 흙이 묻은 엽전 꾸러미를 집어 그대로 이방의 앞에 던졌다.

“지금 혹시 살인 예고를 하시는 건가요?”

“지금 뭐라 하였느냐?”

“무서워서 울겠네! 누가 좀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해 줘요! 하, 이방 위에 사또인가?”

“이 계집이…….”

“내일 소문 한번 쫙 내 드릴까? 나 주막 하잖아. 한낱 백성한테 세도 부린다고.”

말을 마치고 나는 심호흡을 했다.

저런 놈이 나타날 때면 나도 나를 통제하기 어려웠다.

“일단 이 머슴은 제가 데려가 조용히 살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돈으로 사고 팔 존재가 아니니 그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이방은 멍한 표정이었다.

그래, 네가 그간 얼마나 갑질해 댔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어떤 여자라도 댁이랑 살면 바람날 수밖에 없겠네요. 이게 오늘 본 일에 대한 제 결론이고, 이제 앞으로 서로 볼 일 없이 지내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

“아, 참고로 저분, 어쩌면 댁에게 과분한 여자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방이 화가 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전, 이게 오늘의 타이밍이었다.

아직도 꾸벅대는 별호의 얼마 안 남은 옷깃이라고 불렸을 누더기 조각을 잡고 나는 문간을 나섰다.

“저, 고, 고얀 년. 내 내일 너를 당장 족칠 것이야!”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이 풀렸다.

“망신 당하기 싫으면 너나 닥치고 가만히 있어. 오늘 네가 한 짓거리부터 너희 부부 가정사로 동네방네 소문내기 전에. 네가 얼굴이나 들고 다닐 수 있겠어?”

뒤를 힐끔 보니, 이방은 부들대며 떨면서도 발 앞에 놓인 엽전을 주워 들어 탁탁 털어 내고 있었다.

아내의 상처나 이번 사건이 그에겐 아무 충격도 주지 않은 것 같았다.

돈과 명예만이 중요한 자, 이방의 어깨 너머로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듯 아슬아슬한 두 남녀가 보였다.

나는 서둘러 별호를 데리고 그 혼돈의 현장을 빠져나왔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방은 자신의 아내를 빼앗긴 사람답지 않게 매우 차분하고 동요가 없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이방이 가엾은 사람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사실 진짜 가엾은 것은 마님일지도 몰랐다.

주막에 도착하자 별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주모는 몰랐겠지만, 저는 진작 알았어요.”

“아, 둘이 쇼윈도 커플인 거?”

“그게 뭔 뜻이에요? 제가 학당에 가 본 적이 아예 없어서.”

“아, 음. 겉으로만 사랑하는 척하는 부부라고.”

“그게 딱 맞죠. 저한테 맨날 하소연하는데 들은 척도 안 했어요. 뭐 사람 속 썩는 건 안 보이잖아요. 다들 그렇게 사는 거죠.”

별호는 단순했지만, 가끔 삶을 이해하는 결이 있는 녀석이었다.

뜻밖의 순간에 생각이 깊고 속 깊은 녀석으로 영원의 앨범 수록곡 중 다수의 작사를 맡았던 것이 떠올랐다.

이 아이를 지켜 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별호는 내 쪽을 힐끗 봤다.

“근데 이제 제 이름은 뭐예요?”

“무슨 이름? 너 짱돌이잖아? 짜앙또올.”

내가 낄낄대며 웃자 녀석은 귀까지 빨개졌다.

“아, 진짜 맘에 안 든대도요. 그럼 부르지 마요.”

나는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대충 졸라맨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그렸다.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선 졸라맨.

그림 실력이 형편없긴 했지만 그래도…….

“너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전생의 무대라든지 반짝거리는 빛이라던지? 너 대스타였잖아. 알지?”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댔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시늉까지 해 보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기억은 먹고 죽으려도 없는데요.”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넌 기억도 처먹냐?”

녀석의 등짝을 때려 봤자 내 손만 아플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 녀석이 모든 기억을 잃었더라도, 나와 인연이 닿아 이곳에서 만난 이상,

그 이름을 다시 주는 것이 맞았다.

“별호야.”

“날 처음 봤을 적부터 별호, 별호…… 하더니만. 근데 그게 뭔 뜻인데요?”

“별나게 힘센 호랑이래. 어릴 때 별명이라 그랬나, 그게.”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지었는가 보네요. 실제로 보면 오줌 지려요.”

정말 더 순수해졌구나.

나는 별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왈칵 올라오는 것 같았다.

교도소에 간 뒤부터 느끼지 못했던 것.

내 가족과 다름없던 아이들.

영원의 한 조각을 만났다.

* * *

다음 날, 일어나자 마을에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밤새 이방이 칼을 맞아 죽었고 그를 살해한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염소와 마님 둘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가 서늘했는데 일어나자마자 들리는 흉흉한 소식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국밥 나르는 것을 돕던 별호가 몸서리쳤다.

“어후, 간밤에 짱돌, 짱돌 하며 부르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는 것도 같던데.”

나는 놀리듯 별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 여기 있습니다요! 하고 걸어 나갔어?”

별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뇨. 문 딱 걸어 잠그고 자래서 시키는 대로 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라면 별호를 마지막으로 보겠다며 이곳에 찾아왔을 수도 있었다.

“별호 사랑받았네.”

내가 계속 놀리는 투로 말하자 별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평상에 국밥을 이고 나갔다.

확실히 둘이서 일을 하니 수월하긴 하다만…….

남자들이 득실대던 주막이 저 녀석이 서빙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녀자들이 오히려 평상에 죽치고 앉아 있는 기이한 현상을 맞게 되었다.

나는 별호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 누더기 옷.

그래. 반쯤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비드 조각상이 반쯤 벗고 국밥을 나른다니.

이건 낭비다. 분명한 인적 재능 낭비.

나는 황급히 방에 들어가 옷을 찾았지만 입힐 옷이 마땅찮았다. 다행히 취객이 놓고 간 옷이 있어 망정이었으나 별호가 입기에는 조금 작아 보였다.

안 그래도 덩치가 너무 커서 시장에 가서 직접 맞춰 입혀야 할 듯했다.

어떻게 저런 누더기를 입은 채 완벽한 몸을 가릴 생각을 않고 걸어 다니는지.

나라면 시선이 따가워서라도 뭐라도 주워 입었을 텐데.

하긴, 러시아보다 춥다는 서울의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니던 열 많은 녀석이었다.

“아 괜찮다니까요오. 어짜피 다 금방 해어져요.”

“돈을 쓰면 쓴 만큼 질이 좋아져. 그리고 내가 뭐 막일 시키니? 옷 해지면 혼날 줄 알아.”

투덜대던 별호는 장터에 들어서자마자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간다더니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떡집이나 과일가게 앞에 한 번씩 꼭 멈춰서 음식을 뚫어져라 보는데 어떻게 사 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양 볼이 미어터지는 것뿐만 아니라 양손 두둑이 짐을 든 별호만 봐도 배불렀다.

별호를 데려가 치수를 대충 쟀는데도 광목점 사장은 허탈하게 웃었다.

“남들은 이 정도면 옷 두세 벌은 해 입습니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떡을 문 별호는 무슨 소리냐는 듯 천진하게 나와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을 떼 저고리며 바지를 맞추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사람들이 시장길을 서둘러 정리하고 있었다.

“무응 일이에여?”

입에 음식이 가득 찬 채 별호가 한 상인을 잡고 물었다.

“아, 지금 새로 온 사또가 행렬을 한다나 봐, 그래서 길을 내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늘어놓았던 좌판을 정리하는 상인들을 보고 있자니 호기심이 일었다.

“사또면 공부 잘한 거지? 장원 급제해야 사또가 되는 거잖아? 전국 일등이야?”

“예, 일등이죠.”

“서울대 정도 되나 보네.”

“뭐, 주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진짜 똑똑할걸요?”

주막에 다다르자, 대체 어디까지 행차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말 탄 이와 그 앞의 악대가 성대하게 연주하며 지나가는 사또 행렬이 보였다.

갑자기 별호는 내 머리까지 꾹 눌러 가며 바닥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구경 좀 하자니까?”

“나, 나는 또 높으신 분이 왔으니 고개를 숙여야 하는 줄 알았지요.”

“봐라, 다 구경하고 있잖아?”

“사또는 처음 봐서 그렇소, 큼큼.”

주변 사람들도 나처럼 모두 구경하고 있었다. 별호도 그 사실을 깨닫고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별호가 주눅 든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나는 그를 다독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전국 1등 한 사또가 뭐 벼슬이야?”

“벼슬이지.”

아. 벼슬이지…….

이번에는 내가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이 장원 급제해서 사또까지 된 사람이구나.’

화려한 말에 탄 녀석은 생각 외로 날렵한 인상에 꼭 내가 아는 사람을 꼭 닮, 은 정도가 아니라…….

열하였다.

우리 둘째.

“열하야! 열하야!”

손을 머리 위로 휘젓자 녀석이 그제야 날 바라보았다.

짜식, 너도 여기 왔구나. 넌 좀 똑똑했으니까 별호랑 다르게 다 기억하지? 우리! 원 엔터테인먼트잖아.

“열! 열하! 열 번 넘게 하루 종일 보고 싶어! 열! 하!”

전에 팬들이 열하를 부르던 구호까지 써 가며 제 이름을 부르자 내 쪽을 힐끔 보던 녀석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아니, 저 자식 지금 나를 쌩 깐 건가?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밀려드는 배신감에 얼어붙어 있는데 마치 호위 무사 같은 사람이 다가왔다.

여기도 다 그런 가드가 있구나.

“닥치거라. 지금 장원 급제하신 분의 존함을 감히 입에 올리는 게냐?”

멍한 내 앞을 별호가 막아섰다.

“미친 사람입니다요, 나리. 많이 아픈 제 누이입니다요. 한 번만 봐주십쇼.”

누가 아파? 내가? 아픈 건 저 자식이지.

시니컬하게 고개를 휙 돌리는 걸로 봐서 저 자식은 분명 열하다.

서울대 재학 중, 아이돌 데뷔를 한 것으로 유명했던 열하.

낯가림도 심하고 츤데레 기질이 있어서 막내를 제치고 팬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던 놈이다.

안무나 가사 습득력이 다른 멤버들에 비해 월등했다. 그러니 여기서도 사또까지 한 거지.

나를 모르는 척했겠다?

가드와 얘기하는 별호를 두고 나는 주막으로 돌아와 앉았다.

열하의 취향을, 난 잘 알고 있었다.

주막을 그 장으로 꾸미는 것은 일도 아니지. 내가 비열하게 웃자 문간을 넘어선 별호가 흠칫 놀랐다.

“차라리 이방네가 나았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별호의 혼잣말에도 나는 개의치 않고 주막을 열하가 좋아하는 것, 아니 사족을 못 쓰는 것들로 가득 채울 계획을 세웠다.

네가 과연 안 오고 배기나 보자.

* * *

다음 날부터 나는 모든 보부상들에게 부탁했다.

“다 산다니까요?”

“아니, 주모가 그걸 어디다 쓰게? 내가 지고 온 담에 또 말 무르면 어쩔 거요?”

“아니, 나를 뭘로 봐요? 나도 고상해요. 좀 잘 안다니까?”

보부상들은 코웃음을 쳤다.

“댁이 좋아하면 내가 화가 작가 다 했슈!”

그렇다. 열하가 사족을 못 쓰는 것은 책과 그림이었다.

스케줄을 쉴 때 뭐 하냐는 질문에 미술관이나 도서관에 간다는 대답을 하던 녀석.

처음에는 언론에서 가식적이라는 둥, 컨셉질이라는 부정적 반응이 쏟아졌지만 실제로 도서관이나 미술관에서 팬들에게 자주 목격되었다.

덕분에 휴일에 도서관이나 미술관, 서점 등에 사람이 가득 붐비는 현상을 만들어 낸 녀석이었다.

“제게 그게 진정한 휴식이에요.”

뭐, 서울대까지 갔으니까 대중은 그가 일탈하길 바랐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악플이 제일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양아치처럼 생겨 가지고는!

―너네들도 문화생활 좀 해라.

열하에게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을 보며 멤버들이 깔깔대며 놀리기도 했다.

나는 열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 줬더랬다.

“아냐. 안경 쓰면 공부 잘해 보여.”

열하는 그 뒤로 안경을 자주 썼다. 그 이미지가 또 이지적으로 보여서 배우 제의가 많이 들어오기도 했지.

보부상들은 투덜대면서도 내가 엽전을 짤랑대자 책이며 그림을 잔뜩 가지고 왔다.

나는 그것들을 조심스레 우리 주막 한켠에 쌓아 두기 시작했다.

비싼 그림부터 아직 가치를 모를 받은 그림이나 서책들 모조리 다.

돈을 많이 주고 물건을 사는 모습을 별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모가 아는 사형이 아님 어쩌려고요? 그 누더기 그림이나 책을 어디다 쓰려고?”

“돈은 또 벌면 돼. 또 벌어서 올 때까지 살 거야.”

별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일하러 가 버렸다.

열하, 네가 맞는다면. 그리고 이것들의 가치를 안다면, 네가 직접 찾아오겠지.

나는 책들을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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