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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선공-188화 (188/227)

제 188 화 때움

엽운은 숙소에 대해 딱 한 가지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었는데, 청정한 외곽 지역을 원했다.

수많은 비밀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다.

단진풍과 여명홍 역시 엽운에게서 비교적 가까운 곳을 골랐다.

세 사람은 사이가 좋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사는 것은 당연했다.

거처는 딱히 특별한 점은 없었지만, 천촉봉의 집에 비하면 조금 더 크고 방어 금제가 좀 더 철저하며 영기 역시 충만했다.

이를 제외하곤 별다른 점은 없었다.

침상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엽운은 오늘 입운전에서 보았던 장면을 자세히 떠올려봤다.

흑백 장로들의 수위는 꿰뚫어 볼 수 없었는데, 심지어 흰 옷을 입은 제자의 수위마저 란 장로 등을 한참 뛰어넘었으니 그 실력은 적어도 축기경에는 도달했을 것이다.

무영봉에는 연기경의 정점에 달한 제자들이 즐비 할테니 축기경을 돌파해야만 한 자리를 꿰찰 수 있을 것이다.

엽운의 마음속에서 또 다시 연심시마단이 떠올랐다.

그 단약은 몹시 신비로웠는데, 금제를 단약에 봉인해 복용자에게 보여주고 심마를 불러내 통제할 수 있었다.

엽운은 비록 단도에 대해 그리 잘 알지는 못했지만, 이런 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천재 중에서도 천재일 것이며 무영봉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위에 있을 것이라 믿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따금씩 흑백 장로를 훑어봤는데, 이 두 장로의 수위가 얼마나 깊은지는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다.

두 사람에게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악한 기운을 느꼈는데, 이는 무영봉주 소호의 휘하에 있는 호법장로가 가지고 있을 만한 기질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훗날 두 장로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는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내일이면 스승을 만나 입문하게 되겠군. 누구에게 발탁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소호 대인의 제안을 거절한 게 조금 아쉽군. 하지만 나는 비밀이 너무 많기도 하고 소호 대인을 잘 알지도 못하니까, 섣불리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야.”

엽운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생각이 소용돌이처럼 몰려왔다.

또 다시 무영봉에 오게 되었는데, 소령 녀석은 지금 쯤 뭘 하고 있을까.

소령은 성미가 급한데, 요 며칠 동안 엽운을 찾으러 천촉봉에 오지 않은 것은 엽운의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이제 무영봉에 오게 되었으니 분명 머지않아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허술함과 교활함이 공존하는 소령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에 참을 수 없이 미소가 번졌다.

날이 살짝 밝자 엽운은 침상에서 펄쩍 뛰어 내려왔다.

그가 수련한 쉬선심법은 다른 공법과 사뭇 달랐다.

쉬선심법은 한 번 수련에 성공하기만 하면 어떤 상태에서든 공법이 스스로 실행되 굳이 수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몸 속 진기는 이미 극한에 달했고, 경계를 돌파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수련을 해봤자 전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진기는 더 압축되지도, 늘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체내의 진기가 파도처럼 솟구치자 엽운은 참지 못하고 길게 울부짖었다.

곧 손에서 보라색 빛이 번쩍이더니 빛 속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에 자영검을 쥐고 가볍게 허공을 가르자 천지에 번개가 번쩍였고 커다란 천둥소리가 울렸다.

뇌운전광검 제 1식, 뇌운초현!

“누구냐. 감히 이렇게 큰 기척을 내다니, 대담하구나.”

별안간 싸늘한 목소리 하나가 정원 바깥에서 들려왔는데, 놀랍게도 방음 금제를 뚫고 안 까지 전해져 왔다.

엽운은 어리둥절하여 검을 거두며 뜰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열 장 너머 떨어진 곳에 흰 옷을 입은 소년이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 감히 천둥소리를 내다니, 시끄러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젠장 할.”

소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의 시선이 엽운의 얼굴을 훑었다.

엽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너는 누군데? 금제를 뚫고 집 안까지 소리가 들리게 하다니, 뭔가 특별한 공법이나 신통을 쓰는 모양이군.”

“보기보다 식견이 있는 녀석인 모양이군. 그런 검을 쓸 수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나와 비교하자면 아직 한참 멀었다. 아예 다른 수준이라고.”

흰 옷의 소년은 뒷짐을 지고 몹시 도도한 모습이었다.

“그래? 그건 또 의외네. 그런데 하늘 아래 입을 놀리는 녀석은 많지만 사실은 뭐, 더 이야기 하지 않을게.”

엽운은 연신 냉소했다.

소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화를 내며 대답했다.

“감히 나를 무시한다고? 보아하니 무영봉의 애송이들은 내 이름을 모르는 모양이군. 오늘 너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지. 내 이름을 알려줄테니 잘 들어라. 내 이름은 단야, 야심의 야 자를 쓰지.”

“단야?”

엽운은 어리둥절했다.

이렇게나 도도하게 굴던 사람의 이름이 단야라니, 보아하니 마음속에 야심이 가득한 것 같으니, 왠지 잘 어울려보였다.

“그렇다. 이제 내 이름을 알았으니 앞으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된다. 무영봉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내 이름을 대면 아무도 널 헤치지 못할 것이다.”

단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엽운은 경악했다.

이 녀석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수위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저 따위 소리를 지껄이다니, 심지어 그 모용무흔조차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느니 하는 소리를 떠벌리지는 않았다.

엽운은 입을 꾹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어이, 내가 가도 좋다고 했나? 네 녀석은 예의도 없나? 가라는 말도 안했는데 감히 떠나려 하다니, 무영봉에서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내가 무영봉주와 어떤 사이인지 알기나 하느냐?”

단야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엽운은 몸을 돌리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단 사형이 무영봉주님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영봉주께서는 나를 관문 제자로 들이려 하셨지만 내가 이를 거절했지. 그 분께서 나를 친히 찾아오신 정성을 봐서 한 번 생각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네가 눈치껏 행동한다면 내가 무영봉주의 제자가 되고 나서 널 추천해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단야가 으쓱대며 말했다.

“피식!”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건 몰라도 단야가 무영봉주가 자신을 제자로 거두려 했다는 말은 정말이지 너무도 재미있었다.

단야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영봉주 소호가 자신의 10대 제자 중 마지막 제자를 찾는 일에 너무 조급했던 모양이다.

이런 어중이떠중이를 제자로 거두려 하다니 말이다.

만약 단야가 허풍을 떠는 것이라면, 어디선가 엽운이 무영봉주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문을 듣고 헛소리를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무영봉주가 마지막 10대 제자로 거두어들이려 했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단 사형의 호의만 받겠습니다. 멀리 안 나갑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엽운은 손사레를 치며 몸을 돌려 마당으로 걸어갔다.

“너 이 자식 건방지구나. 감히 내게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이름을 대라. 훗날 내가 자칫하여 너를 죽여 버리더라도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냐.”

단야는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엽운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엽운입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마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닫아버렸다.

단야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가득하던 분노가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고, 곧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녀석이 무흔 사형이 얘기하던 엽운이라고? 저 놈은 자신의 제자가 되라는 무영봉주의 제안을 거절한 녀석인데, 놈 앞에서 체면이 구겨졌잖아.”

단야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콧방귀를 뀌더니 떠났다.

시간은 멈출 줄을 모르고 어김없이 정오가 되었다.

입운전 안에는 엽운을 포함한 71명의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양 쪽으로 서 있었다.

입운전의 높은 곳에는 8명이 앉아 있었는데, 두 명의 여자와 여섯 명의 남자였다.

“락 사형, 이번에도 저번처럼 각자 제자 몇 명을 고르는 걸로 때우면 되겠군요.”

왼쪽에 있던 보라색 옷의 중년 남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문도 참 너무하지. 매번 신입 내문 제자가 들어올 때 마다 우리한테 뽑아가라 하다니, 누가 빈손으로 저들을 가르친다는 건지 참 골치 아프단 말이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윗선에서 매년 우리 제자들 중에서 걸출한 제자들을 뽑아가는데, 계속 인원을 보충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아래에서 일을 볼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것 아닙니까.”

서른 몇 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의 목소리는 몹시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월 사제의 말씀이 맞습니다. 분명 그렇지요.”

“이렇게 된 이상 흑백 장로님들과 봉주 대인이 오실 때 까지 기다렸다가 선택을 시작하지요. 우선 지금은 다들 먼저 뽑을 만 한 사람을 가립시다.”

“어차피 지나갈 일이니, 한 번 때우지 뭐.”

여덟 명은 고지에 서서 각자 의견을 이야기했다.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조금의 숨김도 없었다.

엽운 일행은 이를 듣고 저도 모르게 표정이 싸늘해졌다.

무영봉의 고위층 눈에 자신들은 그저 때우는 존재일 뿐이며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원래 제자들은 자신이 명사의 가르침을 받고 수위가 크게 성장하여 천검종의 기둥이 될 줄만 알았는데, 저 말을 듣고 그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엽운, 듣자하니 좀 너무하는 것 같다.”

단진풍이 옆에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엽운은 조금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 우리가 특별한 실력이나 잠재력을 보여주기 전 까지는 눈에 들기 쉽지 않을거야.”

“그 말도 맞지. 저들이 때운다라고 말 했으니 우리도 그저 때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수선의 길에서 남에게 기대는 것은 자신에게 기대는 것만 못하고, 결국 운명은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니까.”

단진풍은 빙긋 웃었다.

사실 그 역시 그저 한 마디 했을 뿐, 전혀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71명 중 엽운과 단진풍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은 연심시마단의 약효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었기에, 마음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또 그것이 언제 폭발할지 아무도 몰랐다.

“네가 볼 땐 여덟 명 중에 누가 가장 수위가 높은 것 같아?”

단진풍이 위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저들 모두 축기경 중기 이상의 고수인데, 우리가 어찌 꿰뚫어 보겠어.”

엽운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진풍은 신비롭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와 전음으로 말했다.

“난 볼 수 있어.”

엽운은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단진풍이 웃으며 말했다.

“수위가 가장 높은 건 가장 오른쪽에 앉은 중년 남자야. 축기경 5중 인겁경이지.”

엽운은 놀라며 물었다.

“넌 어떻게 볼 수 있는 거야?”

단진풍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어가려 했다.

순간 3개의 빛이 하늘을 가르더니 순식간에 떨어져 내려왔다.

흑백 두 장로의 앞에 위풍당당한 모습의 중년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무영봉주 소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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