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6 화 명 사형
“너, 이리 와.”
엽운은 싸늘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보다 제자 한 명을 지목하며 나지막이 소리쳤다.
지목을 당한 흰 옷의 제자는 어리둥절했다.
곧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엽운, 뭘 하려는 거야?”
흰 옷을 입은 제자가 강한 척을 하며 소리쳤다.
엽운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네 놈들, 뭐 때문에 그렇게들 도망가는 거야?”
“엽운, 천라응신초를 찾는 9급 임무를 완수했나? 그렇다면 됐고, 완수하지 못했다면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야.”
흰 옷의 제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음, 왜?”
엽운이 호기심에 물었다.
“난 이미 말해줬어. 네가 알아서 생각해.”
흰 옷의 제자는 말을 마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달아났다.
엽운의 마음속에 의혹이 생겼다.
‘이 녀석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귀신 보듯이 보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엽운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지금 수위로 수십 명의 제자들을 상대한다면 조금 난처하긴 하겠지만, 한꺼번에 덤벼도 그의 적수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엽운은 천천히 계단을 지나 임무전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임무가 발표되는 벽을 바라보았다.
신입 제자 임무란에 9급 임무가 있어야 할 곳은 텅 비어 있었으며, 은은한 금색 빛이 빛나고 있었다
임무를 낼 때는 받을 때처럼 알아서 행동하는 것이 아닌 옆쪽의 관리 제자를 통해 등록을 하고 임무 물품을 낸 뒤 책자에 기록을 하고 공헌도를 받는 형식이었다.
“사형, 임무를 내러 왔습니다.”
엽운은 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임무를 내러 오는 제자들은 제법 많았는데, 대부분의 공헌도는 임무를 통해 얻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리 제자는 평소에도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잠시 기다리거라. 이놈들아. 간단한 임무 몇 개를 받아서 공헌도를 조금씩 얻는 것 보단 열심히 수련을 하거나 다른 방법을 알아보는 게 더 좋을 거다.”
관리 제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엽운은 어리둥절했다.
관리 제자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그는 설교까지 해댔다.
“사형, 정말 임무를 내러 왔습니다.”
엽운은 화를 억누르고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다시 말했다.
“무슨 임무? 임무 물품을 꺼내 놓아라. 내가 검토해 볼테니.”
관리 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엽운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엽운은 개의치 않고 천라응신초를 뇌음화룡계에서 꺼내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새파란 빛이 은은하게 빛났고, 어렴풋이 냉기가 느껴졌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던 관리 제자는 별안간 넋이 나갔다.
곧 그는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천라응신초? 9...9급 임무?”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는 듯 했다.
눈앞에 보이는 이 차가운 물건은 임무에 기록된 천라응신초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천라응신초를 가져오는 9급 임무는 신입 내문 제자 임무 구역에만 발표된 임무였다.
그 말은 눈앞에 이 제자가 9급 임무를 완수했다는 뜻이다.
천라응신초를 가져오는 9급 임무는 수백 년 동안 신입 제자가 완수한 일이 없었고, 수십 년 전 딱 두 사람 만이 있었는데, 한 명은 모용무정이고 한 명은 몇 년 전 급부상한 진천운 이었다.
관리 제자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엽운을 바라보고 입가를 두어 번 씰룩이며 당황했다.
수백 년 만에 9급 임무를 완수한 세번째 신입 제자가 나온 것이다.
이 같은 녀석들은 한 명 한 명이 괴물이며 훗날 분명 한계를 가늠할 수도 없는 비범한 존재가 된다.
그러니 한 번의 임무로 그에게 미움을 샀다간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사형, 천라응신초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엽운이 웃으며 물었다.
“문...문제 없다.”
관리 제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다급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봐야겠지. 아마 문제없을 거다.”
“문제가 없다면 다행입니다. 이건 제 신분패 입니다. 제게 공헌도를 주시면 되겠습니다.”
엽운은 신분패를 탁자 위에 놓았다.
관리 제자는 신분패를 한 번 쳐다보았는데, 엽운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곧 눈앞의 소년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봉주 대인의 기명 제자이며 훗날 그의 10대 제자 중 마지막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사람.
“엽 사제 였군. 오늘은 기분이 조금 좋지 않아 말투가 조금 거칠었으니 양해 좀 해주게나.”
엽운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사형은 매일 바쁘시니 기분이 안 좋으신 것도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봉주 대인의 선택을 받아 마땅한 아량이군. 과연 뛰어난 인재야.”
관리 제자는 내친 김에 아첨을 떨었다.
눈앞의 소년은 훗날 10대 제자가 될 가능성이 몹시 높으니 관계를 잘 다져두면 좋을 것이다.
엽운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관리 제자는 천라응신초를 집어들고 뒷쪽으로 넘겼다.
자리에 앉아 있던 임무전 고수의 감별이 끝나면 엽운에게 공헌도를 줄 수 있게 된다.
엽운은 뒷짐을 지고 서서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9급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 일로 세간이 떠들썩해지지는 않을지언정 분명 제자들의 주의를 끌 것이다.
주위에 수십 명의 제자들이 몰래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부러워했고, 어떤 이들은 질투했으며, 어떤 이들은 믿을 수 없는 것 같았고 또 어떤 이들은 한을 품는 등 다양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임무전의 바깥에서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곧 시끌벅적하던 임무전이 조용해지고, 느릿느릿한 발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입구에 서 있던 제자들의 안색이 별안간 크게 변하더니 일제히 옆으로 물러서서 벽에 딱 붙은 채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명 사형께 인사드립니다!”
한 사람이 임무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안에 있던 수십 명의 제자들 중 일곱 여덟 명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일제히 소리쳤다.
스물 몇 살 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보라색 도포를 입고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썹은 칼 같았고 눈은 별 같았으며, 얼굴은 관옥처럼 준수했다.
“다들 일어 나거라!:”
명 사형의 부드럽고 중후한 목소리는 마치 봄바람 같았다.
제자들이 몸을 일으키더니 알아서 명 사형의 뒤로 다가가 사람들 틈에 섞여들었다.
명 사형은 천천히 걸어오며 온화한 눈빛으로 임무전 안의 제자들을 훑어봤다.
그는 웃음을 머금고 모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엽운은 제자들이 일제히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는 것을 보았지만, 억지로 짜낸 웃음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명 사형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기에는 무해한 것 같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 몹시 상냥했다.
하지만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느껴졌고 감히 내색하지도 못했다.
그들의 표정은 몹시 기괴하고 난처해보였다.
“네가 엽운이구나?”
명 사형의 시선이 엽운의 얼굴에 멈췄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엽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니군. 사형께서 말씀하신 게 너 였구나. 그럼 일단 마무리하고 날 따라오너라.”
명 사형은 응 하고 대답하거니 몸을 돌려 가버렸다.
엽운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녀석은 농담을 하러 온 건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는 당연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임무를 완수하고 공헌도를 받지도 못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명사형인지 뭔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녀석인지도 모르는데, 따라오라는 한 마디에 그를 따라간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응? 명 사형의 말씀을 듣지 못한 거냐. 당장 따라가지 않고 뭘 하는 거야.”
제자 한 명이 엽운을 바라보더니 별안간 화를 냈다.
엽운은 자신을 존중해주는 만큼만 상대를 존중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공평하기 때문이다.
좀 전에 명 사형이라는 사람의 말투는 그래도 온화한 편이었기에 엽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 이 제자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으며 마치 엽운을 자신의 제자처럼, 아니 자신의 개처럼 대했는데, 엽운의 눈에 이는 몹시 지나친 행동이었다.
“넌 어디서 온 머저리냐? 꺼져라!”
선마지심을 얻고 난 후, 그리고 대묘에서의 일을 겪고 난 후 엽운의 성격은 이미 조금씩 변하고 있었고, 소심하고 신중했던 그는 타인의 괴롭힘을 참지 못하게 되었다.
“뭐라고? 감히 나에게 그 따위로 말하다니.”
제자는 어리둥절해하며 벌컥 화를 냈다.
엽운은 그를 쳐다보는 것조차 귀찮았다.
몸을 돌려 관리 제자가 돌아올 때 까지 기다렸다.
제자는 엽운이 자신을 상대하기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더니 잔뜩 화가 나 한 걸음 다가왔다.
그는 임무전 내에서 싸움을 하면 안 된다는 규정에도 굴하지 않고 엽운의 뒷통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엽운은 이 녀석이 감히 공격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뒷통수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듣고 조금 화가 나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휘둘렀다.
진기가 손에 응집되며 제자의 오른손과 부딪히는 것이 보였고, 이어서 제자가 나가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불꽃놀이처럼 흩날렸고, 허공을 붉게 물들였다.
“펑!”
제자는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입과 코는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앞자락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두 번이나 몸을 일으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명 사형은 그의 옆에서 두 척 쯤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조금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명 사형. 저 애송이, 너무 건방진 것 같습니다.”
제자는 발버둥을 치며 말했다.
그의 눈에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명 사형은 웃음을 머금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확실히 건방지긴 하지. 하지만 실력이 있는 사람은 날뛸 수 있는 법. 그런데 너는 정말 쓸모가 없구나. 그럼 이렇게 하자. 이제부터 날 따라오지 말고 아무 데나 가서 수위를 폐기한 뒤 알아서 하산하거라.”
제자는 넋이 나갔다.
곧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명 사형,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당신의 개가 될지언정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명 사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넌 방금 전 내 체면을 떨어뜨렸다. 네 수위가 중요하다면, 내 체면도 중요하겠지?”
“그...그것은...당연히 명 사형의 수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잖아.”
명 사형은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손에서 진기가 뿜어져 나와 제자의 몸에 닿았다.
순간 제자는 온몸을 떨었고, 두 눈에서 공포가 조금씩 사라지더니 이윽고 절망으로 변했다.
수위가 모두 폐기된 것이다!
엽운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 모습을 지켜봤다.
온화해 보이는 명 사형이 이토록 잔인한 짓을 할 줄은 상상 하지 못했다.
어쩐지 좀 전에 그가 들어올 때 제자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벌벌 떨고 있었다.
“엽운, 기회를 한 번 더 주마. 어서 날 따라 오거라. 사형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명 사형은 몸을 반 쯤 돌려 엽운을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아, 말해주는 걸 깜빡했네. 내 이름은 명사일 이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