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5 화 스승을 모시다
하늘 위의 새하얀 군도는 푸른빛에 맞아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시 장로와 나머지 사람들은 일제히 넋이 나갔다.
도 장로는 천검종 최강의 태상장로 세 명 중 한 사람으로, 천검종주와 시 장로 같은 지위를 가진 이들도 사숙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도 장로의 법인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천검종주로써도 체면이 서는 일이었으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법인이 푸른빛에 꿰뚫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누구냐? 누가 이렇게 배짱이 두둑한 거냐?”
시 장로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는 듯 했다.
천검종에서 도 장로의 법인을 부술만 한 인물이 있단 말인가?
“흥, 내가 묻고 싶군. 누가 도쟁영에게 종문의 일에 간섭할 배짱을 심어주었단 말이냐?”
한 사람의 모습이 먼 곳에서 날아왔는데,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약냄새가 섞인 술 냄새가 풍겨왔다.
그림자가 번쩍이며 날아왔고, 낡은 옷을 입은 칠 장로가 엽운의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늘 싸늘한 시선으로 시 장로를 훑어보더니 왼손에 쥔 술병을 들어 올려 벌컥벌컥 들이켰다.
“칠 장로님, 당신이었군요.”
엽운은 어리둥절해하며 크게 기뻐했다.
“칠 사형, 어찌 오셨습니까?”
소호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에게 다가갔다.
자리에 나타난 이가 칠 장로임을 본 자 장로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펄쩍 뛰어올라 그의 옆에 떨어졌다.
“칠 사제, 자네도 엽운을 눈여겨보고 있었군.”
시 장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그의 표정에서 느껴지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성악, 빨리 안 꺼지냐?”
칠 장로는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아내며 조롱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 장로가 입가를 몇 번 씰룩이더니 말했다.
“칠 장로 당신, 좀 지나친 것 같군. 영전이나 잘 지킬 것이지, 천신봉 까지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다니.”
“네가 뭔데? 도쟁영의 개 주제에 말이야. 당장 꺼지지 않으면 흠씬 두들겨 패 하루 종일 땅바닥에서 네 부러진 이를 찾게 만들어주마.”
칠 장로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힐끗 보더니 또 한바탕 술을 들이켰다.
시 장로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천검종주를 보조하는 장로 중 한 사람으로, 평소 그에게 감히 저런 말을 하는 이는 없었다.
종주 역시 그와 이야기 할때는 예를 갖추고 상의할 정도였다.
하지만 칠 장로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칠 장로 성깔은 괴팍하기로 소문이 났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그의 수위는 시 장로보다도 한 등급 위였다.
칠 장로 역시 축기경 7중에 도달한 종문에서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금단경을 돌파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존재였다.
만약 칠 장로와 맞선다면 시 장로가 열 명이 있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칠 장로, 후회하게 될 거요.”
시 장로는 모질게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
반대편에서는 구양문천이 어이없다는 듯 입가를 두어번 씰룩거리며 다가왔다.
“칠 사형, 오랜만입니다.”
칠 장로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구양문천은 체면이 구겨짐을 자각하고 몸을 돌려서 가버렸다.
모용무청은 옆에서 냉랭한 눈빛으로 칠 장로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칠 사형,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천검종주는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시 장로와 모용무정이 떠난 뒤에야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칠 사형, 한 동안 뵙지 못했군요. 그렇다고 영전에 찾아가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은 엽운을 위해 오신 겁니까?”
남월봉주 정여수가 웃음을 머금고 다가와 허리를 씰룩였다.
“떨어진 재료가 몇 개 있으니, 네가 좀 보내 주거라.”
칠 장로가 정여수를 보고 손을 흔들자 종이 한 장이 펄럭이는 소리를 내며 정여수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정여수는 단박에 그것을 잡아들더니 읽어보지도 않고 웃으며 말했다.
“칠 사형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이던, 저희 남월봉에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보내드리겠습니다.”
칠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최근 월화결의 수행에서 난관에 봉착했나?”
정여수는 즉시 웃음을 지으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번 운행하고 세 번 뒤집어 보거라. 그렇게 한 달을 수련하면 해결 될 게다.”
칠 장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칠 사형.”
정여수는 크게 기뻐하며 사뿐히 인사했다.
적성봉주 우광원은 멀리서 퉁명스럽게 인사를 건내곤 한 쪽으로 물러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 사제, 성격이 참으로 싸늘하구만. 운성결을 수련하여 그런 것이겠지만, 그건 수선의 정도가 아니라네. 앞으로 조금만 유순해지면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올거야.”
칠 장로는 그를 훑어보며 담담히 말했다.
“칠 사형도 참 재미없으십니다. 그 말은 3년 전에도 하셨으니 또 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광원은 차가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심지어는 칠 장로와 말 한 마디조차 섞기 싫은 것처럼 보였다.
칠 장로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천검종주를 바라보더니 손에 쥔 술단지를 들어올렸다.
“안녕하시오 종주 대인.”
“칠 사제와 나는 동문의 사형제이니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우리는 여전히 사형제이니 말이야.”
천검종주는 빙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칠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호를 바라봤다.
“소 사제, 이 녀석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네 성격으론 말이야, 엽운이 네 제자가 된다면 훗날 그 성취가 극히 제한 될 걸세.”
“그건...”
소호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칠 장로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물론, 이 애송이는 번개의 영기를 가지고 있으니 네 십살진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럼 이렇게 하자고, 이 녀석은 나와 함께 가지만, 자네의 십살진을 가르쳐도 된다네. 그리고 때가 되면 그걸로 자네를 몇 번 도와주는 걸로 하지.”
“예?”
엽운을 제외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 듣기라도 한 듯 일제히 칠 장로를 바라봤다.
“칠 사형. 방금 그 말은 엽운을 제자로 들이겠다는 말씀입니까?”
소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기론 칠 사제 자네는 지금껏 제자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천검종주 역시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칠 장로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당신들 모두 제자를 한 무더기씩 거두었는데, 나는 하나도 없으니 이제 한 명 들이면 안 되려나?”
“저 엽운이라는 아이는 정말 행운아군요. 도대체 무슨 덕이 있길래 칠 사형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건지, 정말 부러워 죽겠습니다.”
정여수는 입을 가리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확실히 운이 좋은 녀석이군.”
우광원은 경악한 눈빛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엽운, 당장 무릎을 꿇어 스승님을 모시지 않고 무얼 하느냐.”
소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엽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엽운도 어안이 벙벙했다.
소호가 그를 제자로 거두려 했고, 시 장로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을 당했으며, 심지어 하마터면 모든 비밀을 발각당할 뻔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 놀랍게도 칠 장로가 자신을 제자로 거두려 한 것이다.
엽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곧바로 무릎을 꿇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제자 엽운, 은사님께 인사드립니다.”
칠 장로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어 나거라. 우리 쪽에는 그런 허례허식 따위 없으니 말이다. 원한다면 날 영감이라고 불러도 좋고, 사부라고 불러도 된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사부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엽운은 몸을 일으켰다.
사부라는 호칭은 몹시 자연스러웠는데, 이미 영전에서 칠 장로에게 빙봉천리라는 검을 전수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에는 사제지간의 명분은 없었지만, 가르침을 받은 은혜가 있었다.
지금 그가 무릎을 꿇고 칠 장로를 스승으로 모시는 것은 지극히 진심이었다.
“훌륭한 제자를 들인 걸 축하하네, 사제.”
천검종주는 연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맞다, 칠 사형이 제자를 들이신 건 정말 큰 사건인데, 종문에 소문을 내 널리 알릴까 싶네요.”
정여수가 살짝 웃음을 지으며 걸어왔다.
“칠 사형은 원래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지 분명 소문을 내는 건 원치 않으실 걸세.”
소호는 고개를 저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엽운을 제자로 삼지 못해 아무래도 마음이 언짢았지만, 천도에 대한 칠 장로의 깨달음은 그를 아득히 뛰어넘으며 심지어 종주보다도 반수 위였다.
엽운이 그를 따라간다면 훗날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칠 장로는 엽운을 십살진의 수련에 참여시키겠다 했고, 소호는 십살진을 완성시킬 수만 있다면 엽운을 제자로 들이지 못하여도 크게 상관없었다.
“맞다. 내가 엽운을 제자로 삼았다는 건 당신들만 알면 되니 바깥에 알리지 말게. 훗날 엽운이 종문에서 왕래할 때도 그냥 무영봉의 내문 제자 신분인 걸로 하고, 굳이 내 제자라고 말 할 필요 없네.”
칠 장로는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려 엽운을 바라보더니 이어서 말했다.
“엽운, 내가 가장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신분이다. 훗날 너도 내 제자임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일이 생겨도 스스로 해결하고 날 찾아오지도 말거라. 만약 수련을 하다 의문이 생기면 언제든 영전에 와도 좋지만, 다른 일로는 날 귀찮게 하지 말거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엽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칠 장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영감이다.
엽운 역시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었고, 선마지심의 비밀은 칠 장로에게 조차 알리고 싶지 않으니, 스스로 수련을 하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때 가르침을 구하는 방식은 그의 생각과도 몹시 잘 들어맞았다.
“자, 그럼 다들 흩어지자고. 엽운 너는 날 따라 영전으로 간다. 너에게 3일 동안 전수를 해주겠다.”
칠 장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군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칠 장로는 단박에 엽운을 잡아 끌고 빠르게 천신봉을 떠나버렸다.
무영봉 방향으로 은은한 잔상이 남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검종주와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은 칠 장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엽운이 칠 사형의 제자가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네요. 나중에 여 제자를 하나 잘 키워서 그와 교류를 시킬까 봐요.”
정여수가 봉황같은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여수 사매, 함부로 행동하지 마시게. 칠 사제는 괴팍한 사람이니 반감을 사서 좋을 건 없으니 말이야.”
천검종주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엽운을 칠 사형에게 빼앗긴 일은 도 사형의 눈을 피해가긴 힘들 것 같군요. 종주 대인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소호는 다소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천검종주는 그를 보더니 말했다.
“칠 사제가 도 사숙을 두려워할 것 같은가?”
“그건 아니지요. 만약 칠 사형이 두려움이란 걸 알았다면 그때 그 일을 벌이고 수위를 20년 동안 봉인 당하지는 않았겠죠. 그것만 아니었다면 천검종은 벌써 진나라를 벗어나 대진제국의 눈에 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20년이란 시간은 곧 지나갈거고, 20년 전의 그 약속은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네.”
천검종주는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맞습니다!”
별안간 소호와 나머지 사람들이 일제히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