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선공-192화 (192/227)

제 192 화 핍박

“물러가지 않으면 어쩌실 셈입니까?”

소호는 무영봉주가 된지 10년이 되었기에 당연히 천하를 아우를 수 있는 기개를 가지고 있었고, 천신봉의 내문 장로인 운 장로를 마주하고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소호,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그 무영봉주 자리도 오래 가지 못 할거다.”

운 장로는 되려 조금의 분노도 내비치지 않으며 빙긋 웃었다.

“그건 당신이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당신은 관여할 자격조차 없고요. 조용히 남은 나날을 보내십시오. 남에게 이용당하지나 말고.”

소호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리며 뒷짐을 졌다.

운 장로는 어리둥절해하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소호의 말은 분명 그의 상처를 찌른 것 같았다.

“내 말은 여기까지이니, 소호 네가 알아서 하거라.”

소호는 냉소하며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소 사형, 몇 달 만에 보는 겁니까. 안색이 영 좋지 않은데요.”

구양문천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봉주로써의 일이 너무도 많고 복잡하니, 안색이 안 좋을 만도 하지. 듣자하니 요 며칠 동안 문천 네 얼굴도 좋지 않은 듯 하던데, 10대 제자 중 하나가 죽었다고?”

소호는 웃음으로 그를 맞이하였다.

평소 구양문천과 친분이 두터웠지만, 최근 들어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선의 길은 참으로 참혹하니,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요. 한 사람이 죽었다면 한 사람을 채워 넣으면 그만입니다. 제가 보니 엽운은 수위도 재능도 제법인 것 같은데, 소 사형이 저에게 넘겨주시면 되겠네요.”

구양문천은 여전히 웃음을 띈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 지나치구나 문천. 엽운은 내가 수 년 동안 찾아 헤메던 사람이다. 마침 10대 제자의 수도 딱 채웠는데, 어찌 너에게 양보하겠나.”

소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좀 아쉽군요. 기왕이면 본좌도 누군가가 아끼는 것을 빼앗고 싶지는 않으니, 소 사형도 조심하십시오.”

구양문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가버렸다.

소호가 눈을 번쩍였다.

그는 구양문천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같은 말을 했다는 것은 이미 몹시 무례한 일이었으며 심지어 어렴풋이 선을 긋겠다는 의미였다.

구양문천과 서로 호형호제 하며 곧잘 어울렸는데, 소호보다 두 달 늦게 태어났기에 그래도 제법 소호에 대한 존경을 보이곤 했었다,.

하지만 조금 전 구영문천은 그를 형님이라 부르지 않고 소 사형이라 불렀고, 자신을 본좌라 칭했다.

이는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돌려 적성봉주 우광원과 남월봉주 정여수를 바라봤다.

“우 사제, 설마 엽운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

냉엄한 표정의 우광원은 칼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소호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저는 그저 천검전령을 받고 천신봉에 왔을 뿐입니다. 엽운이니 뭐니 하는 녀석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소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정여수를 바라봤다.

“소 형, 왜 저를 보십니까? 저도 우 사제와 마찬가지로 천검전령을 받았고,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다급히 왔습니다. 보아하니 소 형께서 말씀하신 엽운이 천검종에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인가 봅니다. 구양문천 마저 눈독을 들이고 말입니다.”

봉황 같은 눈을 가진 정여수는 웃음을 머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인지는 모르겠다만, 흥미로운 녀석이지. 아주 마음에 들어.”

소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제자를 거두어들일 때에는 본디 인품과 느낌을 봐야 하고 천분은 둘째이지요. 세상에는 적지 않은 천재들이 있었지만, 그 중 성장할 수 있었던 이는 몹시 적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장하지 못한 천재를 어디 천재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정여수는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어보였다.

“정 사매가 확실히 사리가 밝군. 분명 그렇지.”

소호는 개탄스러웠다.

몇 년 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 중 성장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종주 어르신은 아직 안 오셨군요. 제가 보니 이번 일은 저 쪽 녀석들이 일으킨 것 같습니다.”

정여수는 봉황같은 눈을 살짝 깜빡였다.

소호는 당연히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엽운에 관한 일은 정여수와 우광원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구양문천의 성격과 방식으론 절대 제자 한 명을 위해 나설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딱 한 사람이 남는데, 천검종 천백 년 역사 속 최고로 걸출한 천재라 불리우며, 그들이 말하던 성장을 이룩한 천재, 모용무정 뿐이었다!

소호의 시선이 모용무정을 향했다.

수려한 용모의 청년은 새하얀 얼굴을 가졌고, 눈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없어보였다.

“무정 사제, 또 보는군.”

소호는 먼저 인사를 건냈다.

모용무정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차가웠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엽운과 무흔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엽운이 내뱉은 헛소리도 다 알고 있죠. 하지만 이번 일은 저와 무관하니, 이런 작은 일 때문에 수행에 영향을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소호는 어리둥절했다.

이 모든 것이 모용무정이 벌인 일이라 생각했는데, 모용무정이 단박에 부인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모용무정은 15살에 잠재력이 발굴 된 이후 줄곧 부지런히 수행만 해왔고 다른 일은 듣지도 묻지도 않았으며, 이름에 무정이라는 두 글자를 달은 만큼, 함부로 큰 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다.

말 그대로 무정했고, 모든 감정을 내던져 버린 채 전력으로 수행만 해왔다.

그렇기에 열다섯살에 수행을 시작한 그는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축기경에 도달하였고, 그 길로 수위가 끝도 없이 성장해 한 해에 한 단계씩 수위를 올린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그의 수위는 이미 대겁을 넘어 천인경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종주께서 우리에게 인편을 보내 천신봉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오?”

소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만약 엽운 때문이 아니었다면, 소호에게 제자 영입식을 중단하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게다가 천검전령에는 영입식을 중단한 뒤 엽운을 데리고 천신봉으로 오라고 적혀있었는데, 그렇다면 이 일은 분명 엽운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소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돌려 구양문천을 바라봤다.

구양문천이 방금 보인 태도와 말투는 예전과 많이 달랐는데,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기에 그렇게 변한 것이 분명했다.

보아하니 이번에 천신봉에 모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것 같았다.

소호의 성격상, 구양문천이 그렇게 말했다 해도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엽운을 몹시 중요시 했고, 10대 제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될 수도 있었다.

엽운이 제자가 되어 번개의 영기를 이용해 십살진을 수련할 수 있다면 소호의 위상은 더욱 올라갈 것이며, 종주의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여 성공할 확률이 몹시 높아질 것이다.

소호가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꺼내려는 순간, 정원 한 가운데의 산봉우리에서 은은한 빛이 번쩍였다.

곧이어 공간 전체가 물결처럼 일렁였고, 그 물결 속에서 회색 옷을 입고 상투를 튼 노인이 천천히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허공에서 걸어 내려왔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는 듯 했다.

“종주 어르신을 뵈옵니다.”

소호와 나머지 사람들이 몸을 굽혀 인사를 올리며 일제히 말했다.

“모두 일어나거라. 이번에는 태상장로 두 분도 오셨다.”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손을 내젓자 순간 부드럽고 힘찬 기운이 모두를 떠받쳤다.

말이 끝나자 물결 속에서 다시 두 명의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두 사람은 백발이지만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금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태양에 비쳐 은은한 금색 빛을 발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엽운은 하마터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종주 대인이 말한 태상장로는 놀랍게도 장무각의 자 장로였다.

그는 여전히 금색 실을 수놓은 흑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예전에 엽운이 봤던 모습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엽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 장로는 천촉봉의 장로가 아니던가?

게다가 고작 장무각을 지키는 장로에 불과하고, 소문에 의하면 수위는 높아봤자 이제 축기경에 도달한 수준이라 했다.

그리고 예전에 만났을 때도 범접할 수 없는 광대한 기운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뿐 아니라 소흡성결이 9품 선기 속에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였는데, 그는 일족이 이미 몰락하여 일찍이 천검종에서 지위를 잃었다고 말했었다.

엽운은 자 장로가 천검종 태상장로 중 한 사람으로써 종주의 뒤에 서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는 엽운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순간 자신의 머리가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엽운, 또 보는구나.”

자 장로는 한 걸음 다가와 천검종의 종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엽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종주 대인, 처음 뵙겠습니다. 두 태상장로님들은 이미 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네가 바로 엽운이구나?”

회색 도포를 입은 천검종주는 엽운을 바라봤다.

“그렇습니다.”

엽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에서 경외는 느껴지지 않았다.

“연기경 1중에, 진기도 웅장하고 그 품질도 몹시 좋구나. 연기경 7중의 제자와 맞서도 충분하겠군. 게다가 번개의 영기를 수련했으니, 과연 우리 천검종에서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가 맞구나.”

천검종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이십니다 종주 어르신. 이 제자는 그저 운이 좋아 대묘에서 번개 영기의 선택을 받았을 뿐입니다.”

엽운은 조금 겸손을 떨며 대답했다.

“수선의 길에서는 너무 겸손할 필요 없다. 네 것은 네 것이며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천검종주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엽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종주의 말은 분명 맞는 말이었다.

이를 보고 있던 소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종주 대인, 어쩐 일로 저희를 부르셨는지요?”

소호는 마음속으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천검종주는 천천히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네가 엽운을 제자로 거두어들이는 일은 본좌가 간섭할 바가 아니지. 하지만 시 장로가 말하길 엽운은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연기경 3중의 수위에서 연기경 1중까지 단숨에 돌파했고, 그 뿐 아니라 연기경 1중의 수위로 연기경 7중에 제자에게 맞설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고 하더군. 이는 분명 미심쩍은 일이니, 그는 우리 천검종의 정예 제자가 되어 자세한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야.”

소호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금색 도포를 입은 노인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소 봉주는 별 다른 이의가 없겠지요.”

금색 도포를 입은 시 장로는 한 걸음 다가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호가 입꼬리를 씰룩이다 말했다.

“이의 없습니다!”

엽운은 조금 놀랐지만, 사실 이 일은 진작 몇 번이나 생각해본 일이었다.

그의 수위는 너무도 빨리 성장한데다 번개의 영기와 불의 영기, 그리고 얼음의 영기까지 가지고 있는데, 나머지 두 영기는 아직 종주와 시 장로에게 발견되지도 않았다.

그들이 검사를 한다면 분명 모든 것이 폭로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어떤 결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순간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위기감이 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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