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머슴 구하기 2
곧 죽어도 별호를 안 팔겠다고 버티기에 어쩔 수 없이 나도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여자가 싫대도 마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내가 어쩔 도리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자애로운 이. 저 가엾은 아이를 가족처럼 여기니 과도한 관심 가지지 말게.”
본인 입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 치고 정말 착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염소도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저놈이 밥은 많이 먹지만, 또 황소만큼 일하니 굳이 팔아 치울 필요는 없습죠.”
셋이 싸우거나 말거나 별호는 태평하게 마구간으로 향했다.
별호의 뒷모습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람은 환경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별호의 목에 묶인 보이지 않는 사슬이 내 마음을 옥죄어 왔다.
문간으로 마님과 염소가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 틈을 타 별호에게 엽전을 쥐여 주었다.
“내가 별호, 아니 짱돌 씨를 친동생처럼 생각해요. 언제든 배고프면 오고. 어디 산다고 했죠?”
“여기서 가까운데, 관아 근처에요……. 근데 정말 와도 돼요? 밥이 너무 맛나서요.”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럼요. 언제든 와요.”
별호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 저를 사 주실라고 한 건 뭐 무슨 맘인지는 아는데, 아마 안 될 거여요. 절대 저를 놔주려고 안 할 테니께요, 일단은 말이라도 고맙습니다요.”
순간, 별호의 얼굴에 스치는 빛이 어두웠다. 저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가축과 다를 바 없는 존재…….
“잉, 짱또올, 빨리 오게낭.”
듣기 싫은 마님의 교태 소리가 들리자 별호는 내게 고개를 푹 숙여 보인 뒤 그들에게로 향했다.
이럴 수는 없다.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어떻게 해서든 별호를 데려와야 했다.
* * *
나는 그날부터 이방의 집과 각종 소문을 손님들에게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방 나리 댁? 뭐 관아 근처에 응, 그 저잣거리 초입에 있는 집. 거기야.”
“아, 근데 그 집이 말야.”
“그치. 이방 나리만 모르고 다 알지.”
“아이고. 그 양반, 마누라가 박색이라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네.”
나는 여기저기서 하는 이야기들에 흥미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많았고 우리 주막은 모든 소문, 즉 가십의 장터였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만큼 많은 이야기가 손님처럼 드나들었다.
곧, 정보 수집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별호를 빼낼 수 있는 것이 돈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뛰어든 엔터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 시간 못지않은 ‘타이밍’이었다.
먼저, 이방의 얼굴을 익히려고 관아 앞까지 산책을 다녔다.
그를 알아보는 것은 예상보다 쉬웠다. 염소가 굽신대며 항상 옆에 붙어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방은 마누라와 달리 바싹 말라 있었고 신경질적인 느낌으로 눈썹 한가운데에 내 천(川) 자가 새겨져 있었다.
염소는 이방네 집의 집사인 것 같았다.
출퇴근길마다 이방을 모시러 나오고 한낮에는 마님 옆에 붙어서 또 놀아나는 것이 일과였다.
‘재미있는 인생이네…….’
곧이어 나는 관아 앞에서 염소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머,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염소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 요 앞 저잣거리 주모 아녀? 거기서 가만히 국밥이나 말 것이지 왜 쏘다녀?”
“어, 그 집에서 밥이나 하라는 말 전에 한 번 들어 봤는데. 시대를 아우르는 레퍼토리네요.”
“크흠, 뭔 소리여? 어쨌거나 앞으로 알은척하지 마. 팍 씨, 언제 봤다고 감히.”
손을 치켜들며 나를 위협했으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는 염소의 옷깃을 붙잡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요즘 마님 때문에 맘고생 중이시라던데요.”
“뭐, 뭣? 나, 내, 내가 언제?”
“마님도 그쪽 좋아하고 서로 정말 연모하시는 게 보이더라고요. 근데 그 머슴이 장애물이던데요?”
얼굴이 빨개진 염소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은 큰 고난이었다.
‘주변에 이런 비주얼을 내 곁에 오래 두다니…….’
염소에게 마님과 있었던 러브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아무래도 그는 속으로 끙끙 앓다가 내가 살살 긁자 터진 듯싶었다.
취존! 취향 존중……!
그래 각자에게는 각자의 매력이 있으니까…….
내가 염소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그는 한술 더 떠서 둘의 애절한 사랑의 증표까지 알려 주었다.
둘이서 옥구슬을 반을 갈라 나눠 가진 뒤 항상 지니고 다닌다고.
“요즘엔 낮에도 나한텐 오질 않고 맨날 그 짱돌인지 하는 머슴 놈한테만 가…….”
“그러니까 마님한테 짱돌이 껄떡댄다고 그걸 어르신한테 일러바쳐서 걔를 내치든지 해요.”
내 계획을 듣고 나자 염소는 두려움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장이 콩알만 한 자식…….
“그, 그러다, 혹시 마님이 잘못되면?”
“뭐, 머슴이 마님을 쫓아다녔다고 다 걔 잘못이라고 뒤집어씌우면 되죠.”
“……그래도…….”
“망설이다가, 짱돌이랑 마님이랑 둘이 눈 맞아서 튀면 그땐 어떡할래요? 그럼 그쪽만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지. 생각 잘해요.”
염소는 주먹을 쥐고 내 말에 맞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와 약속 시간을 정한 뒤, 나는 느긋하게 주막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는 화창해 보였으나 저 멀리에선 먹구름이 드리워 오고 있었다.
적당히 부채질만 해도 사랑에 눈이 먼 장님들에겐 태풍이 될 터…….
부디 이 바람에 휘말려 멀리 날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나를 비롯한 영원의 멤버들만 아는 별호의 특이하다면 특이한 신념.
오늘 그것에 배팅하기로 했다.
저 사람이 별호라면 아마도 내 생각대로 될 것이었다.
* * *
어스름이 드리우자 별호의 방에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이방네 집 근처에 몸을 숨겼다.
얼마간 밤이 깊어지자 마님이 문을 열고 기지개를 켰다.
“흠흠,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없지?”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자 마님은 슬그머니 별호의 방문을 열었다.
곧, 앵앵대는 마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이 퍼렇게 집의 앞뜰을 비추고 있다가 서서히 구름이 잔뜩 끼면서 사방이 깜깜해졌다.
때를 맞춰 이방과 염소가 중문을 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시만 좀, 몰, 몰래, 보셔야 할 현, 현장입니다!”
염소가 말리는데도 이방은 성큼성큼 걸어 망설임 없이 마루의 호롱불을 집어 들고 별호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나도 서둘러 문지방에 올라섰는데, 그 광경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어,어마맛!”
별호는 만반의 방어 태세를 취한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불로 온몸을 둘둘 말아 만질 구석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옆의 마님은 속옷 바람으로 별호를 굴려 이불을 조금이라도 벗겨 보려 낑낑대고 있는 모양새가 처량하기까지 했다.
뒤늦게 혼비백산해 몸을 손으로 가려 보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역시, 내가 아는 그 녀석이 맞았다.
철벽남 별호.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혼전 순결을 지킬 것이라며 스캔들 한 번 낸 적 없던 그 녀석.
그런데 현장을 본 남편인 이방보다 염소의 표정이 더 구겨져 있었다.
“마, 마님! 서둘러 옷을 챙, 챙기십쇼! 그 속살을 어휴!”
이방은 등을 휙 돌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세 사람 다 앞마당으로 모이도록 하거라.”
마님은 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잠이 덜 깬 별호는 눈을 비비며 서서 꾸벅꾸벅 졸았고…….
염소는 쉴 틈이 없었다.
이방의 눈치를 살피고 동시에 마님은 애절하게, 별호는 노려보며 눈알을 휙 돌려 댔다.
이방이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염소가 대신 말했다.
“마님의 무죄를 증언해 줄 한낱 주모이옵니다.”
글쎄. 내가 그렇게 해 주겠다고 확답한 기억은 없는데…….
갑자기 마님이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소녀,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누가 소녀라는 걸까?
“제가 마음이 너무 쉽게 동했사옵니다. 머슴의 눈빛에 제가 그만…….”
“…….”
“청이 하나 있사오니, 저를 벌하시옵소서. 소박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달게 받아들이겠나이다.”
별호의 눈꺼풀은 졸음과 엄청난 사투 중이었을 뿐,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눈치였다.
대단한 짝사랑 중인 염소는 한술 더 떴다.
“요, 용서하시옵소서. 제, 제가 옆에서 그 머슴 놈을 막지 못한 것이옵니다. 마님 대신 저, 저를 벌하소서.”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하는 저 이상한 커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별호는 뒤늦게 나를 보고 눈인사를 건넸다.
날 이제야 봤구나…….
‘그래, 별호야. 너는 유난히도 잠이 많아서 스케줄 때마다 졸음과 싸웠지…….’
때론 답답했던 모습이 지금은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방은 턱을 괸 채 인상을 찌푸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도 말해 보라는 건가?
“……주모라는 직업 탓에 그간 소문을 익히 들어 왔습니다만, 소문은 확실한 것이 아니니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증거가 생겨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 염소수염과 마님 둘이 진정한 연인 관계입니다.”
“아니! 아닙니다요! 그건 약속이랑 다르잖아!”
염소가 내 입을 틀어막으려 달려들자 별호가 그 앞을 살며시 막아섰다.
“둘이서 옥구슬을 갈라 정표로 나눠 가졌으며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닌다던데 한번 확인해 보심이 어떨까요?”
이방이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구슬 반쪽? 나도 본 적 있네만, 내 처가 저고리를 입고 벗을 때마다 흘려 그 반쪽짜리 구슬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었나? 내게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물려주셨다고 했던 것을.”
이방은 염소에게 물었다.
“자네, 이곳에서 홀딱 벗겨질 텐가? 선택하게. 나도 더는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네.”
이방의 물음에 염소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옷깃만 꾹 부여잡고 있었다.
“허, 아들딸 여섯이나 있는 자네라 적당히 즐기다 끝낼 줄 알았건만, 지금 제정신인가?”
더는 대답도 하지 않는 염소를 보며 이방이 혀를 끌끌 찼다.
아니, 염소가 애가 여섯이나 있는 유부남일 줄이야.
점점 별호는 소동의 축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다행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대로 잘 풀리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입을 떼었다.
“저, 이 와중에 죄송하지만 저도 증언을 다 했고 이방님이 계속 속으시는 것을 원치 않아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오늘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소동의 근원은 저 둘이며 이 댁의 머슴은 무고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방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박색한 여인이라 정절이라도 지킬 줄 알았거늘, 집에 남자가 들어오는 족족 사족을 못 쓰는 것을 이미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어쩐지, 너무 태평하다 싶었다. 지금 벌벌 떠는 이는 염소와 그의 애인 마님뿐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돈이 많은 집안의 여식이기에, 그대를 언제든지 용서하겠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님이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쉽게 용서한다고?
아니, 저 여자는 남편이 용서하겠다는데 왜 저런 반응이야?
“차라리 날 버리시오. 사랑도 없는 이 혼인 생활을 난 더 못 견디겠으니! 난 사랑 하나만 바랄 뿐인데!”
이방은 인자하게 웃으며 마님의 손을 잡아 올렸다.
“무슨 소리?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소. 앞으로도 그냥 겉으로만 내 부인으로 살아 주면 되오. 서로 다른 누구와 놀아나도 상관치 않고.”
마님은 망연자실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더는 우는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그 옆에서는 염소가 어찌할 줄 모르고 서성대고 있었다.
이방은 내게 다가와 엽전 꾸러미를 툭 소리가 나게 내 앞에 던졌다.
“이건 입단속 값이다.”
엽전? 아, 돈? 나를 지금 고작 100냥에 매수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