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7 화 연화
금갑신병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젊은 남녀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갔다.
머릿속의 위용 넘치는 모습이 금색 빛 아래에서 빠르게 녹아내려 잠깐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금빛만이 남았다.
사라지고 없지만 완벽히 소멸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맑은 물줄기로 변해 그의 몸 곳곳에 불시에 나타나는 것 같았다.
미간 사이에서 흑백의 빛이 다시 번쩍였고,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라도 된 듯 맑은 물줄기를 움켜쥐더니 조금씩 끌어당겨 선마지심 속으로 흡수했다.
그제서야 체내의 맑은 물줄기가 완벽히 사라졌음을 느꼈고, 모든 것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두 눈을 떴다.
갑자기 선마지심 속에서 지금껏 본 적 없던 기운이 솟구쳐 나와 머릿속으로 곧장 들어가더니 영혼의 깊은 곳에 스며들었다.
엽운은 더 할 나위 없는 상쾌함이 온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 기운은 진기를 더욱 강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감각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고 눈과 귀를 밝혔다.
“아마 영혼을 강화시키는 기운인 것 같군. 내 수위가 축기경에 도달한 뒤 다시 흡수한다면 엄청난 이득을 보겠지.”
엽운은 이 기운의 능력을 알아차리고 저도 모르게 감격했다.
머릿속의 위용 넘치는 그림자는 완벽히 사라졌고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사라졌다.
자신의 정신이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음을 느꼈고, 경계에 대한 깨달음 역시 크게 향상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엽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주위에는 이미 적지 않은 수의 제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서 있었다.
“엽 사형, 사형도 연화가 끝난 건가요?”
여명홍의 목소리가 그의 옆에서 들려왔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엽운은 눈살을 찌푸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 사제, 뭘 봤어?”
궁금한 듯 물었다.
“저는 과거 천검종의 영광을 봤습니다. 만약 이 연심시마단이 아니었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거에요. 원래 천검종은 천년 전 까지만 해도 몹시 강대했습니다. 진나라 전체가 우리의 통제 하에 있었고, 왕실조차 우리에게 복종하고 우리의 말을 따랐습니다.”
여명홍은 몹시 흥분 된 목소리로 말했다.
엽운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 저도 모르게 물었다.
“천검종의 흥망을 보았단 말이야? 장대한 위용을 떨치는 왕이 아니라?”
여명홍은 어안이 벙벙해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천검종의 역사와 과거의 영광을 봤어요. 우리 세대가 부상하면 천검종은 곧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진나라의 진정한 지배자가 될 거에요.”
“여 사제, 넌 대진제국에서 왔잖아. 설마 대진제국에 천검종 같은 종문이 없지는 않을 거 아니야?”
“지금의 천검종은 대진제국의 눈에 들어올지 모르지만, 천검종이 빛나던 시절에는 수백 명의 금단 수사가 있었어요. 아마 원영경 역시 두어명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정도 실력이라면 대진제국에서도 빼어난 수준 입니다.”
여명홍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천검종의 장래에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엽운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단진풍을 바라보더니 입가를 두어번 씰룩이다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볼 것 없어. 난 괜찮으니까. 왜 괜찮은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우선 당장은 바보인 척 하는 게 맞는 것 같군.”
단진풍이 입가를 씰룩이다가 전음으로 말했다.
엽운은 미간을 찌푸리고 똑같이 전음을 통해 말했다.
“뭘 봤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니 놀랍군.”
“네 녀석도 멀쩡한데 나라고 왜 안 괜찮겠어? 난 너랑 똑같이 왕의 모습을 봤다. 무릎을 꿇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모습이더군. 그런데 이 몸이 어디 쉽게 무릎을 꿇겠어? 그가 나를 복종시키려 했고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 그러다 별안간 머릿속에 혼란이 생겨났고, 회복 될 무렵에는 그 모습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더 이상 복종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고 말이야.”
단진풍은 한 걸음 다가와 전음으로 말했다.
엽운의 눈에 상찬과 경악이 동시에 나타났다.
단진풍의 의지력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다.
놀랍게도 오직 의지만으로 버텨냈고, 비록 마지막에는 혼돈에 빠졌지만 연심시마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이런 부분에서는 엽운조차 그에게 미치지 못했다.
“보니까 너랑 나를 제외하곤 모든 이들이 걸려든 것 같군. 연심시마단이 도대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까 우리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
단진풍은 나지막이 전음을 통해 말했다.
엽운은 당연히 무엇이 손해이고 이득인지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우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보아하니 모두들 연심시마단을 복용하고도 과격한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버텨낸 것 같군. 네 녀석들은 정말 천재로구나. 정말 부러울 지경이다. 놀랍게도 71명이 전부 시험을 통과하여 내문 제자가 되다니.”
흑운자는 화려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천천히 제자들을 훑어봤다.
흑운자는 연심시마단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직접 제작한 단약으로 몹시 신비로운 물건인데, 금제를 이용해 몇몇 환상들을 속에 봉인해 둔 것이다.
이것을 복용하면 심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복용한 자의 마음속에 그림자를 드리워 훗날 종문을 위해 쓰일 수 있게끔 만든다.
강대한 의지로 연심시마단의 환각에 저항할 수 있는 제자라면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전 자세히 제자들을 살펴보니 격렬히 몸부림을 치는 이는 없었는데, 다시 말해 연심시마단이 효능이 다했다는 뜻이다.
“생각지도 못했군, 전부 통과하다니 말이야. 과거에는 이런 이들이 드물었건만, 보아하니 이 제자들은 재능이 아주 출중한 모양이다.”
왼쪽에 앉아있던 백송자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천검종의 복이라 할 수 있지. 이 제자들 가운데 모용무정 같은 천재가 두어명만 나와 준다면 훗날 무영봉은 활기가 가득할 것이며 천검종에서의 지위가 지금 같지 않을거야.”
흑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조금 흥분한 듯 했다.
흑백 두 장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형형한 눈빛으로 제자들을 훑어보며 웃음을 지었다.
“자, 모두 시험을 통과했으니 정식으로 내문 제자가 된 것이다. 이제 내관에 가서 의복과 영패를 받고 거주지를 고르도록. 내일 오시에 다시 입운전으로 오면 무영봉 고위층의 선택을 받아 그들을 스승으로 모시게 될 거다.”
흰 옷의 제자는 손뼉을 치며 각각 조의 대장들에게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지시했다.
진양 일행은 이런 절차에 이미 익숙한 듯 위를 향해 인사를 올리더니 엽운 일행을 데리고 문 밖으로 나섰다.
“진 사형, 이제 무얼 하면 됩니까?”
오신융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는 진양에게 천촉봉 조의 선임으로 뽑혀 우두머리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니, 다음 행보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뭘 하냐고? 좀 전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냐? 당연히 내관에 가서 의복과 영패를 받고 거주지를 고르겠지. 그리고 잘 휴식을 취한 뒤 내일 다시 입운전에 와 스승을 구하고 입문하게 된다.”
진양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승을 찾아 입문하게 된다 하셨는데, 그럼 우리의 스승이 되는 분들은 어떤 실력과 지위를 가지고 계실까요?”
오신양은 다소 흥분 된 목소리로 물었다.
내문 제자가 되면 각자 은사를 한명 씩 만나게 되는데, 그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게 되는지는 훗날 수선의 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연히 모두 장로들과 사숙들 일테니, 안심해도 좋다. 수위는 적어도 축기경 중기는 될 것이니 너희들 정도는 충분히 지도할 수 있을 거다.”
진양은 오신양이 무엇을 묻는지 알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잘 됐군요.”
오신양은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엽운 일행을 바라봤다.
엽운은 빙긋 웃었다.
그에게 스승의 존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무각의 3층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 4층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이다.
선마지심이 있다면 스스로 수행할 수 있으며, 자원 역시 전혀 부족하지 않았기에 수위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데, 스승이 옆에서 그를 주시한다면 오히려 걱정만 늘 뿐이다.
“아 맞다, 진 사형. 내일 스승님을 만나 입문하게 되면 다시 천촉봉에 돌아갈 수도 있습니까?”
엽운은 별안간 무언가가 떠오른 듯 다급히 물었다.
“가능하다. 이번에는 너희들을 조금 빠듯하게 소집시켰으니, 내일이 이후로 3일 동안 천촉봉의 일을 처리할 수 있게끔 해줄 것이다. 3일이 지나고 나면 절대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선 안된다.”
진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짜증난다는 듯 대답했다.
엽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모든 수련 자원은 몸에 거의 다 지니고 있었고, 천촉봉에는 딱히 남은 것이 없지만, 천촉봉 거처의 앞뜰에서는 신우취왕이 마음 놓고 수행을 하고 있었기에 한 번은 돌아가 그를 데리고 무영봉으로 와야 했다.
내관처는 입운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대략 십 리 정도 거리였다.
엽운 일행의 속도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갈 수 있었다.
내관에서는 내문 제자의 흰 옷과 이름이 새겨진 청목 영패를 받았고, 엽운 일행은 숙소를 고르러 떠났다.
“거처에 대해 원하는 요구 사항이 있다면 얘기해도 좋다. 주소가 정해지면 그땐 바꿀 수 없으니까 말이야.”
진양은 제자들을 이끌고 내관의 작은 방으로 향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는 딱히 없습니다. 영기가 넘쳐 수행에 유리하기만 하면 됩니다.”
단진풍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맞아, 역시 영기가 충만한 곳일수록 좋겠죠.”
오신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너희들은 이제 막 내문 제자가 되었고, 숙소는 가장 외곽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영기가 상대적으로 약한 지역이지. 물론, 아무리 약하다 한들 천촉봉과 비교하자면 몇 배는 강력할 것이다.”
진양은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가장 약한 곳이 있으면 가장 강한 곳도 있을텐데, 그럼 영기가 가장 충만한 지역은 어디입니까?”
여명홍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진양은 노려보며 말했다.
“당연히 무영봉의 중심부겠지. 무봉대전이 있는 곳 말이다. 그곳은 봉주 대인께서 평소 일을 보시고 수행을 하시는 곳이다.”
단진풍 등이 입을 열기도 전에 진양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 너희들의 지위로는 욕심 부리지 말고 아무 곳이나 고르면 그만이다.”
엽운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쪽의 거대한 모래판을 바라봤다.
모래판 위에는 빛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엽운 일행의 숙소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로 하겠습니다.”
엽운은 한 걸음 다가가 가장 외곽의 산 쪽에 위치한 곳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