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아이돌-2화 (2/27)

2. 머슴 구하기 1

이곳에서 며칠 지내본 결과 모든 것이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게 환생이거나 평행 우주의 다른 세계로 온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내가 알던 조선을 닮은 시대로 온 것이라고.

왜냐면 이곳은 내가 알던 역사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난 이곳을 신조선 시대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난 국밥 명인이라고 불렸다.

팔팔 끓는 국밥 그릇이나 아궁이 뚜껑을 만지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그릇이고 넓은 나무 판에 얹어 머리에 이고 나르는 일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손님들에게 돈을 받으면 그 돈들은 뒤뜰의 항아리며 무거운 놋쇠 그릇 밑에 숨기는 것까지…….

모두 몸이 기억하는 일이었다.

꽤 수북한 엽전들을 보며 나는 감탄하기까지 했다.

‘주모의 삶이 조선에서 먹고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늘 안정보다 꿈을 좇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슴 뛰며 열정적으로 해 왔던 일은 엔터 사업이다. 그 꿈이 이곳에 왔다고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도 아니었고.

우물에 다가가 비춰 본 내 몰골은 찌들어 있었다.

기름에 절어 흰색이었을 저고리는 누리끼리했고, 얼굴도 불 앞에서 붉게 익어 있었다.

지금의 모습은 마치 마지막이었던 죄수복을 입은 내 모습과 비슷했다.

나는 내 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손가락에 스몄다.

관짝에 들어가 눈을 감은 이후로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저승에서 최혁재를 다시 죽이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내 마지막 염원이었건만!

슬픔에 잠겨 있는 와중, 우물에 나뭇잎이 떨어져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물결에 얼굴이 흩어지더니 우리 영원 멤버들의 모습이 잠깐 우물에 비치는 듯했다.

가슴 한켠이 아려 왔다.

그 세상에서 애들은 지금 어떻게 잘 살고 있을까?

그래도 영원과 원 엔터 대표인 내가 누명을 썼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졌으니 애들이 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잘 지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서울에 사는 우리 애들보다는 당장 조선에서 살아가야 할 내 앞길이 더 막막했다.

천하의 서아원이 천민이라니.

서울에서도 수저 운운하며 출신을 나누는 게 있었지만 난, 타고나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 타고난 재능도 분명히 있을 테니 이번 생도 내가 잘 꾸려 나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번 생의 내 재능은 요리인 건가? 서울에서의 나는 요리에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놈의 주막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배꼽시계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울렸다. 주막에는 신분 상관없이 배가 고픈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국밥 한 그릇만 부탁하오.”

“이봐, 주모…….”

말을 거는 방식이나 화법, 나를 부르는 호칭마저 각양각색이었다.

아예 나와 말도 섞기 싫다는 듯이 자신의 몸종이나 부하에게 시켜 말을 거는 이도 있었다.

지독한 신분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깟 일에 크게 상처받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난 일이 한가해질 때마다 머릿속으로 돈을 많이 벌어 튼튼한 초가집이나 한 채 지어 유유자적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정갈한 마당에 강아지를 기르며 옥수수 심고 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조선판 포레스트 라이프였다.

흐뭇한 상상에 빠져 미소 짓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내 귓전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나는 귀를 부여잡은 채 도끼눈을 하고 그 말을 하는 놈을 훑었다.

‘뭐야, 염소의 환생인가?’

놈은 몇 없는 염소수염을 쓰다듬고는 혀를 끌끌 차면서 물었다.

“여기 이런 평상 말고 마님이 쉬실 곳 없느냐? 상것들이 없는 곳으로.”

나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제가 상놈인데 상놈이 주는 밥을 드실 수나 있나요?”

“허허, 이 천한 것이 누가 이곳에 오신 줄도 모르고! 무려! 이방 나리의 마님이시란 말이다!”

화를 내자 염소수염도 함께 푸르르 떨렸다.

면전에 대고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이방이고 저방이고 알 바 없고 그냥 아무 데나 앉아서 먹으라고 해요. 여긴 그런 거 없으니까.”

전부터 갑질하는 사람들하고는 말을 오래 섞을 수가 없었다.

그게 이번 생이라고 별반 고치고 싶은 부분도 아니었고…….

염소수염은 대문께로 나가 여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의 이방 마님이라니 호기심에 나도 입구를 바라보았다.

장옷을 뒤집어쓴 한 여자가 쓰개 옷을 내리고는 말 위에서 염소수염에게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콩알 눈 밑으로 양쪽 볼에 욕심 가득한 심술보가 붙어 있었다.

여자의 입가가 씰룩대자 입 옆의 큰 점도 함께 움직였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듯이 주막을 탐탁지 않게 쏘아보던 마님은 말 뒤편에 가려져 있는 한 사내를 아련하게 바라보며 염소에게 말했다.

“그래도 짱돌이 많이 먹어야 또 힘도 쓰고 기분도 좋아지지 않겠나?”

사람 이름이 짱돌이라니.

보나 마나 저 사람도 천민일 것이었다.

말 뒤에 가려졌지만 떡 벌어진 어깨만 봐도 그의 체격이 얼마나 다부진지 알 수 있었다.

염소가 말을 끌고 주막 한쪽에 있는 마구간으로 향하는 내내 마님은 연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 뒤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어휴, 내 이런 천하고 누추한 곳에 다 오다니.”

“암요! 알죠!”

“내 너만 아니면 이런 곳에 생전 오질 않는다. 내 마음이 어떤지 좀 알겠느냐?”

교태 어린 목소리로 여자는 말 뒤에 서 있는 그림자 같은 체격의 짱돌에게 말을 걸었다.

누가 봐도 짱돌이 이방은 아닐 텐데…….

꽤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단단하고 다부진 느낌의 남자는 말이 멈추자마자 마님이 말에서 내릴 수 있도록 자신의 허리를 굽히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곧 마님이 말 위에서 그의 등을 밟으며 괜히 균형을 잃는 척 아양 가득히 “어맛” 하는 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짱돌은 미동도 없었으나 염소는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마님 어서 제 손을 잡으십쇼.”

그녀는 염소의 손을 차갑게 내리쳤다.

“잠깐 어지러웠네. 이제 괜찮아.”

그녀의 발이 땅에 닿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짱돌은 윗옷을 훌렁 벗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말고삐를 잡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나마 저 나무 밑이 어떻습니까요? 아니 저놈은 배고프면 입을 꾹 닫아 버리는 것이 아주 버르장머리가…….”

염소가 시끄럽게 종알대는 와중에도 마님의 시선은 시종일관 짱돌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밥을 먹던 사람들도 그의 몸에 한 번씩 고개를 돌려 힐끔힐끔 바라보았으니,

나는 헐벗은 짱돌의 몸을 보며 서울에서 몸을 만들기 위해 웨이트를 하고 헬스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수많은 이들을 떠올렸다.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 몸. 아니, 그 이상의 아웃풋을 보여 주는 몸.

그것이 바로 짱돌의 뒤태였다.

조각한 것처럼 섬세한 잔근육들이 빼곡히 등을 채우고 있었으며 가만히 있어도 팔뚝의 핏줄이 잔뜩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섹시하다고 느낄 만한 그런 몸.

나는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은 타고났다.

서울에서 태어났더라면 보디빌더를 했어도 좋았을 것이었다.

곧 염소가 나를 불렀다.

“여기 국밥 다섯 그릇만 내주쇼.”

사람이 셋이고, 저 고고하신 마님은 아마 깨작거리는 체만 할 것이었는데…….

염소나 짱돌이 엄청 먹성이 좋은 듯했다.

식사를 내가자 평상이 아닌 주춧돌 옆 바닥에 짱돌이라는 사내가 철퍼덕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기력이 많이 쇠한 느낌이긴 했다.

그의 어깨선을 따라 땀이 울룩불룩한 근육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염소가 밥을 보더니 입맛을 다셨고 마님은 코 위에 손을 살짝 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에는 두 그릇 두고 저기 저놈에게 나머지 다 주쇼.”

나는 짱돌 앞에 밥을 놓아 주려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힘없던 짱돌의 고개가 번쩍 들리며 나를 바라보는데 순간 너무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양팔로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녀석은 국밥과 함께 중심을 잃은 나를 꽉 붙잡아 구했다.

짱돌은 다름 아닌 내가 키워 냈던 우리 회사의 아이돌.

영원의 멤버 별호였다.

미녀와 야수 뮤지컬에서 야수 역할을 맡았던 우리 든든한 셋째.

백치미는 조금 있었다만 심성은 착하던 녀석이었다.

먹성도 좋고 운동도 그렇게 좋아했던 그가 내 눈앞에 이렇게 나타나 주었다.

“별호야!”

녀석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내 얼굴과 국밥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내 손에서 쟁반을 앗아 가 허겁지겁 국밥에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내가 녀석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자 마님은 내 치맛단을 잡아끌었다.

“용무가 대체 뭐야? 왜 남의 집 머슴 앞을 기웃대?”

“이 사람, 배고프면 까칠해지고 배가 차면 좀 얌전해지지 않아요?”

“시장기가 가시면 온화해지긴 한다만……?”

염소가 옆에서 국밥을 후룩대다 캑캑 기침을 했다. 주문이 밀린 나는 일단 주방 쪽으로 갔다.

“버르장머리를 언젠가 확 고쳐 줘야 합죠. 마님께서 워낙 오냐오냐 해 주시니 저 녀석이 자꾸 기어오르는 겝니다!”

아무리 봐도 별호는, 아니 짱돌은 내가 아는 그 얼굴과 너무나도 닮았다.

혹시 저 아이도 서울에서 죽음을 맞이한 걸까?

분명히 애들이 누명 벗는 걸 내가 보고 죽었는데…….

여러 생각이 들어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 마당에 갑자기 평상에서 소동이 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별호네 평상이었다.

소리를 지르던 염소가 벌게진 얼굴로 평상서 벌떡 일어나 별호의 머리를 발로 냅다 걷어찼다.

“가서 물 좀 떠 오랬더니 말대답을 따박따박 해? 이 자식이, 누가 거둬 준 목숨인데!”

나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지만 내가 닿기도 전에 별호가 다시 한번 자신을 걷어차려는 염소의 발을 고개를 숙여 가뿐히 피해 냈다.

“아이참, 이것까지만 먹고 간대도요.”

마님은 손부채질하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고 염소는 자리에 털썩 앉아 마저 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별호가 가볍게 일어나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저기, 박에 물 한 바가지만 좀 부탁합니다요.”

나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바가지에 담아 건넸다.

별호는 씩 웃으며 한쪽에 자라난 잡초를 한 움큼 뜯어 물 위에 띄웠다.

오우, 그렇게 많이 넣으면 흙도 들어가겠는데.

“저, 마님이라는 여자가 뭐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이런 풀때기 안 얹으면 성화를 내서요.”

순진하게 웃는 것까지도 별호와 똑 닮았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물었다.

“별호야, 너 정말 별호 맞구나? 별호……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응? 네가 여기에 왜 온 거야?”

“별호가 대체 뭔 소리여요?”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짱돌이 정말 본인 이름이에요?”

“뭐…… 지는 팔려 다니는 목숨인디 그걸 알겄어요? 제 이름이 뭔지. 뭐 주인이 또 바뀌면 이름도 또 바뀌겠죠.”

이건 아니다.

내가 주모가 된 건 그렇다 쳐도, 우리 별호가 여기서 염소와 저 놀부 마누라 같은 여자의 머슴을 한다니 이럴 수는 없다!

“저 사람들이랑 계속 같이 다니고 싶어요?”

별호는 멀뚱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뭐 어째요?”

“차라리 여기서 내 일을 도우면서 우리…… 남매처럼 사는 건 어때요?”

별호는 호탕하게 웃었다.

“저치들이 저를 놔주려고 안 할걸요.”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별호가 원체 천성이 순한 것을 악용해 저런 나쁜 놈들이 얼마나 때리고 괴롭힐지 눈에 선했다.

바가지를 든 그의 뒤를 따라 나는 마님과 염소의 앞에 섰다.

안 먹을 것처럼 냄새 어쩌고 하더니 둘이서 국밥을 뚝딱 비워 놓은 것이 꼴사나웠다.

“용건이 있어서요.”

마님에게 말을 건네자 염소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년이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지껄여? 나한테 말해!”

나는 손가락으로 별호를 가리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기 저 남자, 풀어 줘요.”

그러자 뒤에서 마님의 높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이년이 뭘 풀어라 마라야? 쟤는 우리 집 머슴이야. 우리 집 재산이라고! 내가 쟤를 쌀 몇 가마니에 사 왔는지 알아?”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족속, 최혁재와 다를 바 없는 속물들. 어디에나 저런 인간들은 있는 법인가?

나는 그녀를 노려보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내가 그간 모았던 엽전이 꽤 두둑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 엽전 꾸러미들을 몽땅 들고 나와 평상에 던졌다.

돈이야 또 벌면 되지만, 별호를 평생 저렇게 살게 둔다면 두고두고 이생의 한이 될 것 같았다.

“그쪽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 줄 테니까 풀어 줘요. 재산이라며? 이거면 쌀 몇십 가마니는 사겠네.”

눈이 휘둥그레져 돈을 받아 들려는 염소를 밀어내며 마님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밀어 댔다.

“네년이 지금 내가 이곳까지 와 밥을 먹어 주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왜요? 돈 달라면서요? 여기 돈 있잖아요!”

“내 애인…… 아, 아니 내 머슴은 네가 그렇게 갖고 싶어 수작 부릴 게 아니다.”

그럴 줄 알았다.

그 와중에 염소가 별호를 노려보며 입술을 파르르 떠는 꼴을 보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삼각관계인 모양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별호는 바닥에 주저앉아 남은 밥을 마저 푹푹 퍼먹고 있었다.

야. 지금 밥 먹고 있을 때가 아냐! 이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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