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8 화 군자검
“꺼져!”
엽운의 입에서 이 두 글자가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명사일은 몹시 높은 지위를 가졌는데, 엽운은 놀랍게도 그에게 꺼지라고 한 것이다.
잘못 들은 건가?
제자들은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마치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엽운이 뭐라 한 거지?”
제자 한 명이 나지막이 물었다.
옆에 있던 제자 한 명이 입을 틀어막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너 이 자식, 살기 싫으냐? 자칫하면 우리가 원한을 살지도 모르는데 감히 뭘 물어보는 거야.”
제자는 곧바로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저도 모르게 명사일을 쳐다보더니 다른 제자와 함께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명사일의 옆에 있던 제자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어찌 감히 명 사형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이가 있다는 말인가.
정녕 엽운이 명사일에게 기다리라고 한 이유가 그에게 꺼지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명사일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더 이상 담담하지 않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분노를 참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엽운을 노려봤다.
“이제 됐다고? 나에게 그렇게나 멈추라고 하던 이유가 그 두 글자를 말하기 위해서냐?”
엽운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앞으로 두 걸음 나가며 말했다.
“원래는 볼 일이 좀 있었는데, 보아하니 너도 대장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양화룡을 찾아가서 이야기 하겠다. 넌 이제 꺼져도 돼.”
엽운은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 역시 타인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았다.
칠 장로의 첫 제자이자 소호의 기명 제자인 그는 다른 내문 제자들처럼 신중하게 행동하거나 화를 참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선마지심은 육신을 바꿔놓았고, 수위를 올려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감 또한 강화시켰다.
더 이상 얌전히 지내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후로 마음의 고삐가 완전히 풀렸다.
명사일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가 이내 돼지의 간처럼 붉게 물들었고, 이윽고 음산하고 창백한 색으로 변했다.
“봉주 대인의 기명 제자 엽운. 정말 건방지구나. 그런데 봉주 대인은 내일부터 기명 제자가 없게 되겠군.”
눈에서 살기를 번뜩이며 한 발짝 다가왔다.
명사일은 평소 군자를 자처하면서도 몹시 날뛰었고, 변덕이 심하여 말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종문에도 굴하지 않고 타인을 공격했다.
그가 보기에 엽운은 정말 너무도 건방졌다.
천검종의 내문에 자신보다 건방진 제자가 있는데 심지어 신입 제자라니, 게다가 그런 녀석이 자신을 조롱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사일은 손에 쥔 부채를 살짝 흔들었다.
부채에서 순간 빛이 번쩍였고, 곧 장검 한 자루가 손에 나타났다.
“이 검의 이름은 군자검, 상품 영기이며 사람을 죽이거나 피를 묻혀본 일이 없는 검인데, 오늘 그 전례가 깨질 것 같군.”
명사일은 왼손으로 검신을 가볍게 문지르며 웃음을 지었다.
말을 하는 순간 옆에서 있던 제자들은 별안간 고양이를 본 쥐처럼 겁에 질렸다.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피를 머금어 본 적도 없다고? 그게 무슨 검이야.”
엽운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 방금 몇 마디를 빠뜨렸는데, 오늘 사람을 죽이고 피를 묻힌 적이 없다는 말이야. 정말이지 굳은 절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군자의 뜻과 같다고 할 수 있지.”
명사일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이미 분노가 사라지고 다시금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엽운은 어리둥절했다.
눈앞의 명사일이 비록 의젓하고 군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변덕스럽고 속이 좁다는 것을 알아봤다.
하지만 이 정도로 후안무치할 줄은 몰랐다.
천검종의 내문에서 동문의 제자를 상대로 날카로운 검을 쥐고 그 검이 오늘 사람을 죽이고 피를 묻힌 적이 없다며, 굳은 절개를 가진 군자라느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엽운은 그제야 다른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가능한 뒤로 물러난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그래, 그럼 어디 그 군자의 검을, 아니 위군자의 검을 좀 보자고.”
엽운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임무전 안에서 조금 싸우는 것은 상관없겠지만, 큰 싸움을 벌이면 임무전을 하나 둘 씩 망가뜨리게 될 것이다.
그렇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명사일은 엽운이 오는 것을 보고 그의 뜻을 이해했다.
명사일이 아무리 오만하고 건방져도 감히 임무전에서 싸움을 벌일 수는 없기에, 먼저 문을 나서 천천히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엽운, 어딜 가는 거야? 신분패를 꺼내라. 공헌도를 기록해 줄테니.”
두 사람이 격전을 앞둔 순간 관리 제자가 후전에서 나와 이 장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어리둥절해 했다.
엽운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공헌도를 기록하는데 얼마나 걸리죠?”
“이게 네 신분패에 남는 첫 기록이니, 아마 반 주향 정도 걸릴 거다. 이후로는 순식간에 기록할 수 있지.”
엽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신분패를 던졌다.
신분패는 관리 제자에게서 한 척 정도 거리에 떨어지더니 탁자 위에서 멈췄다.
“반 주향이 걸린다는 말씀이십니까? 충분합니다. 이 명사일이라는 녀석을 죽이고 올테니 사형께서는 공헌도를 기록해주십시오.”
엽운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재빨리 움직여 임무전의 밖으로 나갔다.
관리 제자는 넋이 나간 채 앞의 신분패를 쳐다봤다.
곧 다급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려 했지만 엽운의 모습은 이미 임무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엽운의 신분패를 집어들고 공헌도를 기록했다.
엽운은 임무전의 문을 지나자 이미 문 앞 광장에 서 있는 명사일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검을 들고 비스듬히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한 바람이 불어 옷깃을 날리니 준수하고 선앙해 보이는 게 제법 기세가 느껴졌다.
“봉주 대인의 기명 제자라. 비록 지위는 고작 기명 제자일 뿐이지만, 몇 년 동안 봉주 대인께서 제자를 받으셨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넌 그래도 운이 제법 좋은 편이겠구나. 하지만 이제 그 운도 소용없다. 네 운이 나보다 강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넌 오늘 여기에서 수위를 폐기 당할 것이다.”
명사일은 엽운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담담히 말했다.
엽운이 말했다.
“날 죽이지 않을 건가? 그냥 내 수위를 폐기하기만 한다고?”
명사일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하늘에는 생명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품덕이 있다. 사람은 늘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법. 나는 군자검의 주인이자 군자인데 어찌 함부로 사람을 죽이겠느냐. 군자검에게 피 맛을 좀 보여주고, 네 수위를 폐기시켜 작은 벌을 주는 것이면 충분하다.”
엽운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정말 고맙습니다 명 사형. 정말 위군자네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명사일이 말했다.
“오,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으냐? 우리 천검종에는 법규란 것이 있다. 네가 무언가를 잘못하였고, 또 그 잘못을 고칠 줄 모르는 자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굳이 나서서 널 벌할 생각은 없었다.”
엽운이 말했다.
“수위를 폐기하는 건 별로야. 그렇게 되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
명사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형인 내가 어찌 네 수위를 폐기하고 싶겠느냐, 그저 네가 길을 잃고 깨닫지 못하니 작은 벌을 한 번 내릴 뿐이다. 아이고 정말 머리가 아프네. 난처하군.”
엽운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날 죽여라. 그럼 나중에 머리 아플 일도 없고 난처할 일도 없잖아.”
명사일은 어리둥절해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사제의 수위는 나쁘지 않지만, 그래봤자 결국 연기경 2중일 뿐이야. 이 사형과의 차이는 너무도 크니 어찌할 수 없을 게다. 어쩌면 내가 사정을 좀 봐줄 수도 있을텐데.”
엽운은 웃으며 말했다.
“자, 헛소리는 그만하고, 나한테 세 수만 양보하는 거 어때?”
엽운의 말을 들은 명사일은 넋이 나갔다.
그 뿐 아니라 주위에서 지켜보던 제자들도 덩달아 넋이 나갔다.
방금 엽운은 분명 명사일을 몰아세우고 먼저 공격까지 했다.
모두들 그가 봉주 대인의 기명 제자이고 명성이 자자하며 모용무흔과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자인만큼 말 할 필요도 없는 수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명사일에게 세 수만 양보하라고?
소문에 의하면 명사일은 일 년 전에 이미 연기경의 정점에 달했다.
이치대로라면 그가 엽운에게 세 수, 아니 서른 수도 양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엽운이 공격을 하며 보여준 실력과 이전의 소문을 통해 가늠해보자면 명사일이 그에게 세 수를 양보했다간 그의 검에 분명 부상을 입을 것이다.
명사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비록 당당하게 말했지만, 엽운의 수위가 그의 경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 세 수를 양보했다간 순식간에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될 것이며, 자칫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래도 엽운이 종문의 규칙을 어길 것이라 믿지 않았고, 자신을 다치게 할 지언정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엽운이 웃으며 말했다.
“명 사형도 그저 입만 살았나보네. 그럼 이렇게 하자고. 먼저 공격해. 내가 세 수 양보해 줄테니.”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구경하던 제자들은 모두 엽운이 지나치게 오만하다 생각했다.
그의 경계는 다들 알 수 있었다.
비록 진정한 실력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모두들 그가 연기경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명사일도 그에게 세 수를 양보할 수는 없는데, 어찌 그가 명사일에게 세 수를 양보한다는 말인가?
이제 막 여유를 되찾은 명사일의 표정에 다시 변화가 생겼다.
어쩌면 10년 동안 들었던 모든 조롱을 다 합쳐도 오늘만큼 많지는 않을 것이다.
표정이 어두워졌다.
“필요 없다. 덤벼라. 오늘의 싸움을 후회하지 말거라.”
명사일은 손에 쥔 장검을 살며시 흔들었다.
군자검에서 광파가 흘러나왔고,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엽운은 웃었다.
놀릴만큼 놀렸으니, 더 이상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보라색 빛이 번쩍였고, 자영검이 물줄기 같은 빛을 일렁이며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명사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군자검을 휘두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자는 의를 깨닫고, 소인은 이익을 깨달으리!”
군자검에 빛이 번쩍이며 허공에 광파가 응집되었는데, 마치 숨겨진 신검이 악인을 소탕하려는 것 같았다.
엽운은 공격을 하면서 싯구를 내뱉는 사람은 처음 봤다.
하지만 검에 담긴 힘을 느낄 수 있었는데, 조금도 약하지 않았다.
화룡굴에서 돌파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전력을 다해도 이 검을 막아낼 확률은 5할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군자검의 힘은 나쁘지 않았다.
광파가 하늘을 가득 메웠고, 신검이 떨어져 내려왔다.
엽운은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서 있었다.
그저 손에 쥔 자영검이 조금씩 진동하며 보라색 빛을 뿜을 뿐이었다.
명사일은 엽운이 검을 마주하고도 꼼짝도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설마 이 검을 막아낼 자신이 있는 것인가?
그 뿐만 아니라 옆에서 구경을 하던 제자들 역시 의아한 표정이었다.
광파 속에는 신검이 숨어 있었고, 하늘을 메운 광파가 걷히자 거대한 군자검이 하늘에서 떨어져 엽운의 머리를 베어 내리려 하는 것이 보였다.
대검은 조금의 화려함도 없이 순식간에 엽운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